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회원확대캠페인 ②] 신입활동가 헤다 인터뷰: 인생이 고달프지만 페미니스트로 살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202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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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확대캠페인: 신입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며]

회원 팀의 신입활동가 구구는 오늘도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회원가입을 할까' 고민 중입니다. 

그러다 문득! 입사 동기(?)인 네 명의 활동가의 도움을 받아 회원 확대 캠페인을 진행해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


올해 2월부터 민우회에서 활동을 시작한 조마린, 헤다, 다혜, 조연, 그리고 구구는

페미니스트로서, 또 활동가로서 무엇을 경험하고 느끼며 페미니즘 운동을 이어가고 있을까요? 

그리고 신입활동가 분들이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은 말도 있다고 하는데요... 📝


2025년 한 해,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치열한 고민과 활동을 이어온 신입활동가들의 좌충우돌 스토리!

지금 바로 만나보시고, 후원으로 신입 활동가들과 민우회의 여정을 응원해주세요!


다른 신입활동가의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1편: 성평등미디어팀 조마린 활동가 편 바로 읽기





신입활동가 인터뷰 ② 성평등복지팀 헤다 활동가 편

"인생이 고달프지만 페미니스트로 살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Q. 페미니스트가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2015년~2016년 동안 '#나는_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 강남역 살인사건, 넥슨 성우 해고 사건, '#OO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등 일련의 온라인 상의 해일과도 같았던 흐름 안에서 페미니스트가 되었습니다.















(2017년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 추모집회에서의 헤다(좌), 2025년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에서의 헤다(우)) 



Q. 민우회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또, 민우회에서 일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처음에 페미니스트가 되고 굿즈를 많이 모았는데, 그 중에 ‘해보면 캠페인’ 뱃지가 있었습니다. 일상에서의 페미니즘 실천을 통해 성차별적, 가부장제적 문화를 깨부수는 시도가 멋지다고 느꼈습니다. 그 뒤로 한동안 제 노트북에는 ‘너무 빠른 세상, 멈추지 않는 노동에 쉼표를’ 스티커가, 가방에는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 뱃지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스티커들 그림과 메시지가 정말 좋았어요!


(해보면 캠페인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 뱃지) 


여기서 잠깐! ✋

헤다가 멋지다고 느꼈던 바로 그 캠페인!

〈해보면 캠페인〉이 궁금하시다면?

👇 아래 링크를 클릭해 그 내용을 확인해보세요! 👇 

해보면 캠페인!



그 뒤로 시간이 많이 흘러 2024년 연말이 되었고, 저는 전북의 한 지역에서 임신과 출산으로 운영하던 매장을 닫고 백일 아기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인스타 피드를 내리다가 운명처럼 민우회 채용 공고를 발견했고, 두근거리기 시작했어요. 괜히 ‘어떤 팀에 지원하면 좋을까?’ 고민하기도, 친밀한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하면서요. 그렇게 마음을 접었다 폈다 하다가 친한 친구의 적극적 독려와 서울로 이주하게 된 개인적 상황에 힘입어 성평등복지팀에 지원을 하게 되었고, 활동가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Q. 민우회와 함께 하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무엇인가요?

 

('돌봄은 둠칫둠칫' 파티 백월)


돌봄 전시 오프닝에 맞추어 네트워킹 파티 ‘돌봄은 둠칫둠칫’이 기억에 남습니다. 준비과정에서 전시장에 가로 6m 백월을 설치하는데, 조립이 쉽지 않았고, 민우회 활동가와 전시 기획단 활동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손을 모아 완성해가는 과정이 땀을 쭉 빼긴 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과정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방법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 다 조립한 걸 다시 빼기도 하고 여러 어려움 속에 짜증이 날 법도 했을텐데, 파티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하나의 문제해결을 위해 모두가 마음을 모았다는 든든함이 느껴졌어요. 덕분에 제시간 안에 백월이 완성되었고, 그 날의 네트워킹 파티는 제목답게 둠칫둠칫 신나는 에너지와 평화가 넘실거리는, 서로를 돌보고자 하는 의지가 가득한 시간이었습니다.



(7월 생일에 받은 동료들의 편지)


활동가들끼리의 서로돌봄도 기억에 남아요. 처음에는 유난히 구성원들이 서로의 생일을 잘 기억한다고 느꼈는데, 알고 보니 매년 활동가 생일이 돌아오면 팀원들이 생일자가 먹고 싶은 간식을 준비하고, 받고 싶은 편지 형식에 맞추어(롤링페이퍼, 생일쪽지 등이 있음) 전체 활동가의 축하 메시지를 모으고, 생일날 오후에 사무실 한켠에 모두 모여 축하노래를 불러 주며 (일반 생축 노래, 활동가 ver. 두 가지가 있음. 물론 노래 없는 축하도 가능) 간식을 나누어 먹는 문화가 있어서 생일을 기억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어요.

저는 올해 7월에 민우회 방식의 생일축하를 받으면서 너무 많은 정서적 돌봄을 받았는데요.

이 힘으로 동료를 더 사랑하고, 살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조직은 서로를 돌볼 수 밖에 없게 만들어요.



Q. '페미니스트 헤다'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고 있나요?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하게’ 라는 민중가요의 가사를 정말 좋아하는데요, 민우회 활동가로 살면서 ‘강하다’는 것의 정의를 더 늘려 가고 있는 것 같아요.

단순히 힘이 세거나 권력이 있는 것이 강한 것이 아니라,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것도 강함이고, 동료의 의견을 듣고 내 결정을 바꿀 수 있는 것도 강함인 것 같아요. 이렇게 어떤 단어의 의미 목록을 늘려 가는 것이 더 성장한 페미니스트가 되어 가는 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민우회의 '극피로' 티셔츠를 입고 함께 사진 찍은 동료들)


Q. 민우회 활동을 이어오면서 경험한 변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회의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활동가는 ‘회의주의자’라는 말이 있는데, 워낙 회의가 잦고 회의를 통해 모든 의사결정을 하기 때문이겠죠? 저는 민우회에서 회의를 통해 배우는 게 많아서 좋은 것 같아요. 나 혼자라면 알거나 겪을 수 없는 방대한 사안들에 대해 팀원들이 자료를 정리해서 공유하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회의 중에 나오는 팀원들의 다양한 의견과 다각적인 질문들에 머리가 말랑말랑해지는 것 같고, 그것에 대해 평등하게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소통구조 속에서 민우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담당 활동가의 욕구와 고민을 충분히 담아, 현실적인 조건들과 사업 개별적으로 목표하는 것들에 부합하는 ‘최선의’ 지점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복지팀 회의 사진)


또, 그 전에는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문제를 잘 알지 못했었는데, 이 연대 활동을 맡아서 하면서 팔레스타인에 대해 정말 많은 것들을 알게 되고, 책도 읽고, 단순히 맡은 업무를 넘어 마음이 많이 쓰이는 활동이 되었어요. 그동안 무심코 이스라엘이나 미국이 만든 프레임대로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많이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인의 고통에 깊게 공감하면서, 한국인 페미니스트로서 연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친구와 가족들과도 많이 대화하고요. 48차 집회에서 제가 발언했던 내용 중 몇 문장만 인용해 두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부정의를 직시하고, 함께 외치기로 한 페미니스트들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시공간만 도려내서 평안하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닙니다. 현재 내가 사는 삶의 황폐함이 있다면 그것이 결국 전지구적인 불평등과 부정의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가 팔레스타인과 더 적극적으로 연대해야만 한다고, 우리는 상호의존하는 존재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팔레스타인 연대 굿즈가 붙은 헤다 집 현관(좌) / 이스라엘 대사관 앞 1인 시위 중인 헤다(우))


Q. 앞으로 민우회에서 어떤 활동을 해 나가고 싶나요?

저는 돌봄 이야기를 계속 하고 싶어요. 인간의 본질은 결국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 모두 다른 취약함을 안고 산다는 것, 의존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돌보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모두가 돌봐야만 하고, 돌볼 수 있는 삶의 여건을 평등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한데요, 저는 이 고민을 민우회 성평등복지팀이 하고 있어서 삶이 조금 더 좋아졌어요.

민우회가 물음표를 던지는 돌봄의 담론을 함께 고민하다 보면 저 개인적으로도 고립되지 않고 느슨하고 두터운 돌봄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에요. 정책의 언어에서 시민으로 호명되지 못했던 소수자들의 연대를 통해 돌봄중심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간도 자원도,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방식으로 돌봄을 통해서 분배되는 세상을 만들어 가자고, 더 많이 연결되며 운동의 언어를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돌봄 전시 〈우리의 취약함이 기어코〉관람객 참여 작품 중 하나. 다양한 모양을 가진 존재들이 서로 돌보는 그림이 너무 좋았다 (좌) / 같은 전시 관람객 참여 작품 중 하나. 신공항 말고 수라갯벌을 돌보자!)



헤다가 '인생이 고달프지만 페미니스트로 살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전하는 말  


(고달프지만 잘 살아 보기로 해)


요즘 제 말버릇이 ‘인생이 진짜 왜이래?’예요. 하루하루가 붕괴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인데요. 아기가 5개월 때 첫 출근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제 만 1살이 넘은 아기가 이른 아침 잠에서 깨면 그 때부터 아기 먹이기, 씻기기, 약 타서 주기, 양치시키기, 옷 갈아입히기, 어린이집 가방 싸기, 투약의뢰서 쓰기 등등 아기 돌봄 업무를 하며 제 빵도 굽고 커피도 내리고 출근 준비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저의 여동생이 옆에서 도와요. 이유는 육아휴직이 끝난 배우자가 지방으로 복직을 했기 때문이에요. 양육 주담당을 맡은 사람이 배우자였는데, 그게 제 몫이 되니까 1분 1초가 긴장의 연속이더라구요. 등원과 동시에 저도 출근길에 오르는데요, 쌀쌀한 11월 아침인데도 저는 등에 땀이 흥건합니다. 하원 후 이모와 시간을 보내던 아기를 퇴근 후 토스(?)받아 또 저녁 돌봄을 합니다. 그 와중에 아기를 재우고 운동도 가요. 쌓여 있는 하루종일 발생한 설거지와 청소거리를 ‘자정 전엔 치우고 자야지’ 라고 다짐하면서요. 임신성 당뇨가 있었어서 매 끼 너무 많은 당섭취를 안하게, 단백질이 충분하도록 머리를 써서 먹는 것도 정말 고달파요. 아이돌 덕질도 해야 하는데 위버스 알림 뜨는 것 훑는 것 만으로도 벅찹니다. 정말 ‘인생이 왜이러는지’ 모르겠어요.


('페미코어' 잃지 말기로 해)


하지만 제가 본진은 또 페미니스트잖아요. 이 난잡한 일상을 살면서 머릿속에서는 은은하게 이 성차별적이고 가부장제적 문화가 가득한 세상에 대한 분노도 품고 있거든요. 직업이 활동가여서도 그렇지만, 이 난잡함은 ‘페미니즘 렌즈’로 볼 때 교통정리가 잘 돼요. 페미니스트라서 견디고 있는지도 몰라요. 소화하기 곤란할 정도로 ‘빻은’ 세상을 겨우 읽어낼 수 있게 하는 게 페미니즘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저는 ‘페미니스트로 살기’는 어떤 상황에서도 멈추지 않을 것 같아요.


여러분은 어떤 고달픔을 안고 살아가나요?

인생이 진짜 왜이러는지, 민우회에서 함께 만나서 이야기 나누어 보아요. 페미니스트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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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고달파도 헤다, 그리고 민우회와 함께라면 페미니스트로 살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