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연말, 팬데믹으로 여전히 전 세계적 뒤숭숭함이 지속되는 가운데,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는 기쁘기 그지없는 중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바로 낙태죄 폐지!2020년 12월 31일 24시를 기점으로 임신중지 형사처벌법이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
그 열흘 전부터 낙태죄 없는 세상에서 이뤄가야 할 과제를 하루에 하나씩 공개하면서 들썩들썩 날짜를 꼽아보고 있었고요-
[사진] 총 열 장의 카드뉴스가 모아져 있다. 각각의 카드뉴스에는 왼쪽 상단 말풍선에 '낙태죄 폐지까지 D-10'부터 '낙태죄 폐지까지 D-1'까지 숫자가 하나씩 작아지며 적혀 있고, 가운데에는 공통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음에 각각 다른 과제가 하나씩 적혀 있다. 열 가지 과제는 각각 '유산유도제의 공적도입과 국가 필수의약품 지정', '임신중지 건강보험 적용', '의료현장 실태조사와 의료인 교육훈련', '보건의료체계 및 인프라 재정비', '낳을 권리, 낳지 않을 권리가 보장되는 노동조건',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성교육', '피임접근권 강화', '출생, 양육, 입양 등 관련 법제도 개선', '임신중지에 대한 차별, 사회적 낙인 해소', '처벌이 아닌 권리보장으로!'이다. 모든 카드뉴스에는 알록달록한 색으로 축하의 의미를 담은 리본이 그려져 있고, 하단에는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이라고 표기돼 있다.
그리고 D-day인 12월 31일,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과 함께 국회 앞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처벌의 시대는 끝났다!”
[‘낙태죄’ 없는 2021년 맞이 기자회견]
• 일시: 2020년 12월 31일 (목) 오전 11시
• 장소: 국회의사당 정문 앞
• 사회: 문설희(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 사회진보연대)
• 순서
1)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경과보고 및 운동 방향 : 나영(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 성적권리와재생산정의를위한센터 셰어SHARE)
2) 낙태죄 폐지, 임신중지 비범죄화 운동 의의 : 제이(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집행위원, 한국여성민우회)
3) 처벌대신 권리를! ‘낙태죄’ 없는 새로운 세계를 위한 법·정책 과제 : 이유림(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성적권리와재생산정의를위한센터 셰어SHARE)
4) 의료계 발언 : 민정(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행동하는간호사회)
5) 종교계 발언 : 자캐오(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성과재생산크리스천포럼)
6) 청년 학생 발언 : 홍수영(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전국학생행진)
7) 기자회견문 낭독 : 앎(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 한국성폭력상담소), 박은주(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집행위원, 한국여성단체연합)
8) 퍼포먼스
[사진] 국회 앞, 8명의 활동가들이 함께 들고 있는 현수막에는 "처벌의 시대는 끝났다! 낙태죄 없는 2021년 맞이 국회 앞 기자회견"이 쓰여 있다. 운동의 현장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분홍색 배경에 꽃과 풀잎이 그려진 희망찬 느낌의 현수막이다.
아쉽게도 코로나 바이러스 방역지침상 9명 이하의 현장 인원을 유지해야 하여 더 많은 시민들과 한자리 모일 순 없었지만
모낙폐 유튜브 계정으로 생중계를 하며, 낙태죄가 진짜진짜로 영원히 끝장나는 날을 벅찬 마음으로 맞이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습니다.
아래 발언문 전문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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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 성적권리와재생산정의를위한센터 셰어SHARE 대표)
이제 오늘로써, 낙태죄는 실효를 다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오늘을 만들어낸 전국의 여성, 시민분들과 함께 모여 오늘을 축하하고 싶은데 코로나로 그렇게 하지 못해 너무 아쉽습니다.
낙태죄는 지금까지 임신과 출산을 경제성장의 도구로, 여성의 몸을 이를 위한 인구관리의 도구로 삼아 왔던 역사의 산물입니다.
여성들은 80년대까지 가족계획 요원에게 영문도 모르고 붙들려 가 배꼽수술이라 부르던 복강경 난관시술을 받았고, 장애나 질병이 있는 여성들은 강제로 불임시술이나 낙태 시술을 받아야 했으며, 저출산시대가 되자 임신중지를 한 여성들은 이기적인 여자들로 내몰리고 파트너와 남편에 의해 고소고발을 당했습니다.
생명 경시를 운운해 온 국가와 사회는 사실상 이 모든 일들의 적극적인 행위자이고 방관자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폭력적인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2009년 말, 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의사들 모임, 진오비가 ‘낙태 근절 운동본부’를 만들어 낙태 시술 병원을 고발하고 제보 게시판을 만들면서 병원들은 시술을 거부하고, 시술비가 수백만원 대로 폭등하고, 해외로 가는 여성들이 증가했습니다. 가짜 낙태약이 밀수입되기 시작했고, 임신중지 병원 알아봐 주겠다면서 불러내 성폭력을 행하는 사례까지 발생했습니다. 자기 허락을 안 받고 여자친구, 아내가 낙태를 했다는 제보가 이어졌고 법정에서는 매일 술에 취해 임신한 아내에게 칼까지 휘두르던 남편, 위자료 안 주려고 아내를 고소한 남편들은 무죄를 받고 여성들만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결국 2012년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에는 19세 여성이 사망하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사문화되었다고 생각했던 법이 언제든지 악용될 수 있고, 여성들의 삶과 건강, 생명을 위협하게 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게 해 준 계기였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경험들이 쌓여 2016년 검은시위로 터져나왔고, 용기있는 여성들이 거리에서, 온라인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낙태죄 폐지를 요구했습니다.
장애여성들은 국가의 인구정책 속에서 어떠한 권리도 보장받을 수 없었던 장애여성의 경험을 통해 낙태죄의 문제가 사실상 국가의 우생학적 목적에 따라 생명을 선별하고 차별을 지속시켜온 폭력의 문제임을 구체적으로 짚어냈습니다.
우리는 세대, 연령, 질병, 장애, 노동,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에 따른 다양한 경험들을 이야기하고 연결해 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진짜 문제는 ‘낙태죄’다”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
이제 우리는 낙태죄가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결정권이 대립하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통제와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라는 관점의 변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제 정부, 지자체는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해 나가고 실질적인 권리를 보장할 책임과 역할을 다해야 하고,
교육, 노동, 사회복지 기관, 의료, 상담 기관 전반에서 실질적인 접근성을 마련해야 합니다.
의료인 분들도 지금까지는 불법인 여건에 있었지만 의료적 안전성 뿐만 아니라 건강과 삶의 여건까지 살피는 의료인들이 곳곳에 많이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런 의료인 분들이 마음놓고 더 좋은 진료를 제공하실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건강보험과 유산유도제를 시급히 도입하고,
다른 의료행위와 마찬가지로 임신중지도 제대로 된 보건의료 전달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약만 처방할 수 있는 병원에서부터 시술을 할 수 있는 병원까지, 협진이 필요한 3차 의료기관까지 연계 체계가 제대로 구축되게 하고 국공립병원과 대학병원에서는 보다 체계적으로 임신중지 여건이 마련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일부 언론에서는 혼란이나 입법공백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처벌법이 사라지는 것은 그 자체로 혼란도 공백도 아닙니다.
작년에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이 되었다면 이 법은 이미 그 때 사라졌어야 할 법입니다.
우리의 용기있는 요구와 행동이 헌법재판소를 통해 낙태죄의 위헌성을 확인하게 만들었고, 한참 후퇴한 정부의 개정안을 막아냈으며, 국회에서 졸속적으로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대신 임신중지를 처벌하던 시대를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실질적인 권리를 보장하고 처벌을 통해 오직 여성들에게만 전가되고 가려져 온 사회적 불평등을 함께 드러내고 바꾸어 나가면 됩니다.
여전히 제한적 허용과 처벌 방식에 저항해 싸우고 있는 각국의 전례를 보았을 때도 우리는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결과를 이끌어 낸 것입니다.
앞으로 비범죄화 상태에서 우리가 만들어갈 또 다른 진전들은 이제 중요한 선례가 될 것입니다.
한국의 소식을 전하자, 독일 베를린에서도 한국의 선례가 여전히 임신중지가 형법에 범죄로 남아있는 독일 같은 나라에게 선도적인 선례를 보여주는 것이며, 독일에서도 더 이상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 법 개정이 이루어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고 축하와 연대의 인사를 전해왔습니다.
전 세계 129개국이 참여하는 여성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를 위한 국제 캠페인 조직과 각국 여성들에게 안전한 유산유도제를 보급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우먼 헬프 우먼에서도 축하와 연대의 인사와 함께 안전한 유산유도제 도입을 촉구하는 메세지를 보내주었습니다.
더불어, 정말 길고 힘들었던, 그러나 너무 멋진 투쟁 끝에 어제 상원의회에서 임신중지 합법화를 이뤄낸 아르헨티나의 소식과 함께 2020년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오늘, 우리가 만들어낸 역사를 충분히 축하하고, 이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집시다.
낙태죄 폐지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이 중요한 사회적 노동으로 존중되고, 임신과 임신중지 모두가 책임있는 결정으로 존중될 수 있는 사회,
장애인과 질병이 있는 이들의 건강권과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보장되고 자립과 지원의 여건이 함께 보장되는 사회,
우리의 삶과 성과 재생산 권리를 위협하는 위험한 노동환경을 없애고,
혼자 혹은 원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자녀의 양육 여부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비닐하우스에서 죽어가지 않고, 이주민과 난민의 삶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
지금과 같은 팬데믹의 시대에 더 취약한 삶의 여건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영향이 전가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은
임신중지를 포함한 성적권리와 재생산권리가 모두에게 보장되는 여건을 만드는 일이고, 재생산정의를 실현해 나가는 일입니다.
이런 역사를 만들어낸, 그리고 앞으로도 만들어갈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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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집행위원, 한국여성민우회)
저는 이 역사적인 날, 무엇이 낙태죄를 가능하게 했고, 무엇이 그것을 끝장냈는가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형법이 제정될 때부터 임신중지는 범죄로 규정됐습니다. 1953년, 피임도구도 구하기 힘들던 때부터였습니다. 여자는 시민이 아니라 어머니였습니다. 가정과 국가를 위해 아이 낳는 게 당연했고, 어떻게 임신을 피할 수 있는지, 낳은 다음 어떻게 키워낼지는 그저 여자들이 알아서 할 일일뿐 공공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계속 임신하고 어떻게든 아이를 키우고 또 어떻게든 임신을 중지했습니다. 중절수술을 여러 번 받은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국가가 인구를 줄이겠다고 팔 걷어붙이고 나섰던 긴 세월 동안은 더했습니다. 동시에 ‘낙태’는 죄악이고 수치였습니다. 낙태죄가 있는 줄도 몰랐던 사람이 태반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법 조항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는 아니었습니다. 한 여성이 중절수술을 일곱 번씩 받아도 인구 문제가 없는 한 그것을 문제시하지 않던 사회, 그럼에도 개개인의 임신중지 경험은 의료기록에도 남길 수 없고 가까운 사이에도 말 못하고 숨겨야 했던 사회, 여성의 건강과 존엄한 삶에는 무관심하고 여성 통제를 통한 출산율 조절에만 관심을 쏟는 사회, 즉 여성을 2등 시민으로 내리누르던 사회가 낙태죄의 존재기반이었습니다. 낙태죄가 만들어진 50년대나, 적극적으로 무시된 1970년대나, ‘낙태 고발 정국’으로 가시화된 2010년대나, 우리는 연속된 ‘낙태죄의 시대, 처벌의 시대’를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벌의 시대 속에서도 그 시대의 끝을 당겨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들을 기억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했을 떨리는 목소리, 이건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닌 거 같다고 말하던 목소리, 어떻게 법이 이럴 수가 있냐며 분통을 터뜨리던 목소리, 혹은 이게 분노할 일이 맞는 건지 조심스럽게 질문해오던 목소리들이 있었습니다. 삼삼오오 모여, 수술대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의사에게 어떤 말을 들었는지,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질문할 수 없었는지, 왜 우리의 경험이 개인의 책임으로만 밀쳐져 있었는지를 처음으로 정치화하며 엮어나가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병원에, 경찰서에, 법원에 동행했던 순간들. 상대 남성의 고발로 기소되어 2심까지 함께 분투했지만 결국 낙태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사건. 이 불합리한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널리 알려도 좋다고 말해준 여자들. 여성의 관점에서 낙태 이슈를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기사들, 책들, 영화들. 2012년 낙태죄가 합헌이라는 선고를 받아들고도 멈추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의 억압을 뚫고,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자기 경험을 공개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낙태했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는 애 낳는 기계가 아니다.” “내 몸은, 내 삶은 범죄가 아니다.” 2016년 한국사회 최초로 광장에서 대놓고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던 '검은 시위'. 전국에서 지역별로 수차례 반복된 캠페인과 선전전. 주말마다 보신각에서 열린 임신중지 합법화 시위의 검은 물결. 넓은 광화문광장을 가득 채웠던 집회. 300명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 낸 <형법 제269조 삭제 퍼포먼스>. 햇살과 우박이 한꺼번에 내리치는 기묘한 날씨에 ‘낙태죄 폐지, 새로운 세계’를 외쳤던 그 날. 몸과 얼굴에 강렬한 메시지를 쓰고 담대하게 카메라를 응시했던 여자들. 수백명의 자발적 참여로 이어진 1인시위. 아르헨티나, 폴란드, 아일랜드- 각국의 활동가들과 연대의 깃발을 서로 흔들어 보였던 순간. 23만 명의 낙태죄 폐지 청원. 분노의 필리버스터, 이어말하기.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낙태죄의 전면 폐지를 촉구한 1015명의 천주교 신자들. 의료전문가로서 소신을 지키며 안전한 임신중지 보장을 요구한 의료인들. 여성의 경험을 누락한 채 구멍 나 있던 낡은 법을 인권과 정의의 언어로 새롭게 기워낸 법률가들. 낙태죄 전면 폐지 입법청원에 참여한 10만명이 넘는 시민들. 수십번의 기자회견. 수많은 의견서, 성명서, 영화제, 포럼, 토론회…. 그 모든 현장에서 강력한 증언과 선언을 겹겹이 쌓아올려 온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결코 한 줄기로 환원될 수 없는, 하지만 기저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향한 열망으로 연결된 각각의 귀중한 운동들이었습니다.
국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여성이 2등 시민이라는 게 노골적으로 당연시되던 시절을 지나, 성평등의 실현을 목표로 한 정부부처가 설립되고, 임신중절에 대한 실태조사가 제한적이나마 시행되고, 여성이 낙태죄로 처벌받고 폭력에 노출되고 심지어 수술 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알려지기도 했으며, 국제사회로부터 임신중지를 비범죄화하라는 똑같은 권고를 몇 년째 받고,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수도 없이 이뤄지는 동안, 낙태죄로 처벌받은 시민들이 두 차례의 위헌소송을 제기하여 결국엔 낙태죄의 소멸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까지- 국정 운영을 위임받은 자들은 '현행법상 어쩔 수 없고' '사회적 인식이 아직이고',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게 없다' 운운하며 손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여성들이 한국 사회를 끌어올리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이미 진작부터 변했고, 더 이상 어제와 같은 세상에 살 수 없다고 느끼는 우리가 바로 그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이 명명백백한 증거를, 헌법불합치 선고 이후에도 국가는 적극적으로 외면하고 차단하려 했습니다. 종말의 위기에 처한 처벌의 시대를 어떻게든 되살려보려고 새로운 처벌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여성들, 그것도 젊은 여성들의 말을 들으면 나라가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우리가 이미 내파시킨 낡은 세계의 마지막 잔해를 툭 털어내듯이 낙태죄의 소멸을 함께 지켜볼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기억하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지금 호주제를 떠올리듯이, 옛날엔 임신중지를 형사처벌하는 말도 안되는 법이 있었다고, 그땐 그런 법이 없어지면 나라가 뒤집어질 것처럼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다행히 악법을 없애기 위해 나섰던 용기있는 여자들이 기세 좋게 살아나갔던 시대이기도 했다고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확인하고 제도의 공백으로 빚어진 사회적 고통을 그저 감당해야 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국가는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시스템을 마련해야 합니다. 우리도 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임신중지를 범죄의 영역에 밀어 넣었던 처벌의 시대로 절대 되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안전한 의료서비스로서의 임신중지를 보장할 적극적인 조치를 요구하여 시민으로서의 기본권을 끝까지 쟁취할 것입니다.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부당함에 대한 스스로의 감각을 믿고, 함께 변화를 만들어 온 서로를 믿고, 낡은 법과 낡은 윤리에 속지도 구속되지도 않고, 여성들 그리고 주변화되었던 이들의 관점이 온전히 반영된 새로운 정의와 새로운 윤리를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싸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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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림(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성적권리와재생산정의를위한센터 셰어SHARE)
2020년 12월 31일 오늘, 오늘 이후의 한국 사회는 67년만에 드디어, 여성이 자신의 판단으로 자신의 몸에서 진행되는 임신을 중지하는 행위가 범죄가 아니게 되는 역사적인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낙태죄라는 형법을 통해 개인의 몸과 성을 규율하고, 침해해온 역사를 비로서 내일 투쟁으로 끝내게 됩니다. 따라서 내일은 권리의 보장으로, 정의의 실현으로 향해가는 새로운 법과 정책들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임신중지의 전면 비범죄화’는 가장 기본적인 요구입니다. 낙태죄 폐지는 결론이 아닌 시작입니다. 개인의 성∙재생산 권리는 의료, 교육, 노동, 사회복지 등 모든 생활 영역에서 보장받아야 할 권리이고, 이를 보장할 의무는 국가에게 있습니다. 바로 새로운 법과 정책은 이를 실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2017년 UN은 2030 지속가능발전의제에 기반하여 전 세계의 국가에서 재생산 건강을 측정하는 새로운 지표를 내놓았습니다. 여기서 드러난 가장 큰 변화는 바로 국가라는 주체입니다. 국가가 피임을 보장하기 위해 무엇을 노력하고 있는가? 국가는 개인이 재생산 건강을 위한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것에 어떤 장애물이 있는지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지, 이러한 장애물을 없애려고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지, 안전하지 못한 임신중지에 대해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고려하고 개입하고 있는지가 바로 한 국가의 수준을 측정하는 지표입니다. 성평등 없이는 지속가능한 발전은 없다는 인식, 성과 재생산의 권리에 대한 통합적인 보장만이 차별을 낮추고,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는 인식이 UN의 지속가능발전의제, 미래의 방향성에 담겨있습니다.
이러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에 성과 재생산의 영역이 권리라는 인식이, 선언이, 법적인 기반이, 구체적인 정책들이 시급하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육신을 가진 인간입니다. 누군가와 성적인 관계를 맺고, 또 그러한 몸으로 노동하고, 임신을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며, 친밀감과 재생산이 결부된 삶을 살아갑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 결정의 권리를, 평등의 권리를, 신체적 자유권을, 인격권을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반차별의 원칙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어떤 여성이 남성과 정상가족을 꾸려서, 비장애인 아이를 낳아서, 국가의 저출산 위기에 도움될때만 ‘정책적 지원’이나 ‘법적 보호’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섹스를 어떻게 하는지 알고 싶고, 교육을 원하는 나도, 나의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나의 학습 공간과 노동환경에서 존중받고, 보장받고 싶은 나도, 성매개 질환이나 피임에 대해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받고 싶은 나도, 임신을 중지하고 싶은 나도, 남성 파트너 없이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싶은 나도, 모두 이 한국 사회의 동등한 시민입니다. 성과 재생산 권리는 바로 그 지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SHARE(셰어)는 그것을 위한 기본법을 준비했고, 이미 많은 분들이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기본법을 통해서 셰어는 자기결정권, 건강권, 성적 즐거움을 추구할 권리, 정보 접근권, 평등권, 사생활의 비밀을 보장받을 권리 등 성·재생산권에 포함되는 세부 권리들을 확인하고, 월경, 피임, 성별 정정 및 성별 확정, 보조생식기술의 사용과, 임신·출산과 임신중지, 포괄적 성교육이라는 사안 별로 그 내용을 구체화 하였습니다. 법의 한줄 한줄을 만들 때마다, 현장에서, 거리에서, 역사에서 만난 수많은 여성들과 소수자들이 경험한 폭력, 차별, 낙인, 억압들을 이제는 한국사회에서 끝내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정부와 국회가 바로 이러한 고민을 함께 해나가주셔야 합니다. 새로운 권리 보장의 시대, 여성과 소수자, 모두의 성과 재생산의 권리를 정의롭게 실현해나가는 새로운 한국 사회의 역사를 써나가는 바로 그 미래에 통제와 처벌, 낙인과 억압의 역사를 넘어서는 정치적 결단, 정책적 전환으로 2021년, 긴 시간 거리에서 싸워온 우리의 외침에 정부와 국회가 화답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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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행동하는간호사회)
12월 31일, 오늘이 지나면 ‘낙태죄’는 사라지게 됩니다. 여성이 자신의 임신을 지속할지 말지 결정하는 것이 ‘죄’가 아니게 되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현실이 되는 날이 오고 있습니다.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임신중지’를 보장할 구체적인 제도나 가이드라인이 마련되지 않아 발생할 의료공백이 우려스럽습니다.
‘낙태죄’ 폐지를 앞두고 일부 의료인단체는 ‘낙태죄’의 완전 폐지에 반대하고 주수제한 조항, 의료진의 거부권 등을 요구했습니다. 세상은 변해 ‘임신중지’는 여성의 권리이고 필수적인 의료서비스라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는데도 실질적으로 의료행위를 해야 하는 의료계 안에서는 아직도 편견과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한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외국의 사례에서 보면 임신중지가 합법화 된 나라임에도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을 의료진이 설득, 회유하고 심지어 잘못된 지식으로 겁을 주고 주수를 속여 시술을 받지 못하게 하는 등의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진료거부로 인해 임신중지 시기를 놓치게 되는 경우도 우려스럽습니다.
‘낙태죄’는 사라졌지만 의료행위를 해야 하는 의료진의 인식이 변하지 않아 여성들이 임신중지를 하지 못하고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료’란 의료진의 가치판단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에게 행해져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의료인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필수적인 의료적 처치를 받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 명확한 지침과 제도적 장치가 필요합니다. 또 무엇보다도 의료인의 인식개선을 위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의대, 간호대, 약대 교육과정에서 임신중지와 그 약물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합니다. 아예 배우질 않거나 있다 해도 ‘이런 게 있다’ 정도로 쉬쉬하며 넘어가는 수준입니다. 저는 간호사임에도 약물낙태 방법이 있다는 것을 전공서적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처음 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은 비전문적인 시술을 받아야하고 인터넷을 통해 약물을 구하곤 합니다. 이로 인해 부작용이 발생해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혼자서 감당해야 합니다.
안전한 임신 중지를 위해서 의료인/예비 의료인 교육이 시급합니다. 임신중지 방법, 약물은 물론 어떻게 대상자를 상담하고 교육해야 하는지 까지 포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과정이 필요합니다.
'낙태죄' 없는 2021년이 오고 있지만 의료계와 정부의 관련부처들이 준비가 되어있는 지 의문입니다. 임신중지를 죄가 아닌 필수적 의료처치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그 관점을 바탕으로 '안전한 임신 중지', '의료접근성 보장'을 위한 실효성있는 제도를 마련하기를 요구합니다.
또한 의료계 내부에서도 '임신을 중단하고 싶은 여성은 누구든지 임신중지룰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개념 위에서 스스로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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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오(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성과재생산크리스천포럼, 성공회 용산나눔의집 원장 사제)
“이제 종교가 종교의 자리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내일이면 이 땅의 여성들이 오늘과는 ‘또 다른 세상’을 살 수 있게 된 날,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게 되어 기쁜 만큼 많은 생각이 스칩니다.
저는 성과재생산크리스천포럼에 참여 중인 성공회 용산나눔의집 원장 사제 자캐오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알고 계시듯이 대한민국은 ‘국교가 없는 민주공화국’입니다. 이 나라는 그리스도교 국가도 아니고, 특정 종교가 절대적 가치를 행사하는 나라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사회 구성의 한 부분을 담당할 수는 있어도 전부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가와 사회, 남성들은 책임을 회피하고, 여성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해 온 낙태죄’가 완전 폐지된 이후, 종교가 종교의 자리에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다면 종교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그 중에서도 제가 속한 그리스도교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그건 바로 이 땅에서 ‘터부시되는 사람들 한가운데’입니다.
지구상 단일 종파로 가장 큰 규모인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두 가지인데, 그것은 ‘부활과 성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 두 이야기 모두 ‘천사가 여성을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중 성탄 이야기에는 한 ‘임신한 여성’이 나오는데, 그는 당시 기준으로는 ‘결혼하지 않고, 아비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 여성이었습니다.
그 여성 앞에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선언합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하느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종교의 자리, 그러니까 종교의 역할은 이런 것입니다. 당대 기준으로 터부시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은총과 환대, 연대의 선언을 하며 구체적으로 실천합니다.
1. 문재인 정부와 한국 사회는 더 이상 종교에게 잘못된 질문과 요구를 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낙태죄 완전 폐지를 앞둔 날, 문재인 정부와 한국 사회는 더 이상 종교에게 ‘그 역할 이상의 질문과 요구’를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이 땅의 종교에게 “여성이냐? 태아냐?”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그 오랜 세월, 국가와 사회, 남성들의 ‘의도적인 책임 회피’라는 그림자 아래에서 터부시되며 고통 받아 온 ‘이 땅의 여성들을 어떻게 환대하고 연대할 것인가?’를 질문하기 바랍니다. 이미 태어난 생명에 대해 책임질 의지도 없고 제대로 된 노력도 하지 않는 정부와 사회가 ‘뜬금없이’ 생명을 존중한다며, 여성과 태아를 대립 구도에 놓는 건 전혀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종교는 과학이나 의학적 사실과 더불어 세상을 유기적으로 이해하는 ‘하나의 관점’입니다.
그런 종교는 태아를 여성과 연결된 존재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진정 태아를 위한 최선의 배려는 지금 우리 눈앞에서 ‘존엄한 인간’으로 살아 숨 쉬는 여성에 대한 배려라고 주장합니다. 여성은 태아를 위해 존재하는 ‘기계적 도구’가 아닙니다. 독립적 인격인 여성은 그 누가 뭐라 해도 자신과 태아를 위한 ‘최선의 결정’을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정부와 사회, 의료인들은 그 여성이 ‘독립적인 최선의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지원 체계를 갖추는 게 마땅합니다. 정부와 사회, 의료인들이 독립적인 여성을 대신해 결정하고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2. 종교는 종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의 종교, 무엇보다 제가 속한 그리스도교는 그 시대나 사회의 한계와 편견 때문에 ‘터부시되는 사람들 한가운데’로 돌아가 은총과 환대, 연대를 선언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이 땅의 여성들이 임신 중단을 생각할 때에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그들이 그 과정에서 더 안전하고 평등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적극 질문하고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제대로 된 질문과 토론 없이’ 아무렇지 않게 일삼던 왜곡과 선동을 당장 멈춰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낙태죄 완전 폐지는 ‘낙태 선동’과 무관합니다. 이런 주장은 마치 많은 여성들이 아무 이유 없이 낙태를 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한다는 ‘잘못된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낙태죄 완전 폐지는 오히려 ‘여성의 재생산권을 위한 국가와 사회, 교회의 책임’에 대해 평등하고 안전하게 얘기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과정’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교 신앙과 교회는 임신 중단을 포함한 재생산권 앞에서 고뇌하는 여성에게 ‘우선적’으로 환대와 연대, 사랑을 적극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독립적 인격체인 여성과 한 몸인 태아에 대한 ‘진정한 배려’입니다.
낙태죄 완전 폐지를 맞이하는 2021년 1월 1일, 정부와 이 사회는 종교가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질문과 요구를 해주십시오.
한국 사회의 한계와 편견 때문에 오랜 시간 터부시되어 온 여성들의 임신 중단 그리고 재생산권 논의 앞에서, 종교는 왜곡과 정죄가 아닌 ‘은총과 환대, 연대와 사랑’을 선언하고 실천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모낙폐와 동행하는 성과재생산크리스천포럼은 그 일을 위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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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전국학생행진)
안녕하세요. 전국학생행진에서 활동하는 수영입니다. 올해 우리는 낙태죄 헌법 불합치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그 이전보다 조금 더 나아졌을 뿐, 여전히 처벌 중심의 법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힘을 모았습니다. 낙태죄 폐지를 염원하는 힘으로 정부의 입법안을 저지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낙태죄 없는 2021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제는 낙태죄 폐지를 넘어서 어떠한 여성이든 안전하게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페이지는 낙태죄를 폐지한 우리들의 손으로 다시 써질 것입니다.
안전한 임신중지 접근권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갑작스러운 코로나19는 여성 청년과 청소년의 삶을 더욱 제약하고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채용시장에서 20대 여성을 위한 좋은 일자리는 좀체 찾아보기 힘듭니다. 대신 어두운 미래로 인해 여성 청년의 우울증과 자살율이 늘고 있습니다.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가정 안에서는 여성을 향한 폭력이 늘고 있습니다. 이렇듯 여성 청년과 청소년의 삶을 제약하는 조건들은 하나 둘 커져만 갑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은 가장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결국 겹겹히 쌓인 모순 속에서 여성들은 임신을 중단하기 위해 오늘도 위험한 시술과 약물 복용을 감행합니다. 원치 않는 출산을 책임지기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한 임신중지 접근권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접근권을 확대할 때 무엇보다도 여성 청년과 청소년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고려해야 합니다. 지난 입법예고안에서도 드러났듯이 정부는 청소년을 보호자의 동의하에 임신중지가 가능한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호자 동의 조항은 여성 청소년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방해할 뿐입니다. 청소년 개개인이야말로 권리의 주체이기 때문에 보호자의 동의 없이도 임신중지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사회는 청소년들이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도록 임신중지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전달해야 합니다. 또한 수많은 여성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의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시간적 여유와 경제적 여력이 부족한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서 의료적 지원을 확대해야 합니다. 바로 내 집 옆에 있는 산부인과에서 마음 놓고 임신중지 시술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집 앞에 있는 약국에서 유산유도제를 구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사회는 여성이 임신과 출산, 양육할 수 있는 조건을 지속적으로 마련해야 합니다. 실제로 많은 여성 청년·청소년들은 아이를 낳고 싶어도 경제적 여력이 없거나 여성 개인이 양육을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습니다. 그 결과 가정을 꾸리기를 포기합니다. 가정을 꾸린다 할지라도 임신과 출산을 포기합니다. 국가는 여성이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포기하고 선택하도록 놔두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권 확대를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합니다. 한 사회의 재생산과 시민의 권리를 증진시키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의 승리를 원동력으로, 국가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그날까지 권리 확대에 힘쓸 것입니다.
기자회견문을 읽고 싶다면? 여기→ 기자회견문 (클릭)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발언과 기자회견문 낭독 후, 짧은 퍼포먼스를 진행했습니다.
[사진]
판넬 위, 검은색 종이 9장에 여성들을 옭아매어 왔던 9가지 문제들이 상징적 이미지와 함께 적혀 있다.
[부도덕하고 문란한 여성이라는 낙인], [안전한 의료서비스 부재], [낳을권리/낳지않을권리 부재한 노동환경],
[가임기 여성 지도], [여성의 시민권 배제], [형법 제27장 낙태죄], [낙태죄 악용한 폭력/협박],
[가족의 허락 및 배우자 동의 조건], [진보한 과학기술 접근권 제한]
그 검은색 종이를 떼어내면 그 뒤에는 연보라색 배경에 꽃 이미지와 함께,
[여성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해! 우리가 함께 만들어 온! 낙태죄 없는 2021년!] 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기자회견 현수막 앞에 네 사람이 나와 서 있다. 한 사람은 판넬을 들고, 한 사람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다.
나머지 두 사람은 9장의 검은 종이를 하나씩 떼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다.
기자회견 마지막 순서로 9가지 버려야 할 것들을 하나씩 떼어 쓰레기봉투에 구겨서 버렸습니다!
마침내 낙태죄 없는 2021년! 이라는 글자가 나타났습니다! 낙태죄 없는 새해가 이제 코앞에 다가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낙태죄가 사라진 이후의 새로운 세계에도 이뤄가야 할 과제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저 종이를 뜯어 버리는 것처럼 빠르고 분명하고 속시원한 변화가 가능하진 않겠지만,(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공동의 지향을 갖고 여럿이 힘내어 나아간다면 우리가 원하는 세상에 언제나, 조금씩,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걸 기억하며
여성을 포함한 모두에게 안전한 의료접근권, 기본적인 시민권이 보장되는 세상을 만드는 길에도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각양각색으로 함께하기를 기대합니다!
낙태죄는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보내버리고, 페미니스트들이 만드는 새로운 세상으로 같이 나아가요!
2020년 연말, 팬데믹으로 여전히 전 세계적 뒤숭숭함이 지속되는 가운데,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는 기쁘기 그지없는 중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바로 낙태죄 폐지!2020년 12월 31일 24시를 기점으로 임신중지 형사처벌법이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
그 열흘 전부터 낙태죄 없는 세상에서 이뤄가야 할 과제를 하루에 하나씩 공개하면서 들썩들썩 날짜를 꼽아보고 있었고요-
[사진] 총 열 장의 카드뉴스가 모아져 있다. 각각의 카드뉴스에는 왼쪽 상단 말풍선에 '낙태죄 폐지까지 D-10'부터 '낙태죄 폐지까지 D-1'까지 숫자가 하나씩 작아지며 적혀 있고, 가운데에는 공통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음에 각각 다른 과제가 하나씩 적혀 있다. 열 가지 과제는 각각 '유산유도제의 공적도입과 국가 필수의약품 지정', '임신중지 건강보험 적용', '의료현장 실태조사와 의료인 교육훈련', '보건의료체계 및 인프라 재정비', '낳을 권리, 낳지 않을 권리가 보장되는 노동조건',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성교육', '피임접근권 강화', '출생, 양육, 입양 등 관련 법제도 개선', '임신중지에 대한 차별, 사회적 낙인 해소', '처벌이 아닌 권리보장으로!'이다. 모든 카드뉴스에는 알록달록한 색으로 축하의 의미를 담은 리본이 그려져 있고, 하단에는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이라고 표기돼 있다.
그리고 D-day인 12월 31일,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과 함께 국회 앞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처벌의 시대는 끝났다!”
[‘낙태죄’ 없는 2021년 맞이 기자회견]
• 일시: 2020년 12월 31일 (목) 오전 11시
• 장소: 국회의사당 정문 앞
• 사회: 문설희(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 사회진보연대)
• 순서
1)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경과보고 및 운동 방향 : 나영(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 성적권리와재생산정의를위한센터 셰어SHARE)
2) 낙태죄 폐지, 임신중지 비범죄화 운동 의의 : 제이(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집행위원, 한국여성민우회)
3) 처벌대신 권리를! ‘낙태죄’ 없는 새로운 세계를 위한 법·정책 과제 : 이유림(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성적권리와재생산정의를위한센터 셰어SHARE)
4) 의료계 발언 : 민정(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행동하는간호사회)
5) 종교계 발언 : 자캐오(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성과재생산크리스천포럼)
6) 청년 학생 발언 : 홍수영(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전국학생행진)
7) 기자회견문 낭독 : 앎(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 한국성폭력상담소), 박은주(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집행위원, 한국여성단체연합)
8) 퍼포먼스
[사진] 국회 앞, 8명의 활동가들이 함께 들고 있는 현수막에는 "처벌의 시대는 끝났다! 낙태죄 없는 2021년 맞이 국회 앞 기자회견"이 쓰여 있다. 운동의 현장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분홍색 배경에 꽃과 풀잎이 그려진 희망찬 느낌의 현수막이다.
아쉽게도 코로나 바이러스 방역지침상 9명 이하의 현장 인원을 유지해야 하여 더 많은 시민들과 한자리 모일 순 없었지만
모낙폐 유튜브 계정으로 생중계를 하며, 낙태죄가 진짜진짜로 영원히 끝장나는 날을 벅찬 마음으로 맞이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습니다.
아래 발언문 전문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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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 성적권리와재생산정의를위한센터 셰어SHARE 대표)
이제 오늘로써, 낙태죄는 실효를 다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오늘을 만들어낸 전국의 여성, 시민분들과 함께 모여 오늘을 축하하고 싶은데 코로나로 그렇게 하지 못해 너무 아쉽습니다.
낙태죄는 지금까지 임신과 출산을 경제성장의 도구로, 여성의 몸을 이를 위한 인구관리의 도구로 삼아 왔던 역사의 산물입니다.
여성들은 80년대까지 가족계획 요원에게 영문도 모르고 붙들려 가 배꼽수술이라 부르던 복강경 난관시술을 받았고, 장애나 질병이 있는 여성들은 강제로 불임시술이나 낙태 시술을 받아야 했으며, 저출산시대가 되자 임신중지를 한 여성들은 이기적인 여자들로 내몰리고 파트너와 남편에 의해 고소고발을 당했습니다.
생명 경시를 운운해 온 국가와 사회는 사실상 이 모든 일들의 적극적인 행위자이고 방관자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폭력적인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2009년 말, 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의사들 모임, 진오비가 ‘낙태 근절 운동본부’를 만들어 낙태 시술 병원을 고발하고 제보 게시판을 만들면서 병원들은 시술을 거부하고, 시술비가 수백만원 대로 폭등하고, 해외로 가는 여성들이 증가했습니다. 가짜 낙태약이 밀수입되기 시작했고, 임신중지 병원 알아봐 주겠다면서 불러내 성폭력을 행하는 사례까지 발생했습니다. 자기 허락을 안 받고 여자친구, 아내가 낙태를 했다는 제보가 이어졌고 법정에서는 매일 술에 취해 임신한 아내에게 칼까지 휘두르던 남편, 위자료 안 주려고 아내를 고소한 남편들은 무죄를 받고 여성들만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결국 2012년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에는 19세 여성이 사망하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사문화되었다고 생각했던 법이 언제든지 악용될 수 있고, 여성들의 삶과 건강, 생명을 위협하게 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게 해 준 계기였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경험들이 쌓여 2016년 검은시위로 터져나왔고, 용기있는 여성들이 거리에서, 온라인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낙태죄 폐지를 요구했습니다.
장애여성들은 국가의 인구정책 속에서 어떠한 권리도 보장받을 수 없었던 장애여성의 경험을 통해 낙태죄의 문제가 사실상 국가의 우생학적 목적에 따라 생명을 선별하고 차별을 지속시켜온 폭력의 문제임을 구체적으로 짚어냈습니다.
우리는 세대, 연령, 질병, 장애, 노동,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에 따른 다양한 경험들을 이야기하고 연결해 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진짜 문제는 ‘낙태죄’다”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
이제 우리는 낙태죄가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결정권이 대립하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통제와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라는 관점의 변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제 정부, 지자체는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해 나가고 실질적인 권리를 보장할 책임과 역할을 다해야 하고,
교육, 노동, 사회복지 기관, 의료, 상담 기관 전반에서 실질적인 접근성을 마련해야 합니다.
의료인 분들도 지금까지는 불법인 여건에 있었지만 의료적 안전성 뿐만 아니라 건강과 삶의 여건까지 살피는 의료인들이 곳곳에 많이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런 의료인 분들이 마음놓고 더 좋은 진료를 제공하실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건강보험과 유산유도제를 시급히 도입하고,
다른 의료행위와 마찬가지로 임신중지도 제대로 된 보건의료 전달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약만 처방할 수 있는 병원에서부터 시술을 할 수 있는 병원까지, 협진이 필요한 3차 의료기관까지 연계 체계가 제대로 구축되게 하고 국공립병원과 대학병원에서는 보다 체계적으로 임신중지 여건이 마련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일부 언론에서는 혼란이나 입법공백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처벌법이 사라지는 것은 그 자체로 혼란도 공백도 아닙니다.
작년에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이 되었다면 이 법은 이미 그 때 사라졌어야 할 법입니다.
우리의 용기있는 요구와 행동이 헌법재판소를 통해 낙태죄의 위헌성을 확인하게 만들었고, 한참 후퇴한 정부의 개정안을 막아냈으며, 국회에서 졸속적으로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대신 임신중지를 처벌하던 시대를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실질적인 권리를 보장하고 처벌을 통해 오직 여성들에게만 전가되고 가려져 온 사회적 불평등을 함께 드러내고 바꾸어 나가면 됩니다.
여전히 제한적 허용과 처벌 방식에 저항해 싸우고 있는 각국의 전례를 보았을 때도 우리는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결과를 이끌어 낸 것입니다.
앞으로 비범죄화 상태에서 우리가 만들어갈 또 다른 진전들은 이제 중요한 선례가 될 것입니다.
한국의 소식을 전하자, 독일 베를린에서도 한국의 선례가 여전히 임신중지가 형법에 범죄로 남아있는 독일 같은 나라에게 선도적인 선례를 보여주는 것이며, 독일에서도 더 이상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 법 개정이 이루어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고 축하와 연대의 인사를 전해왔습니다.
전 세계 129개국이 참여하는 여성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를 위한 국제 캠페인 조직과 각국 여성들에게 안전한 유산유도제를 보급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우먼 헬프 우먼에서도 축하와 연대의 인사와 함께 안전한 유산유도제 도입을 촉구하는 메세지를 보내주었습니다.
더불어, 정말 길고 힘들었던, 그러나 너무 멋진 투쟁 끝에 어제 상원의회에서 임신중지 합법화를 이뤄낸 아르헨티나의 소식과 함께 2020년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오늘, 우리가 만들어낸 역사를 충분히 축하하고, 이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집시다.
낙태죄 폐지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이 중요한 사회적 노동으로 존중되고, 임신과 임신중지 모두가 책임있는 결정으로 존중될 수 있는 사회,
장애인과 질병이 있는 이들의 건강권과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보장되고 자립과 지원의 여건이 함께 보장되는 사회,
우리의 삶과 성과 재생산 권리를 위협하는 위험한 노동환경을 없애고,
혼자 혹은 원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자녀의 양육 여부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비닐하우스에서 죽어가지 않고, 이주민과 난민의 삶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
지금과 같은 팬데믹의 시대에 더 취약한 삶의 여건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영향이 전가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은
임신중지를 포함한 성적권리와 재생산권리가 모두에게 보장되는 여건을 만드는 일이고, 재생산정의를 실현해 나가는 일입니다.
이런 역사를 만들어낸, 그리고 앞으로도 만들어갈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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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집행위원, 한국여성민우회)
저는 이 역사적인 날, 무엇이 낙태죄를 가능하게 했고, 무엇이 그것을 끝장냈는가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형법이 제정될 때부터 임신중지는 범죄로 규정됐습니다. 1953년, 피임도구도 구하기 힘들던 때부터였습니다. 여자는 시민이 아니라 어머니였습니다. 가정과 국가를 위해 아이 낳는 게 당연했고, 어떻게 임신을 피할 수 있는지, 낳은 다음 어떻게 키워낼지는 그저 여자들이 알아서 할 일일뿐 공공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계속 임신하고 어떻게든 아이를 키우고 또 어떻게든 임신을 중지했습니다. 중절수술을 여러 번 받은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국가가 인구를 줄이겠다고 팔 걷어붙이고 나섰던 긴 세월 동안은 더했습니다. 동시에 ‘낙태’는 죄악이고 수치였습니다. 낙태죄가 있는 줄도 몰랐던 사람이 태반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법 조항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는 아니었습니다. 한 여성이 중절수술을 일곱 번씩 받아도 인구 문제가 없는 한 그것을 문제시하지 않던 사회, 그럼에도 개개인의 임신중지 경험은 의료기록에도 남길 수 없고 가까운 사이에도 말 못하고 숨겨야 했던 사회, 여성의 건강과 존엄한 삶에는 무관심하고 여성 통제를 통한 출산율 조절에만 관심을 쏟는 사회, 즉 여성을 2등 시민으로 내리누르던 사회가 낙태죄의 존재기반이었습니다. 낙태죄가 만들어진 50년대나, 적극적으로 무시된 1970년대나, ‘낙태 고발 정국’으로 가시화된 2010년대나, 우리는 연속된 ‘낙태죄의 시대, 처벌의 시대’를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벌의 시대 속에서도 그 시대의 끝을 당겨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들을 기억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했을 떨리는 목소리, 이건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닌 거 같다고 말하던 목소리, 어떻게 법이 이럴 수가 있냐며 분통을 터뜨리던 목소리, 혹은 이게 분노할 일이 맞는 건지 조심스럽게 질문해오던 목소리들이 있었습니다. 삼삼오오 모여, 수술대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의사에게 어떤 말을 들었는지,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질문할 수 없었는지, 왜 우리의 경험이 개인의 책임으로만 밀쳐져 있었는지를 처음으로 정치화하며 엮어나가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병원에, 경찰서에, 법원에 동행했던 순간들. 상대 남성의 고발로 기소되어 2심까지 함께 분투했지만 결국 낙태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사건. 이 불합리한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널리 알려도 좋다고 말해준 여자들. 여성의 관점에서 낙태 이슈를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기사들, 책들, 영화들. 2012년 낙태죄가 합헌이라는 선고를 받아들고도 멈추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의 억압을 뚫고,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자기 경험을 공개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낙태했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는 애 낳는 기계가 아니다.” “내 몸은, 내 삶은 범죄가 아니다.” 2016년 한국사회 최초로 광장에서 대놓고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던 '검은 시위'. 전국에서 지역별로 수차례 반복된 캠페인과 선전전. 주말마다 보신각에서 열린 임신중지 합법화 시위의 검은 물결. 넓은 광화문광장을 가득 채웠던 집회. 300명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 낸 <형법 제269조 삭제 퍼포먼스>. 햇살과 우박이 한꺼번에 내리치는 기묘한 날씨에 ‘낙태죄 폐지, 새로운 세계’를 외쳤던 그 날. 몸과 얼굴에 강렬한 메시지를 쓰고 담대하게 카메라를 응시했던 여자들. 수백명의 자발적 참여로 이어진 1인시위. 아르헨티나, 폴란드, 아일랜드- 각국의 활동가들과 연대의 깃발을 서로 흔들어 보였던 순간. 23만 명의 낙태죄 폐지 청원. 분노의 필리버스터, 이어말하기.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낙태죄의 전면 폐지를 촉구한 1015명의 천주교 신자들. 의료전문가로서 소신을 지키며 안전한 임신중지 보장을 요구한 의료인들. 여성의 경험을 누락한 채 구멍 나 있던 낡은 법을 인권과 정의의 언어로 새롭게 기워낸 법률가들. 낙태죄 전면 폐지 입법청원에 참여한 10만명이 넘는 시민들. 수십번의 기자회견. 수많은 의견서, 성명서, 영화제, 포럼, 토론회…. 그 모든 현장에서 강력한 증언과 선언을 겹겹이 쌓아올려 온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결코 한 줄기로 환원될 수 없는, 하지만 기저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향한 열망으로 연결된 각각의 귀중한 운동들이었습니다.
국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여성이 2등 시민이라는 게 노골적으로 당연시되던 시절을 지나, 성평등의 실현을 목표로 한 정부부처가 설립되고, 임신중절에 대한 실태조사가 제한적이나마 시행되고, 여성이 낙태죄로 처벌받고 폭력에 노출되고 심지어 수술 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알려지기도 했으며, 국제사회로부터 임신중지를 비범죄화하라는 똑같은 권고를 몇 년째 받고,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수도 없이 이뤄지는 동안, 낙태죄로 처벌받은 시민들이 두 차례의 위헌소송을 제기하여 결국엔 낙태죄의 소멸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까지- 국정 운영을 위임받은 자들은 '현행법상 어쩔 수 없고' '사회적 인식이 아직이고',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게 없다' 운운하며 손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여성들이 한국 사회를 끌어올리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이미 진작부터 변했고, 더 이상 어제와 같은 세상에 살 수 없다고 느끼는 우리가 바로 그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이 명명백백한 증거를, 헌법불합치 선고 이후에도 국가는 적극적으로 외면하고 차단하려 했습니다. 종말의 위기에 처한 처벌의 시대를 어떻게든 되살려보려고 새로운 처벌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여성들, 그것도 젊은 여성들의 말을 들으면 나라가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우리가 이미 내파시킨 낡은 세계의 마지막 잔해를 툭 털어내듯이 낙태죄의 소멸을 함께 지켜볼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기억하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지금 호주제를 떠올리듯이, 옛날엔 임신중지를 형사처벌하는 말도 안되는 법이 있었다고, 그땐 그런 법이 없어지면 나라가 뒤집어질 것처럼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다행히 악법을 없애기 위해 나섰던 용기있는 여자들이 기세 좋게 살아나갔던 시대이기도 했다고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확인하고 제도의 공백으로 빚어진 사회적 고통을 그저 감당해야 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국가는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시스템을 마련해야 합니다. 우리도 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임신중지를 범죄의 영역에 밀어 넣었던 처벌의 시대로 절대 되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안전한 의료서비스로서의 임신중지를 보장할 적극적인 조치를 요구하여 시민으로서의 기본권을 끝까지 쟁취할 것입니다.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부당함에 대한 스스로의 감각을 믿고, 함께 변화를 만들어 온 서로를 믿고, 낡은 법과 낡은 윤리에 속지도 구속되지도 않고, 여성들 그리고 주변화되었던 이들의 관점이 온전히 반영된 새로운 정의와 새로운 윤리를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싸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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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림(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성적권리와재생산정의를위한센터 셰어SHARE)
2020년 12월 31일 오늘, 오늘 이후의 한국 사회는 67년만에 드디어, 여성이 자신의 판단으로 자신의 몸에서 진행되는 임신을 중지하는 행위가 범죄가 아니게 되는 역사적인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낙태죄라는 형법을 통해 개인의 몸과 성을 규율하고, 침해해온 역사를 비로서 내일 투쟁으로 끝내게 됩니다. 따라서 내일은 권리의 보장으로, 정의의 실현으로 향해가는 새로운 법과 정책들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임신중지의 전면 비범죄화’는 가장 기본적인 요구입니다. 낙태죄 폐지는 결론이 아닌 시작입니다. 개인의 성∙재생산 권리는 의료, 교육, 노동, 사회복지 등 모든 생활 영역에서 보장받아야 할 권리이고, 이를 보장할 의무는 국가에게 있습니다. 바로 새로운 법과 정책은 이를 실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2017년 UN은 2030 지속가능발전의제에 기반하여 전 세계의 국가에서 재생산 건강을 측정하는 새로운 지표를 내놓았습니다. 여기서 드러난 가장 큰 변화는 바로 국가라는 주체입니다. 국가가 피임을 보장하기 위해 무엇을 노력하고 있는가? 국가는 개인이 재생산 건강을 위한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것에 어떤 장애물이 있는지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지, 이러한 장애물을 없애려고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지, 안전하지 못한 임신중지에 대해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고려하고 개입하고 있는지가 바로 한 국가의 수준을 측정하는 지표입니다. 성평등 없이는 지속가능한 발전은 없다는 인식, 성과 재생산의 권리에 대한 통합적인 보장만이 차별을 낮추고,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는 인식이 UN의 지속가능발전의제, 미래의 방향성에 담겨있습니다.
이러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에 성과 재생산의 영역이 권리라는 인식이, 선언이, 법적인 기반이, 구체적인 정책들이 시급하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육신을 가진 인간입니다. 누군가와 성적인 관계를 맺고, 또 그러한 몸으로 노동하고, 임신을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며, 친밀감과 재생산이 결부된 삶을 살아갑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 결정의 권리를, 평등의 권리를, 신체적 자유권을, 인격권을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반차별의 원칙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어떤 여성이 남성과 정상가족을 꾸려서, 비장애인 아이를 낳아서, 국가의 저출산 위기에 도움될때만 ‘정책적 지원’이나 ‘법적 보호’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섹스를 어떻게 하는지 알고 싶고, 교육을 원하는 나도, 나의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나의 학습 공간과 노동환경에서 존중받고, 보장받고 싶은 나도, 성매개 질환이나 피임에 대해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받고 싶은 나도, 임신을 중지하고 싶은 나도, 남성 파트너 없이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싶은 나도, 모두 이 한국 사회의 동등한 시민입니다. 성과 재생산 권리는 바로 그 지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SHARE(셰어)는 그것을 위한 기본법을 준비했고, 이미 많은 분들이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기본법을 통해서 셰어는 자기결정권, 건강권, 성적 즐거움을 추구할 권리, 정보 접근권, 평등권, 사생활의 비밀을 보장받을 권리 등 성·재생산권에 포함되는 세부 권리들을 확인하고, 월경, 피임, 성별 정정 및 성별 확정, 보조생식기술의 사용과, 임신·출산과 임신중지, 포괄적 성교육이라는 사안 별로 그 내용을 구체화 하였습니다. 법의 한줄 한줄을 만들 때마다, 현장에서, 거리에서, 역사에서 만난 수많은 여성들과 소수자들이 경험한 폭력, 차별, 낙인, 억압들을 이제는 한국사회에서 끝내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정부와 국회가 바로 이러한 고민을 함께 해나가주셔야 합니다. 새로운 권리 보장의 시대, 여성과 소수자, 모두의 성과 재생산의 권리를 정의롭게 실현해나가는 새로운 한국 사회의 역사를 써나가는 바로 그 미래에 통제와 처벌, 낙인과 억압의 역사를 넘어서는 정치적 결단, 정책적 전환으로 2021년, 긴 시간 거리에서 싸워온 우리의 외침에 정부와 국회가 화답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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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행동하는간호사회)
12월 31일, 오늘이 지나면 ‘낙태죄’는 사라지게 됩니다. 여성이 자신의 임신을 지속할지 말지 결정하는 것이 ‘죄’가 아니게 되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현실이 되는 날이 오고 있습니다.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임신중지’를 보장할 구체적인 제도나 가이드라인이 마련되지 않아 발생할 의료공백이 우려스럽습니다.
‘낙태죄’ 폐지를 앞두고 일부 의료인단체는 ‘낙태죄’의 완전 폐지에 반대하고 주수제한 조항, 의료진의 거부권 등을 요구했습니다. 세상은 변해 ‘임신중지’는 여성의 권리이고 필수적인 의료서비스라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는데도 실질적으로 의료행위를 해야 하는 의료계 안에서는 아직도 편견과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한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외국의 사례에서 보면 임신중지가 합법화 된 나라임에도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을 의료진이 설득, 회유하고 심지어 잘못된 지식으로 겁을 주고 주수를 속여 시술을 받지 못하게 하는 등의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진료거부로 인해 임신중지 시기를 놓치게 되는 경우도 우려스럽습니다.
‘낙태죄’는 사라졌지만 의료행위를 해야 하는 의료진의 인식이 변하지 않아 여성들이 임신중지를 하지 못하고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료’란 의료진의 가치판단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에게 행해져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의료인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필수적인 의료적 처치를 받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 명확한 지침과 제도적 장치가 필요합니다. 또 무엇보다도 의료인의 인식개선을 위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의대, 간호대, 약대 교육과정에서 임신중지와 그 약물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합니다. 아예 배우질 않거나 있다 해도 ‘이런 게 있다’ 정도로 쉬쉬하며 넘어가는 수준입니다. 저는 간호사임에도 약물낙태 방법이 있다는 것을 전공서적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처음 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은 비전문적인 시술을 받아야하고 인터넷을 통해 약물을 구하곤 합니다. 이로 인해 부작용이 발생해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혼자서 감당해야 합니다.
안전한 임신 중지를 위해서 의료인/예비 의료인 교육이 시급합니다. 임신중지 방법, 약물은 물론 어떻게 대상자를 상담하고 교육해야 하는지 까지 포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과정이 필요합니다.
'낙태죄' 없는 2021년이 오고 있지만 의료계와 정부의 관련부처들이 준비가 되어있는 지 의문입니다. 임신중지를 죄가 아닌 필수적 의료처치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그 관점을 바탕으로 '안전한 임신 중지', '의료접근성 보장'을 위한 실효성있는 제도를 마련하기를 요구합니다.
또한 의료계 내부에서도 '임신을 중단하고 싶은 여성은 누구든지 임신중지룰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개념 위에서 스스로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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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오(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성과재생산크리스천포럼, 성공회 용산나눔의집 원장 사제)
“이제 종교가 종교의 자리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내일이면 이 땅의 여성들이 오늘과는 ‘또 다른 세상’을 살 수 있게 된 날,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게 되어 기쁜 만큼 많은 생각이 스칩니다.
저는 성과재생산크리스천포럼에 참여 중인 성공회 용산나눔의집 원장 사제 자캐오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알고 계시듯이 대한민국은 ‘국교가 없는 민주공화국’입니다. 이 나라는 그리스도교 국가도 아니고, 특정 종교가 절대적 가치를 행사하는 나라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사회 구성의 한 부분을 담당할 수는 있어도 전부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가와 사회, 남성들은 책임을 회피하고, 여성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해 온 낙태죄’가 완전 폐지된 이후, 종교가 종교의 자리에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다면 종교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그 중에서도 제가 속한 그리스도교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그건 바로 이 땅에서 ‘터부시되는 사람들 한가운데’입니다.
지구상 단일 종파로 가장 큰 규모인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두 가지인데, 그것은 ‘부활과 성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 두 이야기 모두 ‘천사가 여성을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중 성탄 이야기에는 한 ‘임신한 여성’이 나오는데, 그는 당시 기준으로는 ‘결혼하지 않고, 아비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 여성이었습니다.
그 여성 앞에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선언합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하느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종교의 자리, 그러니까 종교의 역할은 이런 것입니다. 당대 기준으로 터부시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은총과 환대, 연대의 선언을 하며 구체적으로 실천합니다.
1. 문재인 정부와 한국 사회는 더 이상 종교에게 잘못된 질문과 요구를 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낙태죄 완전 폐지를 앞둔 날, 문재인 정부와 한국 사회는 더 이상 종교에게 ‘그 역할 이상의 질문과 요구’를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이 땅의 종교에게 “여성이냐? 태아냐?”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그 오랜 세월, 국가와 사회, 남성들의 ‘의도적인 책임 회피’라는 그림자 아래에서 터부시되며 고통 받아 온 ‘이 땅의 여성들을 어떻게 환대하고 연대할 것인가?’를 질문하기 바랍니다. 이미 태어난 생명에 대해 책임질 의지도 없고 제대로 된 노력도 하지 않는 정부와 사회가 ‘뜬금없이’ 생명을 존중한다며, 여성과 태아를 대립 구도에 놓는 건 전혀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종교는 과학이나 의학적 사실과 더불어 세상을 유기적으로 이해하는 ‘하나의 관점’입니다.
그런 종교는 태아를 여성과 연결된 존재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진정 태아를 위한 최선의 배려는 지금 우리 눈앞에서 ‘존엄한 인간’으로 살아 숨 쉬는 여성에 대한 배려라고 주장합니다. 여성은 태아를 위해 존재하는 ‘기계적 도구’가 아닙니다. 독립적 인격인 여성은 그 누가 뭐라 해도 자신과 태아를 위한 ‘최선의 결정’을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정부와 사회, 의료인들은 그 여성이 ‘독립적인 최선의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지원 체계를 갖추는 게 마땅합니다. 정부와 사회, 의료인들이 독립적인 여성을 대신해 결정하고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2. 종교는 종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의 종교, 무엇보다 제가 속한 그리스도교는 그 시대나 사회의 한계와 편견 때문에 ‘터부시되는 사람들 한가운데’로 돌아가 은총과 환대, 연대를 선언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이 땅의 여성들이 임신 중단을 생각할 때에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그들이 그 과정에서 더 안전하고 평등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적극 질문하고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제대로 된 질문과 토론 없이’ 아무렇지 않게 일삼던 왜곡과 선동을 당장 멈춰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낙태죄 완전 폐지는 ‘낙태 선동’과 무관합니다. 이런 주장은 마치 많은 여성들이 아무 이유 없이 낙태를 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한다는 ‘잘못된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낙태죄 완전 폐지는 오히려 ‘여성의 재생산권을 위한 국가와 사회, 교회의 책임’에 대해 평등하고 안전하게 얘기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과정’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교 신앙과 교회는 임신 중단을 포함한 재생산권 앞에서 고뇌하는 여성에게 ‘우선적’으로 환대와 연대, 사랑을 적극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독립적 인격체인 여성과 한 몸인 태아에 대한 ‘진정한 배려’입니다.
낙태죄 완전 폐지를 맞이하는 2021년 1월 1일, 정부와 이 사회는 종교가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질문과 요구를 해주십시오.
한국 사회의 한계와 편견 때문에 오랜 시간 터부시되어 온 여성들의 임신 중단 그리고 재생산권 논의 앞에서, 종교는 왜곡과 정죄가 아닌 ‘은총과 환대, 연대와 사랑’을 선언하고 실천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모낙폐와 동행하는 성과재생산크리스천포럼은 그 일을 위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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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전국학생행진)
안녕하세요. 전국학생행진에서 활동하는 수영입니다. 올해 우리는 낙태죄 헌법 불합치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그 이전보다 조금 더 나아졌을 뿐, 여전히 처벌 중심의 법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힘을 모았습니다. 낙태죄 폐지를 염원하는 힘으로 정부의 입법안을 저지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낙태죄 없는 2021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제는 낙태죄 폐지를 넘어서 어떠한 여성이든 안전하게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페이지는 낙태죄를 폐지한 우리들의 손으로 다시 써질 것입니다.
안전한 임신중지 접근권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갑작스러운 코로나19는 여성 청년과 청소년의 삶을 더욱 제약하고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채용시장에서 20대 여성을 위한 좋은 일자리는 좀체 찾아보기 힘듭니다. 대신 어두운 미래로 인해 여성 청년의 우울증과 자살율이 늘고 있습니다.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가정 안에서는 여성을 향한 폭력이 늘고 있습니다. 이렇듯 여성 청년과 청소년의 삶을 제약하는 조건들은 하나 둘 커져만 갑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은 가장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결국 겹겹히 쌓인 모순 속에서 여성들은 임신을 중단하기 위해 오늘도 위험한 시술과 약물 복용을 감행합니다. 원치 않는 출산을 책임지기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한 임신중지 접근권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접근권을 확대할 때 무엇보다도 여성 청년과 청소년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고려해야 합니다. 지난 입법예고안에서도 드러났듯이 정부는 청소년을 보호자의 동의하에 임신중지가 가능한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호자 동의 조항은 여성 청소년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방해할 뿐입니다. 청소년 개개인이야말로 권리의 주체이기 때문에 보호자의 동의 없이도 임신중지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사회는 청소년들이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도록 임신중지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전달해야 합니다. 또한 수많은 여성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의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시간적 여유와 경제적 여력이 부족한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서 의료적 지원을 확대해야 합니다. 바로 내 집 옆에 있는 산부인과에서 마음 놓고 임신중지 시술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집 앞에 있는 약국에서 유산유도제를 구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사회는 여성이 임신과 출산, 양육할 수 있는 조건을 지속적으로 마련해야 합니다. 실제로 많은 여성 청년·청소년들은 아이를 낳고 싶어도 경제적 여력이 없거나 여성 개인이 양육을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습니다. 그 결과 가정을 꾸리기를 포기합니다. 가정을 꾸린다 할지라도 임신과 출산을 포기합니다. 국가는 여성이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포기하고 선택하도록 놔두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권 확대를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합니다. 한 사회의 재생산과 시민의 권리를 증진시키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의 승리를 원동력으로, 국가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그날까지 권리 확대에 힘쓸 것입니다.
기자회견문을 읽고 싶다면? 여기→ 기자회견문 (클릭)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발언과 기자회견문 낭독 후, 짧은 퍼포먼스를 진행했습니다.
[사진]
판넬 위, 검은색 종이 9장에 여성들을 옭아매어 왔던 9가지 문제들이 상징적 이미지와 함께 적혀 있다.
[부도덕하고 문란한 여성이라는 낙인], [안전한 의료서비스 부재], [낳을권리/낳지않을권리 부재한 노동환경],
[가임기 여성 지도], [여성의 시민권 배제], [형법 제27장 낙태죄], [낙태죄 악용한 폭력/협박],
[가족의 허락 및 배우자 동의 조건], [진보한 과학기술 접근권 제한]
그 검은색 종이를 떼어내면 그 뒤에는 연보라색 배경에 꽃 이미지와 함께,
[여성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해! 우리가 함께 만들어 온! 낙태죄 없는 2021년!] 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기자회견 현수막 앞에 네 사람이 나와 서 있다. 한 사람은 판넬을 들고, 한 사람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다.
나머지 두 사람은 9장의 검은 종이를 하나씩 떼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다.
기자회견 마지막 순서로 9가지 버려야 할 것들을 하나씩 떼어 쓰레기봉투에 구겨서 버렸습니다!
마침내 낙태죄 없는 2021년! 이라는 글자가 나타났습니다! 낙태죄 없는 새해가 이제 코앞에 다가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낙태죄가 사라진 이후의 새로운 세계에도 이뤄가야 할 과제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저 종이를 뜯어 버리는 것처럼 빠르고 분명하고 속시원한 변화가 가능하진 않겠지만,(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공동의 지향을 갖고 여럿이 힘내어 나아간다면 우리가 원하는 세상에 언제나, 조금씩,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걸 기억하며
여성을 포함한 모두에게 안전한 의료접근권, 기본적인 시민권이 보장되는 세상을 만드는 길에도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각양각색으로 함께하기를 기대합니다!
낙태죄는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보내버리고, 페미니스트들이 만드는 새로운 세상으로 같이 나아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