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논평

기타계속되는 <더러운 잠> 논란에 부쳐, 성평등없이 민주주의는 불가능합니다.

201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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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더러운 잠> 논란에 부쳐, 성평등없이 민주주의는 불가능합니다.


<더러운 잠>이 문제적인 이유는 풍자를 위해 풍자 대상의 소수자성을 부각시키는 방식을 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풍자에 속시원함을, 때론 신선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풍자를 통해 풍자 대상의 권위가 깎아내려지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잠>은 풍자 대상이 비판받아야 할 핵심과 무관하게 그를 여성, 특히 ‘수동적인 자세로 벌거벗은 여성’의 모습으로 재현함으로써 그 소수자성을 강조하여 권위를 탈각시킵니다. 남성 권력자를 나체로 묘사하여 풍자하는 것과 여성 권력자를 같은 방식으로 풍자하는 것은 다른 맥락으로 읽힙니다. 여성의 몸이 너무나 쉽게 ‘성적 대상’으로 소비되는 사회, 많은 여성들이 원치 않는 신체 노출에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사회라는 조건을 누구도 자의적으로 삭제할 순 없습니다. 시각예술 창작자라면 이러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이미지가 파생시킬 효과에 대한 고민을 회피해선 안 됩니다.


<더러운 잠>을 비판하는 것은 그 작품이 나체를 묘사한 성적인 그림이어서도 아니고 여성에게 수치심을 주기 때문도 아닙니다. 여성의 나체가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변치 않는 의미 같은 건 없습니다. 길거리에서 남자가 웃통을 벗는 것과 여자가 웃통을 벗는 것이 각각 다른 해석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때 여성의 몸이 발생시키는 효과는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여성들은 ‘슬럿워크’ 시위를 통해 여성의 몸을 성적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수치심을 부과하는 문화에 반대를 표하며 몸에 대한 자부심과 주체성을 드러내는 노출로써 벗은 몸의 의미가 달라지는 순간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시위 사진을 보도하며 ‘짧은 치마 아찔’ 이라는 제목을 붙인다면 그 의미는 또 다르게 전달됩니다. 유구한 성차별적 사회에서 여성의 몸 이미지를 둘러싸고 수많은 의미 투쟁이 있어왔습니다.


핵심은 ‘나체’가 아닙니다. 이는 ‘00년’, ‘아줌마’, ‘저잣거리 아녀자’ 등의 말들과 같은 선상의 문제입니다. 풍자 대상이 여성이라는 소수자성을 부각하여 비하하는 것은 그것이 풍자라는 이유로 사회적 지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는 어떤 대통령이 다리를 전다는, 고졸이라는, 못 생겼다는, 흑인이라는 점을 빌어 풍자하는 것과도 같은 문제입니다. 아무리 강하고 나쁜 권력자를 향한 것이라 해도, 누군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배제를 받는 사회에서 그가 흑인임을 풍자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비판받아야 합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에서 여성성을 비하와 모욕의 코드로 활용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별을 두 가지로만 구분하여 하나의 성을 우위에 두는 성차별적 문화는 일상 곳곳에 스며 있기 때문에 이를 변화시키려면 수많은 토론과 노력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더러운 잠>의 문제는 특별히 새삼스럽거나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에 대한 페미니즘의 문제제기는 더 나은 사회- 성평등한 민주주의 사회를 위한 오랜 노력의 일환입니다. 혹자들은 이러한 문제제기를 두고 성평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는 ‘그래서 너희는 어느 쪽이냐’고 묻습니다. 이를 틈타 국정농단의 또 다른 공모자인 새누리당은 정쟁상대를 징계하고 공격할 수단으로 여성인권을 도구화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해당의원의 가족을 여성혐오적으로 재현하는 등 심각한 자기모순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지켜보며, ‘어느 편’이건 간에 성평등을 포함한 민주주의를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운 의구심이 들 지경입니다.


혐오는 풍자가 아닙니다. 성평등 없이 민주주의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지체장애인 흉내, 검게 칠한 얼굴, 서툰 한국말 억양, 가슴을 부풀린 여장 등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소수자성 비하가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던 사회에서, 그 소수자들이 자기 목소리로 인권과 존중을 요구하는 사회로 점차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몇 달간 우리는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배웠습니다. 촛불시위를 통해 우리가 배운 민주주의는 시민불복종과 국민주권, 표현의 자유, 그리고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에 대한 존중과 평등이라는 가치를 포함합니다. 민주주의는 광장의 마이크를 통해 소수자를 비하하는 발언에 다수 시민이 문제제기하던, 정권 비판의 통쾌함을 이유로 밀쳐져서는 안 되는 가치에 대한 합의를 만들며 현장의 공기가 변화해가던 그 과정 속에 있습니다. 국정을 농단한 현 정권의 퇴진은 반드시 이뤄야 할 과제입니다. 또한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더 나은 민주주의 사회는 정권 교체만으로 이룩되지 않습니다. 혐오와 차별 없는 사회를 위한 성찰은 잠시라도 멈춰선 안됩니다. 페미니스트 정치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고민과 실천을 앞으로도 끊임없이 해나갈 것입니다. 그 길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게 될 것임을 믿습니다.


2017. 2. 3. 한국여성민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