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태죄’ 위헌 판결을 촉구하는
한국여성민우회 의견서
수 신 : 헌법재판소 귀중
제 목 : 낙태죄의 위헌 여부에 대한 의견서 제출의 건
본 단체는 최근 7년여 간 임신중지 및 낙태죄에 관한 상담 및 집담회, 인터뷰 등을 통해 많은 여성 당사자를 만났습니다.
본 사건 판단에 실제로 임신중지를 고민하거나 행하는 이들이 겪는 사회적 현실이 중대히 고려되기를 기대하며, 다음과 같이 의견을 제출합니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은 많은 경우 이미 성차별적 현실에 기인합니다.
여전히 많은 여성들은 성관계 시 콘돔 사용을 제안하는 것만으로도 '(성)경험 많은 여자'로 의심받으며, 여성의 주체적 성적 행위는 아직도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많은 남성들은 피임을 제안하는 여성에게 “나를 못 믿냐”, “알아서 (사정을 조절)할 수 있다”, “임신 그렇게 쉽게 안 된다”고 말하며 성관계를 이어가길 종용합니다. 부부 사이의 성관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런 경우 여성들은 피임을 재차 요구하거나 성관계를 거부하기 어렵고, 협상의 실패는 흔히 강압적인 성관계로 이어집니다. 심지어 일부 남성들은 결혼 또는 관계 지속을 원치 않는 여성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몰래 콘돔에 구멍을 내거나 성관계 도중 콘돔을 빼서) 임신시켜 버리라”는 말을 주고받고, 실행에 옮기기도 합니다. 몇몇 국가에서는 이를 ‘스텔싱’이라 명명하고 심각한 범죄행위로 처벌합니다. 그런 한편 예상치 못한 임신 사실을 알리면 남성 측이 연락을 두절하고 잠적해버리거나 그저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며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위 서술한 상황은 결코 극단적이거나 예외적인 사례가 아닙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상당히 많은 비(非)계획 임신은 그 자체로 여성 당사자에게 폭력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는 변화시켜나가야 할 현실이지만 뿌리 깊고 전방위적인 성차별적 권력구조 및 문화가 타파되기까지는 대단히 오랜 세월의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국가가 비계획 임신의 결과를 오직 여성이 출산으로써, 출산에 이어질 모든 삶의 변화를 감당하는 것으로써 부담하게끔 강제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모든 임신이 무조건 출산으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국가는 무책임합니다.
설령 평등한 관계에서의 자유로운 성관계이더라도 완벽한 피임은 불가능합니다. 현재 한국의 콘돔 사용률은 10% 정도일 뿐이고 콘돔을 사용할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13.9%, 정확히 사용법을 지켜도 3%의 피임 실패가 발생합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비계획 임신은 어떤 성적 일탈의 결과가 아니라 일상적 성관계에 수반되는 사건으로, 가급적 줄이는 것을 지향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회문화적 조건에 따라 그 비계획 임신을 유지하는 것이 당사자를 포함하여 주변인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선택지가 되는 경우의 수는 너무도 많을 것입니다. 임신한 당사자는 자신의 몸과 삶, 가족관계의 변화, 태어날 아이의 양육 환경 등 다양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숙고합니다. 그 결과 임신을 유지할 경우만이 아니라 임신을 중지할 경우에도 당사자의 몸과 삶에는 이미 상당한 부담이 가해집니다. 어떠한 결정을 내리든 그에 따른 결과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여성 당사자입니다. 개개인이 처한 입장과 판단에 대한 존중 없이 임신중지를 금지법으로 가로막아 비계획 임신이라는 문제 상황이 전부 다 출산으로 귀결되게 하겠다는 것은 바람직한 지향점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금지법은 임신중지를 막지도 못합니다. 이미 국제적 통계를 통해 임신중지율과 금지법 사이에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없음이 밝혀졌습니다. 금지법으로 임신중지를 막고 출산을 유도한다는 것은 여성의 경험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 한 발상입니다. 임신중지는 타자에게 해를 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해지는 행위가 아니며, 처벌을 피하고자 감수하기에는 임신 지속과 출산, 양육은 당사자의 몸과 삶, 일생에 매우 심대하고도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회의 임신중지율을 결정하는 핵심 요인은 피임 실천율과 양육 및 노동 영역의 성평등, 관련 사회적 지원 체계의 수준일 것입니다. 국가는 피임 실천율, 보육공공성 및 성평등을 제고함으로써 모든 국민이 임신‧출산 등 재생산과 관련하여 사회적 제약 없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지할 의무가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및 UN여성차별철폐협약 위원회 등 국제사회는 각국 정부가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권을 포함하여 성과 재생산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장해야 함을 누차 강조해 오고 있습니다. 즉, 낙태죄는 계획하지 않은 임신에 직면한 사회구성원의 선택지를 넓히고 각각의 삶을 지원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오히려 그 의무의 불충분한 이행으로 인해 선택지를 협소하게 하고, 이에 고심하여 임신중지를 결정한 국민을 응징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는 공적 지원의 결여를 가족 내 여성의 헌신과 희생으로 채우고 여성에게만 책임을 지워온 가부장적 한국사회의 오랜 폐해이며 더 이상 묵과해서는 안 될 우리사회의 개혁 과제입니다.
임신중지 금지법은 실효성 없이 심각한 기본권 침해를 초래할 뿐입니다.
현재 낙태죄의 가장 분명한 효력은 여성들을 위험한 상황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임신중지 단속이 강화되었던 2010년 비의료인의 시술 및 의료인 사칭 범죄 등의 문제가 대두됐고, 많은 여성들이 병원을 찾지 못해 수백만원대의 ‘원정 낙태’ 및 위험한 ‘후기 낙태’로 내몰리거나 불법 약물을 구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임신중지를 결정한 여성들은 병원에서 문제적 상황을 목격하거나 심지어 시술 도중 의료 과실 또는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어떠한 구제도 받지 못합니다. A씨는 수술대에 앞 사람이 흘린 피가 흥건한 것을 보았고, 시술 이후 심한 복통이 있어도 병원에 문제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B씨는 병원 과실로 시술이 잘못 되어 같은 시술을 한 번 더 받는 것임에도 똑같은 금액을 다시 현금으로 지불해야 했습니다. 바로 작년의 일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단지 특정한 사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시술 가능 여부를 걱정하며 홀로 병원을 수소문하는 것부터 백만 원에 달하는 비용을 당장 현금으로 마련하는 것, 병원에서 성생활에 대한 훈계나 비난을 듣는 것, 숙련된 의료진을 신뢰하며 발전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것, 의료기록이 남을까 두려워하고 향후 산부인과 이용에 제약을 받는 것, 성분이 의심스러운 불법 약물을 온라인을 통해 구입하는 것, 불법적 임신중지 과정에서 건강을 해치거나 심지어 사망에 이르는 경우까지, 현재 임신중지를 결정한 모든 사회구성원은 안전한 의료에의 접근권이라는 절대적 기본권을 침해받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 언론보도 및 본 단체의 상담창구를 통해서도 확인된 바, 파트너였던 남성이 여성에게 관계 유지나 금전을 요구하며 자신의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임신중지 사실을 고발하겠다는 협박의 도구로 낙태죄를 악용하는 일이 상당수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남성이 어떠한 폭력을 행사하건 여성은 현행법상 범법자라는 지위로 인해 사법 당국의 도움을 요청하기 힘듭니다.
이처럼 낙태죄는 임신중지의 유의미한 억제요인이 되지 못하므로 그 입법목적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단지 임신중지를 했다는 이유로 본인과 주변인들을 위해 책임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회구성원들을 사법적‧의료적 사각지대로 떠밀고 있습니다. 낙태죄로 인해 제한되는 개인의 권리는 단지 특정 상황에서의 자기결정권만이 아닙니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어떠한 상황에서건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지극히 기본적인 권리들이 법에 의해 침해되고 있습니다. 특히 저소득층, 청소년,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일수록 이러한 기본권 침해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임신중지의 예외적 허용 범위 확대는 합당한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강간에 의한 임신으로 이미 현행 모자보건법상 임신중지 허용사유에 해당되는 여성의 경우에도 금지법이 양산하는 기본권 침해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법적 위험부담을 꺼리는 일부 의료진은 강간의 입증을 무리하게 요구하거나 합법적 절차에 따라 시술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낮은 성폭력 유죄 인정율과 피해여성에 대한 낙인 때문에 피해 고발을 원치 않는 여성의 경우 어쩔 수 없이 불법 수술을 수소문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의 모든 고충을 홀로 감당해야 합니다. 실제로 작년 본 단체에서 지원한 성폭력 피해자는 임신 주수가 하루라도 더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음에도 상담원과 함께 방문한 병원에서 합법적 수술을 거부당하고 ‘불법 수술’만 가능하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금지법은 그대로 유지하되 임신중지의 예외적 허용한계만 확대한다면, 명백히 허용사유에 해당함이 바로 입증 가능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처벌 가능성을 우려해 의료진이 합법적 절차를 꺼리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또한 허용한계가 대단히 포괄적으로 확대되며 동시에 보육공공성의 확대와 실질적 성평등의 실현, 피임율의 획기적 증대 등 사회적 지원체계가 언젠가 확립되더라도, 그 허용사유 바깥에서 각자의 사회적 조건에 따라 임신중지를 결정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하는 사회구성원은 여전히 상당수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위에 서술한 심각한 기본권 침해의 문제에 결박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의로운 국가라면 법‧제도에 의해 부당하게 기본권을 침해받는 국민이 있을 경우 그 수가 일정폭 줄어든다 할지라도 이를 사소한 일로 치부해선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제 합리적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임신을 중지하는 당사자도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잠재적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강간 범죄의 피해자인 경우 임신중지를 허용하거나 체외수정시술 시 다량 착상된 배아 일부를 배출시키는 행위를 허용하는 것은 생명이 경시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현실에서 삶을 영위하는 다양한 구성원들(단지 임신한 여성만이 아니라 여성 및 잠재적 생명과 다양하게 연결된 모든 구성원들)의 생명과 삶의 질, 기본권을 지킬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을 찾아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생명의 가치에 대한 추상적 논박보다 더 현실적이고 건설적인 논의를 진전시켜야 할 때입니다. ‘과연 모든 임신은 무조건 출산으로 이어져야 하는가, 또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임신을 중지한 당사자를 형사 처벌하는 방식으로 강제하는 것이 과연 임신중지를 줄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인가. 만약 모든 임신을 무조건 출산으로 연결할 수 없다면 안전한 임신중지가 가능하도록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 임신‧출산‧양육 등 포괄적 재생산에 관한 권리는 어떻게 보장되어야 하는가.’
낙태죄 위헌 판단은 더욱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시대적 요청이며 더 이상 미뤄져선 안 됩니다.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은 이제 출산율이나 국력을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시키고 통제하는 국가가 아니라 모든 구성원의 인권과 삶의 질을 먼저 고민하고 보장하는 국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최근 ‘미투 운동’과 거리로 쏟아져 나온 6만여 명의 여성들의 행동은 그동안 이 사회의 법과 제도, 문화에 여성들의 삶과 경험이 철저히 누락되어왔음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여성 당사자의 증언을 귀담아 들어야 할 때입니다.
지난 7월 7일 광화문 광장 낙태죄 위헌판결 촉구 시위, 5천여 명의 시민 앞에서 발언한 두 여성 당사자의 발언문을 끝으로 본 의견서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 당사자 발언 ①
저는 두 번의 낙태를 경험한 50대 여성입니다. 저의 낙태는 모두 첫 아이를 출산한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첫 번째는 첫아이 출산 후 100일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고, 두 번째는 첫아이 출산 후 1년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임신주기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학교는 출산 후 100일까지는 임신에서 안전하며, 월경 시작일부터 일주일은 안심해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전 그 말을 충실히 믿었지만, 그 가르침은 제 몸과 맞지 않는 엉터리 지식일 뿐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전 둘째아이를 가질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첫 아이 출산 후 저는 밤에도 3시간마다 깨는 아이 때문에 심신이 지쳐갔습니다. 밤에는 잠을 좀 자 보는 것이 소원이 되었고, 아침 7시 반에 출근하면 10시에 퇴근하는 남편을 보며 독박육아를 예감하며 불안에 떨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둘째를 출산한다는 것은 저의 건강을 악화시키고, 행복해야 할 둘째아이의 권리를 방해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부담스러웠던 것은 두 번째 출산휴가로 동료 직원에게 돌아갈 부담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출산휴가 기간이 다가오자 주위 직원들이 저의 업무를 담당할 사람을 둘러싸고 불만스런 의논을 했던 것을 불편하게 지켜보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편도 양가 부모님도 출산은 무리라는 것에 모두 동의했고, 저는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임신을 중단한 여성에게 벌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엉터리 지식을 가르친 학교, 제대로 여성의 임신을 연구하지 않은 국가가 저에게 벌을 주겠다는 것 아닙니까?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믿었을 뿐인 저에게, 육아를 힘들게 한 직장과 사회에 대항할 힘이 없었을 뿐인 저에게, 임신중단 이외의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해 수술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저에게 국가는 이토록 가혹해야 합니까?
여성의 임신중절은 여성에게 가장 치명적입니다.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임신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만든 국가가 오히려 여성을 벌하고 있는 낙태죄는 폐지되어야 마땅합니다.
■ 당사자 발언 ②
저는 2015년 5월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해본 일이었고, 아이아빠와 결혼 또한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에 상의 끝에 낳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이아빠는 임신사실을 알게 된 날 해외 발령으로 출국을 했고, 저는 혼자 산부인과를 다니며 열심히 임신여부와 수술가능 여부를 알아보러 다녔습니다. 산부인과에서 계속해서 듣는 이야기들은 “안 된다.” “보호자와 함께 와야 한다.”였고, 무섭고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겨우 찾은 병원에서는 아이아빠와 연락이 닿으면 수술을 시켜주겠다고 했습니다. 어렵사리 날짜를 잡아 혼자 병원에 갔는데 바로 그 시간에 시차로 인해 아이아빠와 연락이 되지 않았고 결국 수술을 못했습니다. 혼자 돌아오는 길에 ‘왜 나 혼자서 한 임신도 아닌데 혼자서 책임을 떠안아야 하고, 혼자서 떠안았으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서른 두 살의 나이에도 보호자를 찾으며 내 선택대로 할 수 없나’하는 생각에 분하고 억울해서 많이 울었습니다.
동네 병원들에서는 모두 아이아빠 또는 보호자인 남자친구를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법적인 아빠도 아니고 생물학적 아빠도 아닌, 남자친구라도 와야 수술을 시켜준다는 것은 왜였을까요? 자연유산으로 수술한다는 동의서에 싸인을 해야 했고 현금으로 바로 지불해야 하는 160만원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아이아빠는 계속 가고 있다는 이야기만 할 뿐 막상 병원에는 오지 않았고 저는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미 뱃속 아이는 4개월이 되었고, 다른 곳에서는 더 이상 수술도 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아이를 떠맡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고, 처음에 수술해 주지 않은 병원도 원망했고, 아이아빠도 원망했고, 낙태가 죄가 된다는 법 또한 원망하면서 임신기간을 지냈습니다. 남들에겐 축복일 임신과 출산 시기를 저는 원망과 후회로 보내야 했고, 지나고 나니 아이에게 미안한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전 지금 아이를 낳아서 혼자 키우는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이를 짐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아이에게 함부로 대하지도 않습니다. 동시에 제가 아이를 낳지 않았다고 해서 불행하고 힘든 시간을 지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선 이유는 책임도 지지 않는 남성의 허락을 구해야 하고 거짓 동의서를 써가면서 죄지은 듯 하는 낙태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성에게 임신/출산/양육에 대한 권리는 없고 책임만 주어지는 이 사회에 저는 미혼모로서 분노합니다. 임신도 낙태도 출산도 내가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낙태죄는 반드시 폐지되어야 합니다.
이상입니다.
모쪼록 귀 헌법재판소의 현명한 판단으로, 한국사회가 여성들에게도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임을 확인해 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2018. 07. 25
한국여성민우회
‘낙태죄’ 위헌 판결을 촉구하는
한국여성민우회 의견서
수 신 : 헌법재판소 귀중
제 목 : 낙태죄의 위헌 여부에 대한 의견서 제출의 건
본 단체는 최근 7년여 간 임신중지 및 낙태죄에 관한 상담 및 집담회, 인터뷰 등을 통해 많은 여성 당사자를 만났습니다.
본 사건 판단에 실제로 임신중지를 고민하거나 행하는 이들이 겪는 사회적 현실이 중대히 고려되기를 기대하며, 다음과 같이 의견을 제출합니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은 많은 경우 이미 성차별적 현실에 기인합니다.
여전히 많은 여성들은 성관계 시 콘돔 사용을 제안하는 것만으로도 '(성)경험 많은 여자'로 의심받으며, 여성의 주체적 성적 행위는 아직도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많은 남성들은 피임을 제안하는 여성에게 “나를 못 믿냐”, “알아서 (사정을 조절)할 수 있다”, “임신 그렇게 쉽게 안 된다”고 말하며 성관계를 이어가길 종용합니다. 부부 사이의 성관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런 경우 여성들은 피임을 재차 요구하거나 성관계를 거부하기 어렵고, 협상의 실패는 흔히 강압적인 성관계로 이어집니다. 심지어 일부 남성들은 결혼 또는 관계 지속을 원치 않는 여성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몰래 콘돔에 구멍을 내거나 성관계 도중 콘돔을 빼서) 임신시켜 버리라”는 말을 주고받고, 실행에 옮기기도 합니다. 몇몇 국가에서는 이를 ‘스텔싱’이라 명명하고 심각한 범죄행위로 처벌합니다. 그런 한편 예상치 못한 임신 사실을 알리면 남성 측이 연락을 두절하고 잠적해버리거나 그저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며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위 서술한 상황은 결코 극단적이거나 예외적인 사례가 아닙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상당히 많은 비(非)계획 임신은 그 자체로 여성 당사자에게 폭력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는 변화시켜나가야 할 현실이지만 뿌리 깊고 전방위적인 성차별적 권력구조 및 문화가 타파되기까지는 대단히 오랜 세월의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국가가 비계획 임신의 결과를 오직 여성이 출산으로써, 출산에 이어질 모든 삶의 변화를 감당하는 것으로써 부담하게끔 강제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모든 임신이 무조건 출산으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국가는 무책임합니다.
설령 평등한 관계에서의 자유로운 성관계이더라도 완벽한 피임은 불가능합니다. 현재 한국의 콘돔 사용률은 10% 정도일 뿐이고 콘돔을 사용할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13.9%, 정확히 사용법을 지켜도 3%의 피임 실패가 발생합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비계획 임신은 어떤 성적 일탈의 결과가 아니라 일상적 성관계에 수반되는 사건으로, 가급적 줄이는 것을 지향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회문화적 조건에 따라 그 비계획 임신을 유지하는 것이 당사자를 포함하여 주변인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선택지가 되는 경우의 수는 너무도 많을 것입니다. 임신한 당사자는 자신의 몸과 삶, 가족관계의 변화, 태어날 아이의 양육 환경 등 다양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숙고합니다. 그 결과 임신을 유지할 경우만이 아니라 임신을 중지할 경우에도 당사자의 몸과 삶에는 이미 상당한 부담이 가해집니다. 어떠한 결정을 내리든 그에 따른 결과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여성 당사자입니다. 개개인이 처한 입장과 판단에 대한 존중 없이 임신중지를 금지법으로 가로막아 비계획 임신이라는 문제 상황이 전부 다 출산으로 귀결되게 하겠다는 것은 바람직한 지향점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금지법은 임신중지를 막지도 못합니다. 이미 국제적 통계를 통해 임신중지율과 금지법 사이에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없음이 밝혀졌습니다. 금지법으로 임신중지를 막고 출산을 유도한다는 것은 여성의 경험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 한 발상입니다. 임신중지는 타자에게 해를 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해지는 행위가 아니며, 처벌을 피하고자 감수하기에는 임신 지속과 출산, 양육은 당사자의 몸과 삶, 일생에 매우 심대하고도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회의 임신중지율을 결정하는 핵심 요인은 피임 실천율과 양육 및 노동 영역의 성평등, 관련 사회적 지원 체계의 수준일 것입니다. 국가는 피임 실천율, 보육공공성 및 성평등을 제고함으로써 모든 국민이 임신‧출산 등 재생산과 관련하여 사회적 제약 없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지할 의무가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및 UN여성차별철폐협약 위원회 등 국제사회는 각국 정부가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권을 포함하여 성과 재생산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장해야 함을 누차 강조해 오고 있습니다. 즉, 낙태죄는 계획하지 않은 임신에 직면한 사회구성원의 선택지를 넓히고 각각의 삶을 지원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오히려 그 의무의 불충분한 이행으로 인해 선택지를 협소하게 하고, 이에 고심하여 임신중지를 결정한 국민을 응징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는 공적 지원의 결여를 가족 내 여성의 헌신과 희생으로 채우고 여성에게만 책임을 지워온 가부장적 한국사회의 오랜 폐해이며 더 이상 묵과해서는 안 될 우리사회의 개혁 과제입니다.
임신중지 금지법은 실효성 없이 심각한 기본권 침해를 초래할 뿐입니다.
현재 낙태죄의 가장 분명한 효력은 여성들을 위험한 상황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임신중지 단속이 강화되었던 2010년 비의료인의 시술 및 의료인 사칭 범죄 등의 문제가 대두됐고, 많은 여성들이 병원을 찾지 못해 수백만원대의 ‘원정 낙태’ 및 위험한 ‘후기 낙태’로 내몰리거나 불법 약물을 구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임신중지를 결정한 여성들은 병원에서 문제적 상황을 목격하거나 심지어 시술 도중 의료 과실 또는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어떠한 구제도 받지 못합니다. A씨는 수술대에 앞 사람이 흘린 피가 흥건한 것을 보았고, 시술 이후 심한 복통이 있어도 병원에 문제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B씨는 병원 과실로 시술이 잘못 되어 같은 시술을 한 번 더 받는 것임에도 똑같은 금액을 다시 현금으로 지불해야 했습니다. 바로 작년의 일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단지 특정한 사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시술 가능 여부를 걱정하며 홀로 병원을 수소문하는 것부터 백만 원에 달하는 비용을 당장 현금으로 마련하는 것, 병원에서 성생활에 대한 훈계나 비난을 듣는 것, 숙련된 의료진을 신뢰하며 발전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것, 의료기록이 남을까 두려워하고 향후 산부인과 이용에 제약을 받는 것, 성분이 의심스러운 불법 약물을 온라인을 통해 구입하는 것, 불법적 임신중지 과정에서 건강을 해치거나 심지어 사망에 이르는 경우까지, 현재 임신중지를 결정한 모든 사회구성원은 안전한 의료에의 접근권이라는 절대적 기본권을 침해받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 언론보도 및 본 단체의 상담창구를 통해서도 확인된 바, 파트너였던 남성이 여성에게 관계 유지나 금전을 요구하며 자신의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임신중지 사실을 고발하겠다는 협박의 도구로 낙태죄를 악용하는 일이 상당수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남성이 어떠한 폭력을 행사하건 여성은 현행법상 범법자라는 지위로 인해 사법 당국의 도움을 요청하기 힘듭니다.
이처럼 낙태죄는 임신중지의 유의미한 억제요인이 되지 못하므로 그 입법목적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단지 임신중지를 했다는 이유로 본인과 주변인들을 위해 책임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회구성원들을 사법적‧의료적 사각지대로 떠밀고 있습니다. 낙태죄로 인해 제한되는 개인의 권리는 단지 특정 상황에서의 자기결정권만이 아닙니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어떠한 상황에서건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지극히 기본적인 권리들이 법에 의해 침해되고 있습니다. 특히 저소득층, 청소년,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일수록 이러한 기본권 침해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임신중지의 예외적 허용 범위 확대는 합당한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강간에 의한 임신으로 이미 현행 모자보건법상 임신중지 허용사유에 해당되는 여성의 경우에도 금지법이 양산하는 기본권 침해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법적 위험부담을 꺼리는 일부 의료진은 강간의 입증을 무리하게 요구하거나 합법적 절차에 따라 시술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낮은 성폭력 유죄 인정율과 피해여성에 대한 낙인 때문에 피해 고발을 원치 않는 여성의 경우 어쩔 수 없이 불법 수술을 수소문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의 모든 고충을 홀로 감당해야 합니다. 실제로 작년 본 단체에서 지원한 성폭력 피해자는 임신 주수가 하루라도 더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음에도 상담원과 함께 방문한 병원에서 합법적 수술을 거부당하고 ‘불법 수술’만 가능하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금지법은 그대로 유지하되 임신중지의 예외적 허용한계만 확대한다면, 명백히 허용사유에 해당함이 바로 입증 가능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처벌 가능성을 우려해 의료진이 합법적 절차를 꺼리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또한 허용한계가 대단히 포괄적으로 확대되며 동시에 보육공공성의 확대와 실질적 성평등의 실현, 피임율의 획기적 증대 등 사회적 지원체계가 언젠가 확립되더라도, 그 허용사유 바깥에서 각자의 사회적 조건에 따라 임신중지를 결정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하는 사회구성원은 여전히 상당수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위에 서술한 심각한 기본권 침해의 문제에 결박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의로운 국가라면 법‧제도에 의해 부당하게 기본권을 침해받는 국민이 있을 경우 그 수가 일정폭 줄어든다 할지라도 이를 사소한 일로 치부해선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제 합리적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임신을 중지하는 당사자도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잠재적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강간 범죄의 피해자인 경우 임신중지를 허용하거나 체외수정시술 시 다량 착상된 배아 일부를 배출시키는 행위를 허용하는 것은 생명이 경시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현실에서 삶을 영위하는 다양한 구성원들(단지 임신한 여성만이 아니라 여성 및 잠재적 생명과 다양하게 연결된 모든 구성원들)의 생명과 삶의 질, 기본권을 지킬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을 찾아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생명의 가치에 대한 추상적 논박보다 더 현실적이고 건설적인 논의를 진전시켜야 할 때입니다. ‘과연 모든 임신은 무조건 출산으로 이어져야 하는가, 또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임신을 중지한 당사자를 형사 처벌하는 방식으로 강제하는 것이 과연 임신중지를 줄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인가. 만약 모든 임신을 무조건 출산으로 연결할 수 없다면 안전한 임신중지가 가능하도록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 임신‧출산‧양육 등 포괄적 재생산에 관한 권리는 어떻게 보장되어야 하는가.’
낙태죄 위헌 판단은 더욱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시대적 요청이며 더 이상 미뤄져선 안 됩니다.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은 이제 출산율이나 국력을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시키고 통제하는 국가가 아니라 모든 구성원의 인권과 삶의 질을 먼저 고민하고 보장하는 국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최근 ‘미투 운동’과 거리로 쏟아져 나온 6만여 명의 여성들의 행동은 그동안 이 사회의 법과 제도, 문화에 여성들의 삶과 경험이 철저히 누락되어왔음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여성 당사자의 증언을 귀담아 들어야 할 때입니다.
지난 7월 7일 광화문 광장 낙태죄 위헌판결 촉구 시위, 5천여 명의 시민 앞에서 발언한 두 여성 당사자의 발언문을 끝으로 본 의견서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 당사자 발언 ①
저는 두 번의 낙태를 경험한 50대 여성입니다. 저의 낙태는 모두 첫 아이를 출산한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첫 번째는 첫아이 출산 후 100일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고, 두 번째는 첫아이 출산 후 1년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임신주기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학교는 출산 후 100일까지는 임신에서 안전하며, 월경 시작일부터 일주일은 안심해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전 그 말을 충실히 믿었지만, 그 가르침은 제 몸과 맞지 않는 엉터리 지식일 뿐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전 둘째아이를 가질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첫 아이 출산 후 저는 밤에도 3시간마다 깨는 아이 때문에 심신이 지쳐갔습니다. 밤에는 잠을 좀 자 보는 것이 소원이 되었고, 아침 7시 반에 출근하면 10시에 퇴근하는 남편을 보며 독박육아를 예감하며 불안에 떨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둘째를 출산한다는 것은 저의 건강을 악화시키고, 행복해야 할 둘째아이의 권리를 방해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부담스러웠던 것은 두 번째 출산휴가로 동료 직원에게 돌아갈 부담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출산휴가 기간이 다가오자 주위 직원들이 저의 업무를 담당할 사람을 둘러싸고 불만스런 의논을 했던 것을 불편하게 지켜보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편도 양가 부모님도 출산은 무리라는 것에 모두 동의했고, 저는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임신을 중단한 여성에게 벌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엉터리 지식을 가르친 학교, 제대로 여성의 임신을 연구하지 않은 국가가 저에게 벌을 주겠다는 것 아닙니까?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믿었을 뿐인 저에게, 육아를 힘들게 한 직장과 사회에 대항할 힘이 없었을 뿐인 저에게, 임신중단 이외의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해 수술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저에게 국가는 이토록 가혹해야 합니까?
여성의 임신중절은 여성에게 가장 치명적입니다.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임신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만든 국가가 오히려 여성을 벌하고 있는 낙태죄는 폐지되어야 마땅합니다.
■ 당사자 발언 ②
저는 2015년 5월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해본 일이었고, 아이아빠와 결혼 또한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에 상의 끝에 낳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이아빠는 임신사실을 알게 된 날 해외 발령으로 출국을 했고, 저는 혼자 산부인과를 다니며 열심히 임신여부와 수술가능 여부를 알아보러 다녔습니다. 산부인과에서 계속해서 듣는 이야기들은 “안 된다.” “보호자와 함께 와야 한다.”였고, 무섭고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겨우 찾은 병원에서는 아이아빠와 연락이 닿으면 수술을 시켜주겠다고 했습니다. 어렵사리 날짜를 잡아 혼자 병원에 갔는데 바로 그 시간에 시차로 인해 아이아빠와 연락이 되지 않았고 결국 수술을 못했습니다. 혼자 돌아오는 길에 ‘왜 나 혼자서 한 임신도 아닌데 혼자서 책임을 떠안아야 하고, 혼자서 떠안았으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서른 두 살의 나이에도 보호자를 찾으며 내 선택대로 할 수 없나’하는 생각에 분하고 억울해서 많이 울었습니다.
동네 병원들에서는 모두 아이아빠 또는 보호자인 남자친구를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법적인 아빠도 아니고 생물학적 아빠도 아닌, 남자친구라도 와야 수술을 시켜준다는 것은 왜였을까요? 자연유산으로 수술한다는 동의서에 싸인을 해야 했고 현금으로 바로 지불해야 하는 160만원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아이아빠는 계속 가고 있다는 이야기만 할 뿐 막상 병원에는 오지 않았고 저는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미 뱃속 아이는 4개월이 되었고, 다른 곳에서는 더 이상 수술도 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아이를 떠맡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고, 처음에 수술해 주지 않은 병원도 원망했고, 아이아빠도 원망했고, 낙태가 죄가 된다는 법 또한 원망하면서 임신기간을 지냈습니다. 남들에겐 축복일 임신과 출산 시기를 저는 원망과 후회로 보내야 했고, 지나고 나니 아이에게 미안한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전 지금 아이를 낳아서 혼자 키우는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이를 짐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아이에게 함부로 대하지도 않습니다. 동시에 제가 아이를 낳지 않았다고 해서 불행하고 힘든 시간을 지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선 이유는 책임도 지지 않는 남성의 허락을 구해야 하고 거짓 동의서를 써가면서 죄지은 듯 하는 낙태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성에게 임신/출산/양육에 대한 권리는 없고 책임만 주어지는 이 사회에 저는 미혼모로서 분노합니다. 임신도 낙태도 출산도 내가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낙태죄는 반드시 폐지되어야 합니다.
이상입니다.
모쪼록 귀 헌법재판소의 현명한 판단으로, 한국사회가 여성들에게도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임을 확인해 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2018. 07. 25
한국여성민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