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반성폭력[후기] 11월 21일 서울고등법원 재판동행

201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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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의 감형을 위한 재판이 아닌, 피해자를 위한 변론이 철저하게 준비된 재판을 바란다.
 
폭포(백향숙)
 
2014년 11월 21일, 서울 고등법원에서 열린 성폭력 항소심에 동행했다. 두 달 전 서울 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사건이었다. 피고인은 항소이유를 감형요구라고 밝혔다. 판사는 피고인에게 무죄를 주장했던 1심 때와는 달리 자신의 죄를 자백하게 된 이유를 물었다. 피고인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강간으로 인식될 수 있음을 깨닫고 죄를 자백한다고 말할 기회를 얻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강간이지만 여전히 자신은 강간도 폭력도 아니었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상대방의 동의는커녕 일방적, 강압적, 폭력적 성적 행위를 상대방의 입장에서만 폭력으로 인식하다니... 진정으로 피해자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자신의 행동이 폭력이고 범죄임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면 다행이지만 감형을 위한 묘책의 하나일 뿐이고, 이를 재판부가 높이 사게 된 결과 감형이 된다면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국가에서 내리는 유죄를 선고받고서야 상대방에게 강간으로 인식될 수 있음을 생각해보게 되는 가해자, 폭력에 둔감한 사람, 폭력에 허용적인 사회이다.
 
 판사는 피고인에게 전처 사이에 아이의 유무를 물었고, 현재 어머니와 둘이 거주하는 것을 확인했다. 성폭력 사건과는 무관한 질문이다. 아이가 있다면 감형에 고려사항이 될 것인가?
 판사는 피고인이 피해자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 문자나 전화 등의 연락을 한 것이 언제인지를 물으며 결국 피고인이 피해자와 최근에는 연락을 시도하지 않았음을 확인해주었다. 그동안 가해자측의 무리한 합의 종용으로 인해 피해자가 어려움을 겪은 것에 대해 여러차례 재판부에 뜻을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합의시도에 대해 재차 피고인에게 묻는 것은 판사가 가해자를 옹호해주는 듯한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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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는 피해자의 변호사에게 피해자가 병원에서 불임 진단을 받았냐고 물었다. 불임이 되어야 원심의 실형을 확정할 것인지, 불임이 아니니 감형사유가 충분함을 선고하기 위함인지 의심이 가는 질문이었다.
판사는 피고인에게, 피고인이 진정으로 사과하면 피해자가 합의의사 있는 듯 한데 피고인에게 진정한 사과를 했냐고 묻자, 피고인 측 변호사는 진정한 사과란 피해자와 대면하고 해야 하지만 대면사과는 2차 피해를 유발할 수 있기에 그렇게 하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대면해야 진정한 사과라는 논리는 이날 처음 들었다. 재판부 누구도 정정해주지 않았다.
검사는 아무 변론 없이“항소 기각”이 짧은 네 글자만 읊었다.
 이번 재판동행에서 아쉬웠던 점은 역시나 성폭력재판이 피해자의 입장이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에서 진행된다는 점이었다. 가해자의 감형을 위한 재판인 듯 했다.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은 보이지 않고 가해자의 뉘우침과 노력만을 부각시켰다. 가해자의 감형 사유는 드러내고 감형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아무도 변론하지 않았다.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접근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강간임을 인식했고,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방식이라 대면은 물론 전화나 문자도 하지 않았다는 등 피고인의 뉘우침 행위만 부각했을 뿐 검사는 항소기각의 마땅한 이유를 한마디도 변론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재판부가 중시하는 피고인의 뉘우침을 드러내줄 기회를 주었고, 피해자에게 또 다시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가해자와 가해자 측 변호사가 취한 최소한의 예의를 부각시키고, 피해자의 신체에 치명적인 상처는 없음을 확인하였지만 검사나 변호사는 항소기각의 어떤 근거도 변론하지 않은 상황에서 2심 선고결과가 불안한 재판이었다.
 
진정한 사과란 대면해야 한다는 피고인 측 변호사의 변,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강간임을 인식할 수 있었다고만 했을 뿐 자신의 행동이 폭력임을 확실하게 언급하지 않은 점, 사건과 무관한 판사의 질문 등을 바로 잡아 고쳐서 말해줄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장과 함께 모두 일어나서 경의를 표시해야 하는 판사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변호사, 검사들이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원하지만 이렇게 될 수 있기 전까지는 재판동행지원단의 대표가 한 마디 할 수 있는 시간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예민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재판부가 아니라 오히려 현장, 상담소에 계신 동행지원자란 생각을 한다. 재판동행지원단을 모두 참여시키는 재판부가 있는 반면, 동행지원단 중 단 한 명만을 참여시키는 재판부도 있는 현실에 비추어 요원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의 눈높이와 법의식을 재판에 반영하자는 취지로 시행되는 국민참여재판처럼, 잘못된 통념에 젖어들어 폭력현장의 현실에 무지하고 국민의 법감정에 반하는 현재판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폭력 현장에서 상담하고 피해자와 소통해온 현장에 계신 동행지원단의 대표들에게 발언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고, 피해자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재판이라는 것이 가해자의 무죄와 감형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피해자의 피해와 상처와 고통을 인지한 가해자가 이를 반성하고 그에 걸맞는 벌을 구형받고 감수하게 하는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