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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민우회 시민모니터링단 멤버들이 미디어 속 스포츠 장면에서의 여성 재현에 관한 모니터링 활동을 모두 마치고, 활동소감을 한 편의 글로 적어주셨습니다. 모니터링단 6명의 이야기를, 두 개 게시글로 나누어 세 편씩 소개합니다. 여기서는 시원, 함박, 이현님의 이야기를, 이전 글에서는 쓸구, 디디푸, 진원님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제목은 (진원님의 글을 제외하고) 편집팀에서 임의로 달았답니다. 2개월 동안 함께 시간과 공들여 모니터링 활동에 함께 해주신 멤버 여러분께 큰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 편집(성평등미디어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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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서사, 진화의 흔적을 찾아서
🌿글쓴이: 하시원 문학연구자. 학계노동자. 책상에 붙어 앉아 있는 시간 만큼 (혹은 그 이상), 몸을 움직여 운동하고 땀 흘리는 것을 사랑함. |
남성 엘리트 스포츠 관람과 나
오랫동안 스포츠의 관람자로 살았던 것 같다. 연식이 드러나는 말이겠지만, 1990년대 중반 농구대잔치 키즈로 살았다. 그 시절엔 실업팀과 대학팀이 자연스레 한데 뭉쳐 승부를 겨뤘고, 말 그래도 대잔치 같았다. 물론, 그건 남자 엘리트 선수들의 대잔치였다, 되짚어보니. 그리고 또, 《마지막 승부》(1994)가 있었고, 《슬램덩크》가 있었다. 거의 언제나 신체적 장애가 없으며 매력자산이 평균 이상으로 넘치는 이성애자 남자선수를 바라보고, 때로는 우상화하며, 응원하는 위치에 놓였다. 물론, 나는 ‘정다슬’이 되고 싶지도 않았고, ‘이한나 선배’도 아니었다. (이들이 누구인지 각주를 달아야 할까요.) 성정이나 기질상 남자든 여자든 우상화하는 것은 그때도 맞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다만, 정직하게 땀 흘려 훈련하고, 뛰고, 좌절하면 진심으로, 전심으로 응원해주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결국은 뭔가를 극복해내는 선수들에 나를 이입했던 것 같다. 그 극복의 대상이 전국제패나 국가대표 선발 같은 스케일의 것이 아니더라도. 물론, 1990년대의 한국은 조그마한 여자아이에게 그런 자리를 내주는 데 큰 관심이 없었다. 또래보다 몸피가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1학년 때 체육선생님은 내 높이뛰기를 보더니, 육상선수가 되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이 사람이 농담을 심하게 하는구나, 귓등으로 넘겨버렸다. 당시 뛰는 여자라면, ‘달려라 하니’ 정도였다. 하니와 나는 계층도 다르고, 무엇보다 불굴의 의지를 갖고 뭔가를 이루려는 여자에게 붙는 ‘악바리’ 칭호 역시 탐탁치 않았다. 그러니 하니도 되고 싶지 않았다. 1990년대 초는 임춘애(1969-)의 영향으로 가난과 절대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을 본인의 ‘깡다구’와 ‘악바리’ 정신으로 이겨내는 여성 스포츠인 형상이 계몽적으로 유통되었다. 체계적 훈련 방식도 없었고, 식단관리 당연히 없었고, 그런데 정신력으로 막 이겨내는 불굴의 여성. 그들을 “깡”있는 여자로 불렀고, 지금도 그런 식의 호명은 여성스포츠예능에서도 줄기차게 이어진다.
좀더 앞으로 시간을 당기자. 어쨌든 운동을 좋아하는 부모님 덕분에 자연스레 경기장과 집안에서 스포츠를 보는 일은 일상이었다. 관람하는 운동 경기의 종류도 제한이 없었다. 농구, 배구, 야구, 스케이트 등등, 종목도 가리지 않고 시즌 별로 다양하게 보았다. 아버지는 1990년대의 여자 어린이들에게 사주는 피겨스케이트 대신 스피드스케이트를 사와서 나에게 링크를 몇 번 돌게했던 적이 있다. 알다시피 스피드 스케이트는 앞날이 피겨 스케이트보다 길고, 발목 선에서 부츠가 끝나므로 (거의 구두 같음) 여러 모로 체력적 부담이 큰 것이었고, 나는 당연히 질색팔색하며 스케이트를 타지 않겠다고 했다. (젠더화된 스케이트란 말은 몰랐겠지만, 피겨는 여자아이의 것이라는 믿음이 당시 나에겐 확고했다.) 이제 노인이 된 아버지에게 그 당시 내게 스피드스케이트를 신기며 이것저것 주문한 까닭이 무엇이냐고, 혹시 무리 없이 그걸 소화해내면 운동 시키려고 했냐고 물어보니 (참으로 일찍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프리틴의 나는 공부를 잘 하는 데서 자기증명을 했던 것 같고, 운동은 한참 뒤로 잊혀졌다. 그나마 여자아이들에게 허용되는 운동인 ‘피구’는 기질상 너무 맞지 않아서 제일 먼저 공을 맞고 그 안을 벗어나는 게 마음이 편했다. 피구를 잘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씩 농구대잔치나 배구 경기를 보러 경기장에 가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 후 고등학교 때 잠시 해외에 살면서 운동을 잘 하는 게 성적만큼이나 중요한 시기를 맞이했다. 혼성 리그 서커와 테니스와 조정이 번갈아 나를 찾아왔다. 책상에서 장시간 붙어있던(것에서 승부를 걸던) 몸에서 이리 저리 근육을 쓰는 몸으로 나를 바꾸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조정선수가 될 몸은 아니었지만, 조정 선수들의 박자를 맞추며 고함치는 조그만 coxswain의 위치는 마음에 들었다. 그건 일정 체중 이하의 몸을 갖고 있되, 조정 선수와 동일한 근력운동을 소화해내는 일이었다. 비시즌에 하는 체력 운동을 잠시 맛본 나는 그게 나를 강하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맛본 근력운동의 매력은 이후 내가 계속 운동을 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수영은 학부 1학년 때부터 거의 쉼 없이 계속 하는 것 같다.
여성 운동인이자 여성운동의 관람자
세월이 흘러 흘러, 일년에 한 번은 《슬램덩크》를 재독하며 묵상하는 시간을 갖고, 여러 운동을 하며 시간을 지냈다. 물론, 취업도 해야 했고, 나이를 먹으며 사라지는 근육과 체력과 근성과도 씨름해야 했다. 한국의 여성운동 지형이 변하고 있다고 느낀 건 김혼비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2018)였다. 거기엔 젊은 여자만 있지 않았고, 50대의 여자들이 엄청난 체력과 기량을 선보였다. 그들에겐 또한 ‘펠루우십’ 내지는 ‘팀웍’이 있었다. 김혼비 작가의 필력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가 그려낸 여자 축구란 내가 처음으로 글로 접한, 매력 있는 여성들의 단체경기였다. 당시 내가 살던 지역에서 때마침 여자 축구 신입선수를 모집했지만, 생업에 쫓겨 신청은 감히 못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녀체력: 마흔, 여자가 체력을 키워야 할 때》(2018)도 출간되었다. 저자 이영미는 편집자였고, 운동을 ‘전혀’ 하지 않고 사십대에 이른, 어찌 보면 한국의 성실한 여성 모범생이 어떻게 몸을 쓰지 않고 중년에 이르는지를 보여주는 표본 같은 존재다. 그럼에도, 저자는 분연히 자신의 삶에서 운동없음의 관성을 깨고 어마어마한 체력, 그러니까 말 그대로 철인의 체력을 요구하는 세 종목을 다 소화해내기 시작한다. 이 두 권의 책 이야기를 왜 길게 하냐면, 이런 서사가 있어서 여성 운동 예능이 만들어질 토대가 생겨난 게 아닌가 싶어서이다. 이후 여성 운동서사는 여러 각도에서 자주 나왔다. 아무튼, 시리즈에서도 종목 별로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골 때리는 그녀들》의 시대가 왔다. 그냥 저절로, 별 문제 없이 그 시대가 열린 건 아니다. 앞서 말한 여성운동서사가 출간되었고, 반향을 일으켰고, 그리고 한국 여성들 스스로 ‘강해지자’는 욕구가 생겨났던 것 같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2015년부터 목격하고 참여한 페미니즘 ‘리부트’와, 미투운동, 그리고 여성의 몸에 대한 자생적, (자)의식적 고찰이 여성운동서사와 교차하는 지점을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건 분량상 다음 기회에.) 사실, 우리가 2025년 여름 내내 이 모니터링 그룹에서 자주 이야기했듯이, 《골 때리는 그녀들》은 고전의 반열에 들어갈 것이 분명한데, 이는 그 프로그램에 참여한 여성들의 노력과 실력과 역량이 예상치를 120%를 상회했기 때문이다. 풋살이란 종목이 그리 알려지지 않던 시절에, 그 예능 프로그램 제작자들의 애초 대충 세운 경기규칙과 경기장 사이즈 등이 거듭 변할 때마다 그들은 적응했고, 뛰어난 역량, 그러니까 일단은 시청자들 눈 앞에다가 ‘진정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그래서 《골 때리는 그녀들》은 애초 제작자들의 기회를 상회하며 자기갱신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생각해보자. 이 프로그램 이름도 멸칭 아닌가. 2010년대를 관통하며 대중적 여성주의진영에서 나온 이야기들 중, 뫄뫄녀,라는 호칭이 얼마나 여성을 멸시하고 납작하게 재현하는지 문제제기를 했던 순간을 기억해보자. 이 프로그램은 골때녀,라는 줄임말로 더 유통되는데, 이 프로그램 제목이 바로 2010년대 여성주의자들이 문제삼던 명칭 관습을 그대로 쓰면서 지금까지 왔다는 데 나는 여전히 문제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에 와서 프로그램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냥 여자도 아니고 골때리는 여자라는 사실이다. 공을 차는 걸 골 때리는 걸로 퉁치는 제목을 쓰고 아마 굉장한 위트 있는 명명이라고 누군가는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런 멸칭의 암시가 짙은 프로그램 안에 여러 직군의 여성들이 모였고, 그들의 열의와 집중력은 결국 프로그램의 역사를 새로 썼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성감독과 코치진, 남성진행자라는 악습은 반복된다. 그 악습 중에서도 초창기 자신보다 연장자인 여성 선수를 그냥 이름만 부르며 고함치던 몇 명의 남자감독들은 우리가 기억해두자. 호칭 떼고 부를 정도로 절대절명의 순간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여성운동서사는 진화하는가?
《골 때리는 그녀들》은 리그가 커지면서, 리그 승부 방식도 바뀌고 (나는 일관성 없게 규칙이 새로 생겼다 없어지는 것 때문에, 어느 시점부터 이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다.) 더 많은 여성출연진들이 이 프로그램에 목을 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여타 운동프로그램도 현재진형형으로 방영 중이다. 모니터링을 하면서 억지로, 눈물나게 봤던 《내일은 시구왕》같은 끔찍한 프로그램도 있지만, 《무쇠소녀단》시즌 1을 집중해서 다시 볼 수 있었고, 시즌 2를 현재 즐겁게 챙겨가며 보고 있다. 여성운동서사의 진화의 흔적은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볼 수 있을까?
2025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내가 집중해서 살펴 본 《마녀체력 농구부》와 《무쇠소녀단》에 국한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먼저, 이 두 프로그램 모두 남성감독과 코치, 남성해설자는 그대로 존재한다. 사실 이 구도가 사라질 때 우리는 진정한 여성스포츠 예능이 도래했다고 호들갑 떨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한계 구도에도 불구하고, 《마녀체력 농구부》는 각각의 특기와 약점을 가진 여성 참여자들의 면면을 최대한 입체적으로 보여주려는 시도를 한다. 《마녀체력 농구부》의 경우, 송은이나 허니제이, 별과 같은 단신 선수진과 옥자연, 장도연 등과 같은 장신 선수진을 고루 활용하여 각각의 성장을 보여준다. 선수들의 성장을 “깡”으로 환원시키거나 송은이를 곧바로 《슬램덩크》의 송태섭에 빗대는 장면은 대단히 재미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놀랐던 지점은 농구장 바깥에 서있는 카메라 댓수와 그 뒤의 카메라 감독들이었다. 《마녀체력 농구부》 제작을 위해 투입된 예산 규모가 그런 데서 보였달까. 모든 출연자 별로 카메라가 붙는다는 이야기이며, 여러 각도에서 최대한 다 살려 한 편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읽혔다. 그게 그다지 뾰족하게 늘지 않는 《마녀체력 농구부》의 출연진 일부의 실력을 보완하는 용도로 쓰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1출연자 1카메라는 또한 《무한도전》에서 시작된 예능계의 혁명이었다는 걸 기억해두자.) 어쨌든 여성출연지들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하겠다는 제작진의 의지가 보인다. 이러한 제작진의 집중력에도 불구하고, 선수들로 고용된 출연진들의 연습시간과 연습량에 대한 헌신도는 알 수가 없어서, 실제 촬영된 경기 시간과 경기 내용, 운동량 등은 밋밋하게 잡힌다. 실제 이들이 승부를 거는 상대가 여자 초등학생 농구팀, 여자 대학 농구동아리, 여자 사회인 농구 동아리였다가 결국 최초의 여자 초등학생 농구팀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으로 끝맺는 결말은 스스로를 우습게 만드는 전략이었다.
그리하여 《무쇠소녀단》이 왔다. 《마녀체력 농구부》와 《무쇠소녀단》의 제작 사이에는 직접적으로 논리적 인과관계나 친연성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렇게 소개하는 것은 《무쇠소녀단》이 앞서 《마녀체력 농구단》에서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뭉개고 간 것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며 제작을 했기 때문이다. 먼저, 남자 감(독)코(치) 설정은 그대로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뀌었는가? 이들에게 주어지는 미션 혹은 퀘스트의 단계가 체계적으로 세분되었다. 그리고 승부 상대, 혹은 실력향상을 입증할 관문이 매번 새롭게 갱신된다. 또한 이들이 참여하는 종목이 사실은 ‘개인’ 종목이기에, 출연진의 숫자를 줄여서 한 사람당 더 많은 제작비를 들이는 것으로 추정된다. 《무쇠소녀단》을 볼 때 감동하는 것은 국대급 선수들이 진천선수촌에서 받는 대우를 보며 감동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들은 좋은 옷을 입고, 종목의 특수성에 맞게 제작된 신발과 장비를 지급 받는다. 이들은 체계적 트레이닝을 받으며,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매일 어떻게 고군분투하는 지 공유한다. 일종의 ‘증빙’ 문화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이들의 기량이 향상되는 것을 시청자들은 눈앞에서 확인하고, 거기에 감정이입한다. 출연자들이 체계적으로 훈련받기에, 감정이입도도 체계적으로 상승한다. 실상 이들이 도전하는 종목의 성격상, 서너 달 훈련으로 완수될 수 없는 것들이기에 출연자들은 매번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럼에도 이들은 해냈고 해내고 있다. 내가 《무쇠소녀단》을 볼 때 또한 감동하는 것은 이들을 ‘여자’로 환원시키는 순간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이가 싸이클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그를 악바리라거나 깡이 있다는 식의 끔찍한 자막을 볼 필요가 없다. 그저 유이답게, 유려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그러나 그가 가진 근력과 근성으로 어떤 두려운 관문을 극복하는 것을 본다. 다른 출연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무쇠소녀단》이 유의미한 진보를 했다면, 여성의 몸을 입은 출연자들에게 생물학적 본질주의의 굴레를 씌우지 않은 채, 한 명의 인간이 가열차게, 그럼으로써 우아하게 자신의 자신됨을 증명하는 걸 살펴볼 수 있게 한다는 데 있다. 《무쇠소녀단》시즌 2에서는 경기 상대 레벨을 일정하게 올려서 생활체육 복싱대회에서 비슷한 체급으로 출전한 경력이 있는 여자선수들과 스파링을 시켜서 (그 전주까지는 지도 스파링이었다), 실전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자비가 없는 실전경험이었기에, 이 프로그램이 추구하는 리얼리즘이 무엇인지 볼 수 있었다. 또한, 네 명의 여성출연진들이 보여주는 지지와 격려는 과하지 않다.
스포츠 예능이란 신기방기한 장르
물론, 여전한 한계도 있다. 일단 나는 성인 여성을 가리켜 ‘소녀’로 부르는 것이 누구에게 덕이 되고 득이 되는지 궁금하다. 그냥 무쇠여자, 하면 안 되는 것인가. 이러한 명명법은 다시 한 번 스포츠 예능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번 모니터링 주간 모임에서도 한국 스포츠 예능에 비견될 만한 외국의 다른 장르가 있는가 질문이 나왔다. (아마 노새님이 제기한 질문인 걸로 기억한다.) 스포츠예능이 리얼리티 쇼의 하부장르로 출발한 것이라고 전제 한다면, 거기에 특정 스포츠를 접목시켰고, 거기에 특정 성별로 좁혀서 그들의 성장서사를 보여주는 것이 여성스포츠예능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다큐멘터리와 무엇이 같고 다른가? (이 하부장르의 혼종성과 모호함을 설명하기 위해선 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 그것이 여성 혹은 남성 스포츠 예능으로 정의해야 할까? 주지하다시피 2025년의 우리가 각본 없는 리얼리티 쇼를 기대하진 않는다. 다만, 스포츠 경기를 리얼리티 쇼 문법 안에 기입할 경우 예상 밖의 성장 상황 (누군가는 지지부진해야 하는 게 사실 맞지)과 승부 결과를 떠안고 가야 한다. 《무쇠소녀단》의 경우, 우발성을 어느 정도 감안하고 제작을 하고 있다면 《마녀체력 농구부》는 우발성마저 통제하다가 밋밋한 결과를 보여주고 끝난 것이라 하겠다. 승부의 우발성 때문에 각본이 있네 없네, 제작진이 어디까지 개입했네 하는 설왕설래가 있어온 것이다. (《골 때리는 그녀들》도 한때 경기 조작설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우발성도 껴안고, 각 출연진들이 생업에도 불구하고 훈련할 시간을 충분히 제공하고, 이들에게 최고의 기량을 가진 코치진을 선사하고, 서로 만나 조화롭고 아름다울 우정을 허락하는 것이 현재 《무쇠소녀단》의 성공 요인으로 꼽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역시 이러한 스포츠 예능에서 선보이는 여성의 신체가 특정 신장 이상과 특정 체중 이하의 역시나 매력자산이 넘치는 여성연예인의 것이라는 점은 우리가 계속 생각해야 할 지점 같다. 《무쇠소녀단》이 지금처럼 순항하고 나면, 다양한 모양과 나잇대의 여성 신체, 그리고 비백인 유색인종의 신체가 우리 앞에 등장할 수 있을까. 예능을 논의할 때 당위가 얼마나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까. 여성스포츠예능이라는 성장서사가 내 눈앞에 나타난지는 대략 7년 전이 된 것 같은데, 《무쇠소녀단》이나 여타 좋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장르의 완성도에 도달한다면, 그 다음은 우리가 어떤 몸을 규범화하고, 이상화해왔는지 반성할 수 있지 않을까. 여성 페미니트스에게 세상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달라고 할 수 없듯, 여러 제약과 한계를 넘어 지금에 이른 여성스포츠 예능에 모든 걸 다 주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2025년 이후 우리가 기대해야 할 예능은 (가시화된/비가시화된) 장애를 가진 몸, 인종과 계층이 다른 몸들이 티비에 들어오게 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예능은 상당히 친화적 장르라고. 스포츠 예능에 여성의 참여를 도모했다면, 우리는 스포츠 예능을 만들고 비판적으로 읽는 걸 통해 2025년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를 시도해볼 수 있게 해야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보통 이럴 때 결론을 대신하여, 란 말을 쓴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렇게 길게 쓸 생각은 아니었다. 이번 민우회 모니터링단에 참여하며,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던 스포츠예능을 많이 알게 되었다. 말 그대로 병맛이고, 참담한 것들, 눈과 마음을 동시에 찌르는 유해한 것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여성들이 근력을 키우고 강인함과 자긍심을 뽐내는 창구가 이 정도로 생겨났다는 것들을 재확인하며 기쁜 순간도 꽤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몸이 힘들더라도 이 모임이 오프라인이었으면 좋았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몸을 쓰는 일이 마음을 쓰는 일과 다르지 않으며, 몸을 강하게 만들어서 여러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들이 이렇게 다양하게 있다는 걸 새삼스레 되짚는 일은 귀했기 때문이다. 줌의 형식이 아닌, 직접 한 공간에 모여 그런 걸 공유하는 기쁨도 느끼고 싶었다. 어쨌든, 지난 6-8주 동안 집중적으로 여성스포츠예능을 관찰했을 뿐 아니라, 그걸 보는 것이 순차적으로 나를, 내 운동을, 내 몸을 어떻게 바꾸는지도 추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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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미디어에서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해야 할 것
🌿글쓴이: 함박 하키선수 출신으로 운동하는 운동가이고 싶은 사람. 모든 운동(sport & movement)이 모든 사람의 일상이면 좋겠고 모두가 일상에서 운동하는 사회를 꿈꿉니다. 스포츠인권연구소 사무총장, 문화연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
TV 시청, 영화 관람, 독서를 즐기던 전직 운동선수(=글쓴이 함박님 본인입니다)가 선택한 석사 학위 논문 테마는 “스포츠 중계방송” 이었다. 마침 시드니 올림픽이 열렸던 해였다. 당시 올림픽 최고 스타는 사격에서 은메달을 딴 강초현 선수였고 '국민 여동생'으로 불렸다. 영화 “어린신부(2004)”가 개봉하기 전이었다.
여성학적 관점의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불리는 스포츠 경기 중계방송에서 어떻게 스포츠 선수들에게 '국민 여동생', '국민 영웅' 프레임을 씌우게 되는 건지 궁금했다. 그렇게 스포츠 중계방송의 서사 구조를 분석하고 ‘국민 여동생’, ‘국민 영웅’과 같은 호명이 서사 구조의 어떤 단계에서 특정한 기능을 하는지 분석했다. 그때부터 어렴풋이 여성, 특히 '어린/여성/스포츠 선수'를 대상화하는 프레임을 스포츠 중계방송에서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는지 이해하게 되었고, 미디어에서 여성 스포츠를 재현하는 방식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가지고 살펴보게 된 것 같다.
대학원 진학 직전 1999년에 열린 미국 여자 월드컵 경기 결승전을 마치고 환호하던 브랜디 차스테인 선수의 사진은 아주 오랫동안 내 책상 앞에 붙어 있었는데, 웃통을 벗어던지고 환호하는 모습의 그 사진은 마냥 멋있기만 했고 보기만 해도 심장이 벌렁벌렁 할 정도였다. 골을 넣고, 그리고 이겼을 때 그 승리의 감각이 고스란히 사진에 담겨 있다고 생각해서 너무 좋았었다. 지금도 이 사진을 보면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 때의 신선한 충격이 떠 올라 기분이 좋아진다.


(당시 상대적으로 덜 보수적이었던 중앙일보는 정면 사진을, 조선일보는 측면 사진을 1면에 게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진출처: BBC, 연합뉴스)
돌이켜 보니, 이때부터 미디어에 의해 재구성된 여성과 여성 스포츠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특히, 결혼을 하고 나니 못 보던 것들이 보이기도 했다. 남편의 셔츠 색상(누렇거나, 하얀)을 가지고 여성(배우자)의 (살림)능력을 평가하는 ‘옥시크린’ 광고나, 스포츠 중계방송의 해설가나 캐스터가 모두 남성이라는 점, '태극낭자' 못지않게 듣기 싫은 ‘엄마 선수(드물기에 더 강조되었던...)’, ‘엄마 리더십’ 혹은 ‘언니 리더십’ 등이 불편했다. 그럼에도 TV시청을 좋아하기에 불편함을 견뎌 내느라 피곤했다.
당시(2000년대 초) 미디어 스포츠와 관련한 국내 연구들은 대부분 '여성 스포츠 보도량'에 대한 것이었다고 기억한다. TV방송은 말할 것도 없고 신문 보도나 포털 업로드량 자체가 터무니없이 적었다. 그 때보다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성 스포츠에 긍정적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이번 모니터링에 참여하면서 느낀 것도 여성 스포츠 프로그램의 양뿐 아니라 형식과 종목 다양성이 매우 부족하고 여전히 여성 스포츠를 신기한 구경거리로서 대상화하는 것이 느껴진다.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내가 가장 불편해 하는 지점이다. 아직도 일상에서 미디어에서 스포츠 하는 여성이나 여성의 스포츠 활동을 보기 드문 구경거리 정도로 취급하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미국의 여성스포츠재단(Women’s Sports Foundation)이 2020년에 발표한 보고서 “Chasing Equity: The Triumphs,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in Sports for Girls and Women”에서 촉구하는 '행동 지침(Call for Action)'에서는 스포츠 관객과 팬층을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미디어가 일상적으로 여성 스포츠를 취재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를 통해 관객과 팬들이 여성 스포츠에 대해 기대치를 쌓고 경기에 대해 이해하며 선수와 팀의 정보를 통해 친밀감을 쌓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여성 스포츠 방송의 질을 향상시켜야 하며, 여성 스포츠 선수들의 관습적인 서사를 넘어 성별 고정관념, 성역할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성별 보다 스포츠 선수 중심의 아이디어와 질문을 담아 재현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에 더하여 미디어 스포츠 업계에서 더 많은 여성을 고용하고 양성,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성별에 맞는 방송의 질과 양을 보장하고 여성 스포츠를 더 쉽고 효과적으로 재현, 전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영화배우 우피 골드버그가 설립한 여성스포츠전문채널 AWSN(All Women’s Sports Network)를 눈여겨보고 있다. 홈페이지(https://www.awsn.tv/about)에 따르면 AWSN의 궁극적인 목표는 ‘스포츠 대표성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여성 선수들의 권익을 한 걸음씩 옹호하는 것’이라고 한다.
국내 여성스포츠 중계방송이나 예능도 이와 유사한 목표와 취지를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 여성의 스포츠 활동이나 스포츠 하는 여성을 대상화하지 말고 스포츠 본연의 즐거움과 스포츠 하는 여성들의 증진하는 탁월성과 진정성에, 그들의 비하인드 서사에 관심을 주는 프로그램 아울러 방송이 있으면 좋겠다.
모니터링 활동을 하면서 하고 싶어지는 활동 아이디어나 많이 떠올랐고 목표 같이 것이 조금 생기기도 했다. 스스로 앞장서고 길을 트는 개척자는 못 되고... 등 떠밀거나 멱살 잡고 끌고 가면 열심히 하는 스타일로 살아온 사람이라 먼저 뭘 시작하긴 쉽지 않겠지만, 시민 모니터링활동을 함께한 동지들과 무언가를 하게 된다면 열심히 해볼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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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거 보이면 같이 분노할 동료들을 만날 수 있겠다
🌿글쓴이: 이현 문화연대 대안체육회 소속 스포츠인권활동가. 30대 중반이 넘어서야 스포츠의 매력에 빠져 탁구와 사이클, 클라이밍을 즐기는 생활체육인이자 체육학을 전공하는 만학도. |
안녕하세요, 문화연대 대안체육회에서 스포츠권 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박이현입니다. 제가 활동하는 문화연대는 문화사회 실현을 위해 활동하는 문화운동단체인데요. 대안체육회는 그중 스포츠 분야를 담당하는 위원회입니다. 대'안'체육회는 공공기관인 대'한'체육회를 비틀어지은 이름으로, 우리는 스포츠 미투 등 스포츠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활동을 비롯해 대안적인 스포츠 정책을 만들거나, 대학청소노동자 등 소외된 사람들의 스포츠권을 위한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어요.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쇼츠를 보다보면 여성의 스포츠 활동을 다룬 예능프로그램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여성 선수의 헛발질을 희화화하는 장면이나 이상하게 성 대결 구도로 몰아가는 장면 등을 보면서 불편함을 감추기 힘들었어요. 그러던 중 민우회의 <여성x스포츠 시민모니터링단>(이하 시민모니터링단) 활동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요. 같이 분노할 동료들을 만날 수 있겠다는 기대로 시민모니터링단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헌장에서 “스포츠 활동은 인간의 권리이다. 모든 인간은 차별 없이 올림픽 정신 안에서 스포츠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하지만 여성은 청소년기부터 신체활동에 있어 문화적이고 제도적인 차별을 겪고 있습니다.
요즘 여성들의 스포츠 참여를 다룬 프로그램들이 많이 제작되고 있고, 여성 프로 스포츠 시장도 그만큼 성장하고 있다고 해요. 여기에 영향을 받아서 생활체육에 있어서도 여성의 참여가 더 많아지고 있는 추세인 것 같습니다. 이제 풋살장에서 여성 선수를 만나는 건 그리 낯선 일은 아니게 되었지요.
미디어에서 긍정적으로 재현되는 여성의 스포츠 활동은 스포츠에 대한 심리적 허들을 낮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포츠를 통해 우리가 건강과 행복을 얻고 또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부장적인 시선에서 여성을 다루는 매체가 많은 것도 뼈아픈 사실이죠. 그래서 잘못된 점은 지적하고 잘한 점은 칭찬하는 모니터링단 활동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시민모니터링단 활동을 통해 <여왕벌게임>, <무쇠소녀단>, <강철부대W> 등의 여성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했습니다.
여성의 외모가 남성의 시선으로 평가되지는 않는지, 여성 출연자의 승부욕이 진지하게 묘사되고 있는지, 여성들의 연대와 팀워크가 잘 묘사되고 있는지, 남성 출연자가 과도한 역할을 부여받지 않는지 등의 질문을 갖고 프로그램들을 살펴보았어요.
<무쇠소녀단>은 여성 연예인 4명이 철인3종에 도전하는 예능프로그램인데요. 첫화부터 성차별적인 장면이 나오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며 보게 되었습니다. 프로그램이 시작하자마자 지도자로 종합격투기 선수이자 해병대 출신의 방송인 김동현 선수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참여자는 모두 여성인데 지도자만 남성인데다가, 엘리트 선수 출신이라 어떤 전형적인 남성 지도자상을 보이지 않을까 우려가 되었는데요. 다행히 김동현 선수는 철인 3종 경기를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철인3종경기에 있어서는 비엘리트 출신의 생활체육인으로서 프로그램에서 소개되고 또 그런 역할을 수행합니다. 김동현 선수는 프로그램 내내 성차별적인 발언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아마 작가들의 역할도 크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스페셜코치로서 다른 여성 선수들이 추후 등장하기도 했고요.
<무쇠소녀단>은 전반적으로 여성들의 우정과 연대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한편, 참여 동기 역시 건강과 같은 일상적인 것으로 기존 성장 서사와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어요.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무쇠소녀단 3화에서 중간 미션에 ‘할머니팀’이 등장해 함께 경쟁하는 모습이었는데요. 운동선수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여성이 등장했다는 점과 단순히 이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여성들 간의 우정과 연대를 긍정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여왕벌게임>은 여러모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6인의 여성 리더와 18인의 남성 참가자가 참여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인데, 제목인 ‘여왕벌’에서부터 다분히 여성혐오적인 메타포가 사용되었지요. 남성 참가자들은 겉으로는 복종하고 있지만 실은 여성 리더들(과 그들의 여성성)을 비웃는 듯한 장면이 많았어요. 한편 미션들에는 참가자의 안전과 평등을 위한 규칙들이 누락되어있어 일부러 혼란과 갈등을 조장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이 프로그램은 ‘특권을 받고 있는 건 여성들이고, 남성들은 오히려 고생을 하고 있다’는 이준석적(!) 세계관 아래 설계된 프로그램으로, “수컷의 반란”이라거나 “여왕벌의 몰락” 등 사이다 서사(혹은 처벌 서사)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연구와 비판이 필요한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민모니터링단 활동을 하며 다른 모니터링원들이 소개하는 성차별적인 장면을 보며 함께 분노하기도 했고요. 한편 이렇게 묘사되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각자 매주 과제를 공유하며 더 많은 사례를 알게 되었고, 서로 생각을 나누고 또 함께 읽을 거리도 주고받으며 고민에 깊이감이 더 생기기도 했습니다.
시민모니터링단의 의견이 미디어 제작자들에게 잘 전달이 되어, 여성의 스포츠 활동이 가부장적 시선에서 재현되지 않길, 그리고 스포츠를 통해 연대와 우정을 나누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이 더 많이 묘사되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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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활동소식 소개
성역할, 승부욕, 팀워크, 성장서사, 외모재현 4개의 모니터링 키워드를 가지고 시민들과 함께 스포츠 콘텐츠 속 여성 재현 모니터링한 이야기! 2025 여성x스포츠 미디어 시민모니터링단의 활동 후기를 보시려면 클릭해주세요!
2025 시민모니터링단 활동 후기 바로가기
스포츠x여성 모니터링 이야기는 2025년 10월 24일 금요일 저녁 7시, 민우회 '미디어 다양성 PT쇼' 행사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어요. 미디어에 등장하는 소수자 재현이 더욱 성평등하고 다양하게 이어질 수 있도록 올해는 미디어 속 #장애, #아동, #여성, #트랜스젠더 재현 관련 이야기들을 준비했습니다. 행사에 함께 해주세요!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 2층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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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민우회 시민모니터링단 멤버들이 미디어 속 스포츠 장면에서의 여성 재현에 관한 모니터링 활동을 모두 마치고, 활동소감을 한 편의 글로 적어주셨습니다. 모니터링단 6명의 이야기를, 두 개 게시글로 나누어 세 편씩 소개합니다. 여기서는 시원, 함박, 이현님의 이야기를, 이전 글에서는 쓸구, 디디푸, 진원님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제목은 (진원님의 글을 제외하고) 편집팀에서 임의로 달았답니다. 2개월 동안 함께 시간과 공들여 모니터링 활동에 함께 해주신 멤버 여러분께 큰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 편집(성평등미디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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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서사, 진화의 흔적을 찾아서
🌿글쓴이: 하시원
문학연구자. 학계노동자. 책상에 붙어 앉아 있는 시간 만큼 (혹은 그 이상), 몸을 움직여 운동하고 땀 흘리는 것을 사랑함.
남성 엘리트 스포츠 관람과 나
오랫동안 스포츠의 관람자로 살았던 것 같다. 연식이 드러나는 말이겠지만, 1990년대 중반 농구대잔치 키즈로 살았다. 그 시절엔 실업팀과 대학팀이 자연스레 한데 뭉쳐 승부를 겨뤘고, 말 그래도 대잔치 같았다. 물론, 그건 남자 엘리트 선수들의 대잔치였다, 되짚어보니. 그리고 또, 《마지막 승부》(1994)가 있었고, 《슬램덩크》가 있었다. 거의 언제나 신체적 장애가 없으며 매력자산이 평균 이상으로 넘치는 이성애자 남자선수를 바라보고, 때로는 우상화하며, 응원하는 위치에 놓였다. 물론, 나는 ‘정다슬’이 되고 싶지도 않았고, ‘이한나 선배’도 아니었다. (이들이 누구인지 각주를 달아야 할까요.) 성정이나 기질상 남자든 여자든 우상화하는 것은 그때도 맞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다만, 정직하게 땀 흘려 훈련하고, 뛰고, 좌절하면 진심으로, 전심으로 응원해주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결국은 뭔가를 극복해내는 선수들에 나를 이입했던 것 같다. 그 극복의 대상이 전국제패나 국가대표 선발 같은 스케일의 것이 아니더라도. 물론, 1990년대의 한국은 조그마한 여자아이에게 그런 자리를 내주는 데 큰 관심이 없었다. 또래보다 몸피가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1학년 때 체육선생님은 내 높이뛰기를 보더니, 육상선수가 되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이 사람이 농담을 심하게 하는구나, 귓등으로 넘겨버렸다. 당시 뛰는 여자라면, ‘달려라 하니’ 정도였다. 하니와 나는 계층도 다르고, 무엇보다 불굴의 의지를 갖고 뭔가를 이루려는 여자에게 붙는 ‘악바리’ 칭호 역시 탐탁치 않았다. 그러니 하니도 되고 싶지 않았다. 1990년대 초는 임춘애(1969-)의 영향으로 가난과 절대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을 본인의 ‘깡다구’와 ‘악바리’ 정신으로 이겨내는 여성 스포츠인 형상이 계몽적으로 유통되었다. 체계적 훈련 방식도 없었고, 식단관리 당연히 없었고, 그런데 정신력으로 막 이겨내는 불굴의 여성. 그들을 “깡”있는 여자로 불렀고, 지금도 그런 식의 호명은 여성스포츠예능에서도 줄기차게 이어진다.
좀더 앞으로 시간을 당기자. 어쨌든 운동을 좋아하는 부모님 덕분에 자연스레 경기장과 집안에서 스포츠를 보는 일은 일상이었다. 관람하는 운동 경기의 종류도 제한이 없었다. 농구, 배구, 야구, 스케이트 등등, 종목도 가리지 않고 시즌 별로 다양하게 보았다. 아버지는 1990년대의 여자 어린이들에게 사주는 피겨스케이트 대신 스피드스케이트를 사와서 나에게 링크를 몇 번 돌게했던 적이 있다. 알다시피 스피드 스케이트는 앞날이 피겨 스케이트보다 길고, 발목 선에서 부츠가 끝나므로 (거의 구두 같음) 여러 모로 체력적 부담이 큰 것이었고, 나는 당연히 질색팔색하며 스케이트를 타지 않겠다고 했다. (젠더화된 스케이트란 말은 몰랐겠지만, 피겨는 여자아이의 것이라는 믿음이 당시 나에겐 확고했다.) 이제 노인이 된 아버지에게 그 당시 내게 스피드스케이트를 신기며 이것저것 주문한 까닭이 무엇이냐고, 혹시 무리 없이 그걸 소화해내면 운동 시키려고 했냐고 물어보니 (참으로 일찍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프리틴의 나는 공부를 잘 하는 데서 자기증명을 했던 것 같고, 운동은 한참 뒤로 잊혀졌다. 그나마 여자아이들에게 허용되는 운동인 ‘피구’는 기질상 너무 맞지 않아서 제일 먼저 공을 맞고 그 안을 벗어나는 게 마음이 편했다. 피구를 잘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씩 농구대잔치나 배구 경기를 보러 경기장에 가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 후 고등학교 때 잠시 해외에 살면서 운동을 잘 하는 게 성적만큼이나 중요한 시기를 맞이했다. 혼성 리그 서커와 테니스와 조정이 번갈아 나를 찾아왔다. 책상에서 장시간 붙어있던(것에서 승부를 걸던) 몸에서 이리 저리 근육을 쓰는 몸으로 나를 바꾸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조정선수가 될 몸은 아니었지만, 조정 선수들의 박자를 맞추며 고함치는 조그만 coxswain의 위치는 마음에 들었다. 그건 일정 체중 이하의 몸을 갖고 있되, 조정 선수와 동일한 근력운동을 소화해내는 일이었다. 비시즌에 하는 체력 운동을 잠시 맛본 나는 그게 나를 강하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맛본 근력운동의 매력은 이후 내가 계속 운동을 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수영은 학부 1학년 때부터 거의 쉼 없이 계속 하는 것 같다.
여성 운동인이자 여성운동의 관람자
세월이 흘러 흘러, 일년에 한 번은 《슬램덩크》를 재독하며 묵상하는 시간을 갖고, 여러 운동을 하며 시간을 지냈다. 물론, 취업도 해야 했고, 나이를 먹으며 사라지는 근육과 체력과 근성과도 씨름해야 했다. 한국의 여성운동 지형이 변하고 있다고 느낀 건 김혼비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2018)였다. 거기엔 젊은 여자만 있지 않았고, 50대의 여자들이 엄청난 체력과 기량을 선보였다. 그들에겐 또한 ‘펠루우십’ 내지는 ‘팀웍’이 있었다. 김혼비 작가의 필력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가 그려낸 여자 축구란 내가 처음으로 글로 접한, 매력 있는 여성들의 단체경기였다. 당시 내가 살던 지역에서 때마침 여자 축구 신입선수를 모집했지만, 생업에 쫓겨 신청은 감히 못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녀체력: 마흔, 여자가 체력을 키워야 할 때》(2018)도 출간되었다. 저자 이영미는 편집자였고, 운동을 ‘전혀’ 하지 않고 사십대에 이른, 어찌 보면 한국의 성실한 여성 모범생이 어떻게 몸을 쓰지 않고 중년에 이르는지를 보여주는 표본 같은 존재다. 그럼에도, 저자는 분연히 자신의 삶에서 운동없음의 관성을 깨고 어마어마한 체력, 그러니까 말 그대로 철인의 체력을 요구하는 세 종목을 다 소화해내기 시작한다. 이 두 권의 책 이야기를 왜 길게 하냐면, 이런 서사가 있어서 여성 운동 예능이 만들어질 토대가 생겨난 게 아닌가 싶어서이다. 이후 여성 운동서사는 여러 각도에서 자주 나왔다. 아무튼, 시리즈에서도 종목 별로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골 때리는 그녀들》의 시대가 왔다. 그냥 저절로, 별 문제 없이 그 시대가 열린 건 아니다. 앞서 말한 여성운동서사가 출간되었고, 반향을 일으켰고, 그리고 한국 여성들 스스로 ‘강해지자’는 욕구가 생겨났던 것 같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2015년부터 목격하고 참여한 페미니즘 ‘리부트’와, 미투운동, 그리고 여성의 몸에 대한 자생적, (자)의식적 고찰이 여성운동서사와 교차하는 지점을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건 분량상 다음 기회에.) 사실, 우리가 2025년 여름 내내 이 모니터링 그룹에서 자주 이야기했듯이, 《골 때리는 그녀들》은 고전의 반열에 들어갈 것이 분명한데, 이는 그 프로그램에 참여한 여성들의 노력과 실력과 역량이 예상치를 120%를 상회했기 때문이다. 풋살이란 종목이 그리 알려지지 않던 시절에, 그 예능 프로그램 제작자들의 애초 대충 세운 경기규칙과 경기장 사이즈 등이 거듭 변할 때마다 그들은 적응했고, 뛰어난 역량, 그러니까 일단은 시청자들 눈 앞에다가 ‘진정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그래서 《골 때리는 그녀들》은 애초 제작자들의 기회를 상회하며 자기갱신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생각해보자. 이 프로그램 이름도 멸칭 아닌가. 2010년대를 관통하며 대중적 여성주의진영에서 나온 이야기들 중, 뫄뫄녀,라는 호칭이 얼마나 여성을 멸시하고 납작하게 재현하는지 문제제기를 했던 순간을 기억해보자. 이 프로그램은 골때녀,라는 줄임말로 더 유통되는데, 이 프로그램 제목이 바로 2010년대 여성주의자들이 문제삼던 명칭 관습을 그대로 쓰면서 지금까지 왔다는 데 나는 여전히 문제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에 와서 프로그램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냥 여자도 아니고 골때리는 여자라는 사실이다. 공을 차는 걸 골 때리는 걸로 퉁치는 제목을 쓰고 아마 굉장한 위트 있는 명명이라고 누군가는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런 멸칭의 암시가 짙은 프로그램 안에 여러 직군의 여성들이 모였고, 그들의 열의와 집중력은 결국 프로그램의 역사를 새로 썼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성감독과 코치진, 남성진행자라는 악습은 반복된다. 그 악습 중에서도 초창기 자신보다 연장자인 여성 선수를 그냥 이름만 부르며 고함치던 몇 명의 남자감독들은 우리가 기억해두자. 호칭 떼고 부를 정도로 절대절명의 순간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여성운동서사는 진화하는가?
《골 때리는 그녀들》은 리그가 커지면서, 리그 승부 방식도 바뀌고 (나는 일관성 없게 규칙이 새로 생겼다 없어지는 것 때문에, 어느 시점부터 이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다.) 더 많은 여성출연진들이 이 프로그램에 목을 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여타 운동프로그램도 현재진형형으로 방영 중이다. 모니터링을 하면서 억지로, 눈물나게 봤던 《내일은 시구왕》같은 끔찍한 프로그램도 있지만, 《무쇠소녀단》시즌 1을 집중해서 다시 볼 수 있었고, 시즌 2를 현재 즐겁게 챙겨가며 보고 있다. 여성운동서사의 진화의 흔적은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볼 수 있을까?
2025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내가 집중해서 살펴 본 《마녀체력 농구부》와 《무쇠소녀단》에 국한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먼저, 이 두 프로그램 모두 남성감독과 코치, 남성해설자는 그대로 존재한다. 사실 이 구도가 사라질 때 우리는 진정한 여성스포츠 예능이 도래했다고 호들갑 떨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한계 구도에도 불구하고, 《마녀체력 농구부》는 각각의 특기와 약점을 가진 여성 참여자들의 면면을 최대한 입체적으로 보여주려는 시도를 한다. 《마녀체력 농구부》의 경우, 송은이나 허니제이, 별과 같은 단신 선수진과 옥자연, 장도연 등과 같은 장신 선수진을 고루 활용하여 각각의 성장을 보여준다. 선수들의 성장을 “깡”으로 환원시키거나 송은이를 곧바로 《슬램덩크》의 송태섭에 빗대는 장면은 대단히 재미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놀랐던 지점은 농구장 바깥에 서있는 카메라 댓수와 그 뒤의 카메라 감독들이었다. 《마녀체력 농구부》 제작을 위해 투입된 예산 규모가 그런 데서 보였달까. 모든 출연자 별로 카메라가 붙는다는 이야기이며, 여러 각도에서 최대한 다 살려 한 편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읽혔다. 그게 그다지 뾰족하게 늘지 않는 《마녀체력 농구부》의 출연진 일부의 실력을 보완하는 용도로 쓰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1출연자 1카메라는 또한 《무한도전》에서 시작된 예능계의 혁명이었다는 걸 기억해두자.) 어쨌든 여성출연지들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하겠다는 제작진의 의지가 보인다. 이러한 제작진의 집중력에도 불구하고, 선수들로 고용된 출연진들의 연습시간과 연습량에 대한 헌신도는 알 수가 없어서, 실제 촬영된 경기 시간과 경기 내용, 운동량 등은 밋밋하게 잡힌다. 실제 이들이 승부를 거는 상대가 여자 초등학생 농구팀, 여자 대학 농구동아리, 여자 사회인 농구 동아리였다가 결국 최초의 여자 초등학생 농구팀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으로 끝맺는 결말은 스스로를 우습게 만드는 전략이었다.
그리하여 《무쇠소녀단》이 왔다. 《마녀체력 농구부》와 《무쇠소녀단》의 제작 사이에는 직접적으로 논리적 인과관계나 친연성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렇게 소개하는 것은 《무쇠소녀단》이 앞서 《마녀체력 농구단》에서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뭉개고 간 것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며 제작을 했기 때문이다. 먼저, 남자 감(독)코(치) 설정은 그대로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뀌었는가? 이들에게 주어지는 미션 혹은 퀘스트의 단계가 체계적으로 세분되었다. 그리고 승부 상대, 혹은 실력향상을 입증할 관문이 매번 새롭게 갱신된다. 또한 이들이 참여하는 종목이 사실은 ‘개인’ 종목이기에, 출연진의 숫자를 줄여서 한 사람당 더 많은 제작비를 들이는 것으로 추정된다. 《무쇠소녀단》을 볼 때 감동하는 것은 국대급 선수들이 진천선수촌에서 받는 대우를 보며 감동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들은 좋은 옷을 입고, 종목의 특수성에 맞게 제작된 신발과 장비를 지급 받는다. 이들은 체계적 트레이닝을 받으며,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매일 어떻게 고군분투하는 지 공유한다. 일종의 ‘증빙’ 문화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이들의 기량이 향상되는 것을 시청자들은 눈앞에서 확인하고, 거기에 감정이입한다. 출연자들이 체계적으로 훈련받기에, 감정이입도도 체계적으로 상승한다. 실상 이들이 도전하는 종목의 성격상, 서너 달 훈련으로 완수될 수 없는 것들이기에 출연자들은 매번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럼에도 이들은 해냈고 해내고 있다. 내가 《무쇠소녀단》을 볼 때 또한 감동하는 것은 이들을 ‘여자’로 환원시키는 순간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이가 싸이클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그를 악바리라거나 깡이 있다는 식의 끔찍한 자막을 볼 필요가 없다. 그저 유이답게, 유려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그러나 그가 가진 근력과 근성으로 어떤 두려운 관문을 극복하는 것을 본다. 다른 출연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무쇠소녀단》이 유의미한 진보를 했다면, 여성의 몸을 입은 출연자들에게 생물학적 본질주의의 굴레를 씌우지 않은 채, 한 명의 인간이 가열차게, 그럼으로써 우아하게 자신의 자신됨을 증명하는 걸 살펴볼 수 있게 한다는 데 있다. 《무쇠소녀단》시즌 2에서는 경기 상대 레벨을 일정하게 올려서 생활체육 복싱대회에서 비슷한 체급으로 출전한 경력이 있는 여자선수들과 스파링을 시켜서 (그 전주까지는 지도 스파링이었다), 실전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자비가 없는 실전경험이었기에, 이 프로그램이 추구하는 리얼리즘이 무엇인지 볼 수 있었다. 또한, 네 명의 여성출연진들이 보여주는 지지와 격려는 과하지 않다.
스포츠 예능이란 신기방기한 장르
물론, 여전한 한계도 있다. 일단 나는 성인 여성을 가리켜 ‘소녀’로 부르는 것이 누구에게 덕이 되고 득이 되는지 궁금하다. 그냥 무쇠여자, 하면 안 되는 것인가. 이러한 명명법은 다시 한 번 스포츠 예능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번 모니터링 주간 모임에서도 한국 스포츠 예능에 비견될 만한 외국의 다른 장르가 있는가 질문이 나왔다. (아마 노새님이 제기한 질문인 걸로 기억한다.) 스포츠예능이 리얼리티 쇼의 하부장르로 출발한 것이라고 전제 한다면, 거기에 특정 스포츠를 접목시켰고, 거기에 특정 성별로 좁혀서 그들의 성장서사를 보여주는 것이 여성스포츠예능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다큐멘터리와 무엇이 같고 다른가? (이 하부장르의 혼종성과 모호함을 설명하기 위해선 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 그것이 여성 혹은 남성 스포츠 예능으로 정의해야 할까? 주지하다시피 2025년의 우리가 각본 없는 리얼리티 쇼를 기대하진 않는다. 다만, 스포츠 경기를 리얼리티 쇼 문법 안에 기입할 경우 예상 밖의 성장 상황 (누군가는 지지부진해야 하는 게 사실 맞지)과 승부 결과를 떠안고 가야 한다. 《무쇠소녀단》의 경우, 우발성을 어느 정도 감안하고 제작을 하고 있다면 《마녀체력 농구부》는 우발성마저 통제하다가 밋밋한 결과를 보여주고 끝난 것이라 하겠다. 승부의 우발성 때문에 각본이 있네 없네, 제작진이 어디까지 개입했네 하는 설왕설래가 있어온 것이다. (《골 때리는 그녀들》도 한때 경기 조작설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우발성도 껴안고, 각 출연진들이 생업에도 불구하고 훈련할 시간을 충분히 제공하고, 이들에게 최고의 기량을 가진 코치진을 선사하고, 서로 만나 조화롭고 아름다울 우정을 허락하는 것이 현재 《무쇠소녀단》의 성공 요인으로 꼽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역시 이러한 스포츠 예능에서 선보이는 여성의 신체가 특정 신장 이상과 특정 체중 이하의 역시나 매력자산이 넘치는 여성연예인의 것이라는 점은 우리가 계속 생각해야 할 지점 같다. 《무쇠소녀단》이 지금처럼 순항하고 나면, 다양한 모양과 나잇대의 여성 신체, 그리고 비백인 유색인종의 신체가 우리 앞에 등장할 수 있을까. 예능을 논의할 때 당위가 얼마나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까. 여성스포츠예능이라는 성장서사가 내 눈앞에 나타난지는 대략 7년 전이 된 것 같은데, 《무쇠소녀단》이나 여타 좋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장르의 완성도에 도달한다면, 그 다음은 우리가 어떤 몸을 규범화하고, 이상화해왔는지 반성할 수 있지 않을까. 여성 페미니트스에게 세상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달라고 할 수 없듯, 여러 제약과 한계를 넘어 지금에 이른 여성스포츠 예능에 모든 걸 다 주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2025년 이후 우리가 기대해야 할 예능은 (가시화된/비가시화된) 장애를 가진 몸, 인종과 계층이 다른 몸들이 티비에 들어오게 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예능은 상당히 친화적 장르라고. 스포츠 예능에 여성의 참여를 도모했다면, 우리는 스포츠 예능을 만들고 비판적으로 읽는 걸 통해 2025년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를 시도해볼 수 있게 해야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보통 이럴 때 결론을 대신하여, 란 말을 쓴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렇게 길게 쓸 생각은 아니었다. 이번 민우회 모니터링단에 참여하며,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던 스포츠예능을 많이 알게 되었다. 말 그대로 병맛이고, 참담한 것들, 눈과 마음을 동시에 찌르는 유해한 것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여성들이 근력을 키우고 강인함과 자긍심을 뽐내는 창구가 이 정도로 생겨났다는 것들을 재확인하며 기쁜 순간도 꽤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몸이 힘들더라도 이 모임이 오프라인이었으면 좋았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몸을 쓰는 일이 마음을 쓰는 일과 다르지 않으며, 몸을 강하게 만들어서 여러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들이 이렇게 다양하게 있다는 걸 새삼스레 되짚는 일은 귀했기 때문이다. 줌의 형식이 아닌, 직접 한 공간에 모여 그런 걸 공유하는 기쁨도 느끼고 싶었다. 어쨌든, 지난 6-8주 동안 집중적으로 여성스포츠예능을 관찰했을 뿐 아니라, 그걸 보는 것이 순차적으로 나를, 내 운동을, 내 몸을 어떻게 바꾸는지도 추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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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미디어에서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해야 할 것
하키선수 출신으로 운동하는 운동가이고 싶은 사람. 모든 운동(sport & movement)이 모든 사람의 일상이면 좋겠고 모두가 일상에서 운동하는 사회를 꿈꿉니다. 스포츠인권연구소 사무총장, 문화연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TV 시청, 영화 관람, 독서를 즐기던 전직 운동선수(=글쓴이 함박님 본인입니다)가 선택한 석사 학위 논문 테마는 “스포츠 중계방송” 이었다. 마침 시드니 올림픽이 열렸던 해였다. 당시 올림픽 최고 스타는 사격에서 은메달을 딴 강초현 선수였고 '국민 여동생'으로 불렸다. 영화 “어린신부(2004)”가 개봉하기 전이었다.
여성학적 관점의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불리는 스포츠 경기 중계방송에서 어떻게 스포츠 선수들에게 '국민 여동생', '국민 영웅' 프레임을 씌우게 되는 건지 궁금했다. 그렇게 스포츠 중계방송의 서사 구조를 분석하고 ‘국민 여동생’, ‘국민 영웅’과 같은 호명이 서사 구조의 어떤 단계에서 특정한 기능을 하는지 분석했다. 그때부터 어렴풋이 여성, 특히 '어린/여성/스포츠 선수'를 대상화하는 프레임을 스포츠 중계방송에서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는지 이해하게 되었고, 미디어에서 여성 스포츠를 재현하는 방식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가지고 살펴보게 된 것 같다.
대학원 진학 직전 1999년에 열린 미국 여자 월드컵 경기 결승전을 마치고 환호하던 브랜디 차스테인 선수의 사진은 아주 오랫동안 내 책상 앞에 붙어 있었는데, 웃통을 벗어던지고 환호하는 모습의 그 사진은 마냥 멋있기만 했고 보기만 해도 심장이 벌렁벌렁 할 정도였다. 골을 넣고, 그리고 이겼을 때 그 승리의 감각이 고스란히 사진에 담겨 있다고 생각해서 너무 좋았었다. 지금도 이 사진을 보면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 때의 신선한 충격이 떠 올라 기분이 좋아진다.
(당시 상대적으로 덜 보수적이었던 중앙일보는 정면 사진을, 조선일보는 측면 사진을 1면에 게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진출처: BBC, 연합뉴스)
돌이켜 보니, 이때부터 미디어에 의해 재구성된 여성과 여성 스포츠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특히, 결혼을 하고 나니 못 보던 것들이 보이기도 했다. 남편의 셔츠 색상(누렇거나, 하얀)을 가지고 여성(배우자)의 (살림)능력을 평가하는 ‘옥시크린’ 광고나, 스포츠 중계방송의 해설가나 캐스터가 모두 남성이라는 점, '태극낭자' 못지않게 듣기 싫은 ‘엄마 선수(드물기에 더 강조되었던...)’, ‘엄마 리더십’ 혹은 ‘언니 리더십’ 등이 불편했다. 그럼에도 TV시청을 좋아하기에 불편함을 견뎌 내느라 피곤했다.
당시(2000년대 초) 미디어 스포츠와 관련한 국내 연구들은 대부분 '여성 스포츠 보도량'에 대한 것이었다고 기억한다. TV방송은 말할 것도 없고 신문 보도나 포털 업로드량 자체가 터무니없이 적었다. 그 때보다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성 스포츠에 긍정적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이번 모니터링에 참여하면서 느낀 것도 여성 스포츠 프로그램의 양뿐 아니라 형식과 종목 다양성이 매우 부족하고 여전히 여성 스포츠를 신기한 구경거리로서 대상화하는 것이 느껴진다.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내가 가장 불편해 하는 지점이다. 아직도 일상에서 미디어에서 스포츠 하는 여성이나 여성의 스포츠 활동을 보기 드문 구경거리 정도로 취급하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미국의 여성스포츠재단(Women’s Sports Foundation)이 2020년에 발표한 보고서 “Chasing Equity: The Triumphs,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in Sports for Girls and Women”에서 촉구하는 '행동 지침(Call for Action)'에서는 스포츠 관객과 팬층을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미디어가 일상적으로 여성 스포츠를 취재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를 통해 관객과 팬들이 여성 스포츠에 대해 기대치를 쌓고 경기에 대해 이해하며 선수와 팀의 정보를 통해 친밀감을 쌓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여성 스포츠 방송의 질을 향상시켜야 하며, 여성 스포츠 선수들의 관습적인 서사를 넘어 성별 고정관념, 성역할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성별 보다 스포츠 선수 중심의 아이디어와 질문을 담아 재현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에 더하여 미디어 스포츠 업계에서 더 많은 여성을 고용하고 양성,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성별에 맞는 방송의 질과 양을 보장하고 여성 스포츠를 더 쉽고 효과적으로 재현, 전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영화배우 우피 골드버그가 설립한 여성스포츠전문채널 AWSN(All Women’s Sports Network)를 눈여겨보고 있다. 홈페이지(https://www.awsn.tv/about)에 따르면 AWSN의 궁극적인 목표는 ‘스포츠 대표성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여성 선수들의 권익을 한 걸음씩 옹호하는 것’이라고 한다.
국내 여성스포츠 중계방송이나 예능도 이와 유사한 목표와 취지를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 여성의 스포츠 활동이나 스포츠 하는 여성을 대상화하지 말고 스포츠 본연의 즐거움과 스포츠 하는 여성들의 증진하는 탁월성과 진정성에, 그들의 비하인드 서사에 관심을 주는 프로그램 아울러 방송이 있으면 좋겠다.
모니터링 활동을 하면서 하고 싶어지는 활동 아이디어나 많이 떠올랐고 목표 같이 것이 조금 생기기도 했다. 스스로 앞장서고 길을 트는 개척자는 못 되고... 등 떠밀거나 멱살 잡고 끌고 가면 열심히 하는 스타일로 살아온 사람이라 먼저 뭘 시작하긴 쉽지 않겠지만, 시민 모니터링활동을 함께한 동지들과 무언가를 하게 된다면 열심히 해볼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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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거 보이면 같이 분노할 동료들을 만날 수 있겠다
🌿글쓴이: 이현
문화연대 대안체육회 소속 스포츠인권활동가. 30대 중반이 넘어서야 스포츠의 매력에 빠져 탁구와 사이클, 클라이밍을 즐기는 생활체육인이자 체육학을 전공하는 만학도.
안녕하세요, 문화연대 대안체육회에서 스포츠권 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박이현입니다. 제가 활동하는 문화연대는 문화사회 실현을 위해 활동하는 문화운동단체인데요. 대안체육회는 그중 스포츠 분야를 담당하는 위원회입니다. 대'안'체육회는 공공기관인 대'한'체육회를 비틀어지은 이름으로, 우리는 스포츠 미투 등 스포츠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활동을 비롯해 대안적인 스포츠 정책을 만들거나, 대학청소노동자 등 소외된 사람들의 스포츠권을 위한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어요.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쇼츠를 보다보면 여성의 스포츠 활동을 다룬 예능프로그램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여성 선수의 헛발질을 희화화하는 장면이나 이상하게 성 대결 구도로 몰아가는 장면 등을 보면서 불편함을 감추기 힘들었어요. 그러던 중 민우회의 <여성x스포츠 시민모니터링단>(이하 시민모니터링단) 활동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요. 같이 분노할 동료들을 만날 수 있겠다는 기대로 시민모니터링단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헌장에서 “스포츠 활동은 인간의 권리이다. 모든 인간은 차별 없이 올림픽 정신 안에서 스포츠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하지만 여성은 청소년기부터 신체활동에 있어 문화적이고 제도적인 차별을 겪고 있습니다.
요즘 여성들의 스포츠 참여를 다룬 프로그램들이 많이 제작되고 있고, 여성 프로 스포츠 시장도 그만큼 성장하고 있다고 해요. 여기에 영향을 받아서 생활체육에 있어서도 여성의 참여가 더 많아지고 있는 추세인 것 같습니다. 이제 풋살장에서 여성 선수를 만나는 건 그리 낯선 일은 아니게 되었지요.
미디어에서 긍정적으로 재현되는 여성의 스포츠 활동은 스포츠에 대한 심리적 허들을 낮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포츠를 통해 우리가 건강과 행복을 얻고 또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부장적인 시선에서 여성을 다루는 매체가 많은 것도 뼈아픈 사실이죠. 그래서 잘못된 점은 지적하고 잘한 점은 칭찬하는 모니터링단 활동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시민모니터링단 활동을 통해 <여왕벌게임>, <무쇠소녀단>, <강철부대W> 등의 여성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했습니다.
여성의 외모가 남성의 시선으로 평가되지는 않는지, 여성 출연자의 승부욕이 진지하게 묘사되고 있는지, 여성들의 연대와 팀워크가 잘 묘사되고 있는지, 남성 출연자가 과도한 역할을 부여받지 않는지 등의 질문을 갖고 프로그램들을 살펴보았어요.
<무쇠소녀단>은 여성 연예인 4명이 철인3종에 도전하는 예능프로그램인데요. 첫화부터 성차별적인 장면이 나오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며 보게 되었습니다. 프로그램이 시작하자마자 지도자로 종합격투기 선수이자 해병대 출신의 방송인 김동현 선수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참여자는 모두 여성인데 지도자만 남성인데다가, 엘리트 선수 출신이라 어떤 전형적인 남성 지도자상을 보이지 않을까 우려가 되었는데요. 다행히 김동현 선수는 철인 3종 경기를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철인3종경기에 있어서는 비엘리트 출신의 생활체육인으로서 프로그램에서 소개되고 또 그런 역할을 수행합니다. 김동현 선수는 프로그램 내내 성차별적인 발언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아마 작가들의 역할도 크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스페셜코치로서 다른 여성 선수들이 추후 등장하기도 했고요.
<무쇠소녀단>은 전반적으로 여성들의 우정과 연대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한편, 참여 동기 역시 건강과 같은 일상적인 것으로 기존 성장 서사와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어요.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무쇠소녀단 3화에서 중간 미션에 ‘할머니팀’이 등장해 함께 경쟁하는 모습이었는데요. 운동선수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여성이 등장했다는 점과 단순히 이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여성들 간의 우정과 연대를 긍정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여왕벌게임>은 여러모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6인의 여성 리더와 18인의 남성 참가자가 참여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인데, 제목인 ‘여왕벌’에서부터 다분히 여성혐오적인 메타포가 사용되었지요. 남성 참가자들은 겉으로는 복종하고 있지만 실은 여성 리더들(과 그들의 여성성)을 비웃는 듯한 장면이 많았어요. 한편 미션들에는 참가자의 안전과 평등을 위한 규칙들이 누락되어있어 일부러 혼란과 갈등을 조장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이 프로그램은 ‘특권을 받고 있는 건 여성들이고, 남성들은 오히려 고생을 하고 있다’는 이준석적(!) 세계관 아래 설계된 프로그램으로, “수컷의 반란”이라거나 “여왕벌의 몰락” 등 사이다 서사(혹은 처벌 서사)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연구와 비판이 필요한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민모니터링단 활동을 하며 다른 모니터링원들이 소개하는 성차별적인 장면을 보며 함께 분노하기도 했고요. 한편 이렇게 묘사되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각자 매주 과제를 공유하며 더 많은 사례를 알게 되었고, 서로 생각을 나누고 또 함께 읽을 거리도 주고받으며 고민에 깊이감이 더 생기기도 했습니다.
시민모니터링단의 의견이 미디어 제작자들에게 잘 전달이 되어, 여성의 스포츠 활동이 가부장적 시선에서 재현되지 않길, 그리고 스포츠를 통해 연대와 우정을 나누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이 더 많이 묘사되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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