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새/성평등미디어팀

구글폼에 신청자가 쌓일 때 행복합니다

나는 범죄 관련 콘텐츠를 즐겨 본다. 깜짝 깜짝 놀라게 하는 공포영화나 호러영화는 무섭다고 싫어하면서도, 실제 사건을 다룬 강력범죄 이야기는 무서워도 좋아했다. 아니, 무서워서 좋아했나? 범죄 다큐를 보다가 범죄 영화를 보다가 지치면 범죄 드라마를 봤다.

국내외 OTT 플랫폼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범죄물에 절여진 뇌(나), 폭력장면에 절여진 뇌(나), 도파민에 절여진 뇌(나)를 타깃으로 한 자극적인 콘텐츠가 급증했다. 소수의 웰메이드 작품들이 입소문을 타고 흥행했으며, 도파민에 지친 뇌를 달래주기 위한 소소한 힐링 콘텐츠들도 잊지 않고 등장했다. 먹고, 사랑하고, 죽이고, 때려 부수는 콘텐츠가 너무 많이 늘어나 이걸 다 보다가는 내 인생을 살아갈 시간이 모자랄 것 같을 정도였다(TV를 끄진 못함).

전문가들은 폭력성과 선정성을 지적했다. 일반적인 TV프로그램 방송국이나 영화제작사는 심의위원회나 시청자위원회를 통해 (미약하게나마) 제재를 받기도 하지만 OTT 플랫폼은 ‘방송사’에 해당하지 않아 관련법을 비켜갔기 때문에, OTT는 ‘심의에 걸리지 않는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없었다. 약자 혐오를 부추기건, 권력의 비리를 파헤치건, 페미니즘 콘텐츠이거나 반페미니즘 콘텐츠이거나 상관없이 그저 잘 먹히는 이야기, 글로벌하게 정주행 될 이야기만 만들면 되니까.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작품이 잔뜩 등장했다.

(이미지: 한국이 제작해 글로벌 흥행에 성공한 2021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빚에 쫓기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한다. 인간성과 도덕성이 시험대에 오른다.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이미지: 2023년 한국의 지상파 방송국 제작진이 제작해 OTT 플랫폼을 통해 공개한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성폭력 재현의 윤리와 OTT저널리즘의 불/가능성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민우회가 주최한 라이블 후기는 여기 링크🔗 에서 볼 수 있다.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한편 OTT발 콘텐츠의 흥행에 대해 지상파 방송국과 제작사들은 지상파에서 경쟁력 있는 작품을 만들기 어려운 이유로 ‘자유로운 창작을 가로 막는 각종 규제책’을 탓했다. 지상파는 안 되고, OTT는 잘 되는 이유가, 좀더 윤리적이고 성평등하고 책임감 있게 보도하고 제작하라고 만들어 둔 가이드라인과 규제 때문이라고...?

첫 번째 모니터링: 폭력장면 💥

규제가 없는 ‘자유로운’ OTT 플랫폼이 만들어내는 ‘자유로운’ 콘텐츠란 어떤 것일까. 모니터링 데이터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올해 우리가 주목한 것은 폭력성. 2023년~2024년 상반기 사이에 공개된 ‘OTT 오리지널’ ‘한국 제작’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폭력 장면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보기로 했다.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티빙, 웨이브, 쿠팡플레이에서 공개된 작품 목록을 만들었다. 총 43개 작품, 402개 에피소드가 나왔다. (왓챠는 이 시기 사이에 공개한 작품이 없었고, 애플TV는 이용객 수가 적어 제외시켰다.) 여기서 등장하는 폭력 장면들을 전수 분석할 것이다.

폭력장면 모니터링은 처음이라 질문을 짜기가 어려웠다. 폭력이 등장하는 시간, 어떤 종류의 폭력이 등장하는지, 어떤 사람(성별, 나이, 직업, 직급, 위계)이 가해하고 어떤 사람이 피해자로 등장하는가. 폭력이 일어나는 시간은 언제이고 장소는 어디인가. 이 폭력을 목격한 제3자가 있는가, 그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드라마 속 가해자가 이 폭력을 행사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폭력의 연출에서 폭력을 과장하거나, 오락화하거나, 사소화하는 연출 요소가 있었는가, 이 폭력 장면은 이 드라마 속 이야기 전개에서 얼마나 적절하게 배치되었나. 극중 폭력 장면을 하나하나 파헤치는 형사가 된 마음으로 긴긴 모니터링 질문지를 작성했다. (너무 긴 질문지 때문에 나중에 너무 고생했다는 것은 비밀...) 시민모니터링단과 함께 402개 회차를 전수 분석할 수 있었다. (모니터링단 활동 후기글 링크🔗)

시민모니터링단이 기록한 OTT 드라마 속 폭력장면은 2천 장면이 넘었다. 잔인한 폭력장면들은 주로 찌르고 자르고 때리고 죽이는 단순한 폭력 장면들이 많았는데, 사유가 개입될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체로 납작하게 느껴졌다. 사소하게 스쳐가는 일상 장면 안에서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짧은 장면들이나, 소수자를 비하하는 욕설과 대사들은 불편했고, 여전히 폭력적인 언행을 로맨스로 그리고 있는 장면들을 볼 때는 한숨이 나왔다. 과도한 조명과 분장으로 가해자를 지나치게 괴물처럼 그려내거나, 신체 훼손 장면이나 피범벅이 된 장면을 굳이 끼워 넣거나 나열한 장면들, 주인공의 비극과 갈등을 고조시키기 위한 잔인한 폭력 장면 연출 속에서 고민되는 것도 많았다. 어디까지가 오락물로서 적정한 연출이고, 어디서부터 과도한 폭력일까, 이렇게 많은 폭력 장면에 노출된 사람들이 실제 폭력에 대한 인식과는 어떤 영향이 있을까, 미디어에서 ‘더 보여주어야 할 폭력’이란 것도 있을까.

두 번째 모니터링: 50+ 중고령캐릭터 👵👴

규제 없이 ‘자유로운’ 창작 환경에서 OTT가 얼마나 풍성하게 다양한 인물, 이야기,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넷플릭스가 한국에 들어온 초창기,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이라는 미드의 견인력을 기억하는지? 여자교도소 수감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드라마 속에는 ‘퀴어(queer)’한 존재들이 잔뜩 등장한다. 한국의 지상파 방송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만날 수 없었던 다종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교차하는 이야기에 반가웠다. 내가 그토록 목말라하던 이야기가 여기에 있구나, 드디어 내가 보고 싶어 하던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구나.

섹스, 장애, 퀴어, 10대, 노년, 우정, 질병, 범죄, 인종, 종교가 이렇게 복잡하게 교차하는 작품이 한국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을까? 폭력 장면에 덧붙여, OTT발 한국 드라마 속에서 50세 이상의 중고령 캐릭터가 어떻게 그려지는지 함께 모니터링 해보기로 했다.

비중이 적은 단역이나 엑스트라는 빼고, 50+ 중고령캐릭터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작품도 제외하고, 같은 기간 OTT 오리지널 한국 드라마 21편 속에 등장하는 318명의 중고령캐릭터를 성별 분석했다(남성캐릭터 217명, 여성캐릭터 101명). 50대 이상의 남성캐릭터의 연령, 직업, 극중 비중과 역할, 외형과 재현은 여성 캐릭터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다층적인 서사를 가진 입체적인 중고령 여성 캐릭터가 얼마나 등장하는지 시민들과 함께 모니터링하는 작업이었다.

시민모니터링단에는 나이듦에 대해 고민하던 찰나에 미디어 속 중고령 재현에 관심이 가 참여하게 되었다는 분들이 꽤 계셨다. 미디어의 중심이 여전히 청년층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지닌 내 또래의 캐릭터’를 찾아보기가 참 어려웠다는 말, 더 다채로운 중고령 캐릭터를 만나고 싶다는 바람에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두구두구두구, 모니터링 결과를 공개합니다! 🎉

글을 쓰는 지금 현재(10월 10일), 10월과 11월, OTT 드라마 속 <폭력 장면>과 <중고령캐릭터> 모니터링 분석 내용을 발표하는 행사 두 가지를 앞두고 있다. 범죄/폭력 콘텐츠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싶은 페미니스트, 미디어 속 다양한 소수자 재현에 대해 관심 있는 시민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두 행사 모두에서 만나요, 제발(!)

하나. 10월 24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에는 모니터링 결과발표회 (<납작하고 단선적인>)를 합정역 근처 언제라도여행 카페에서 연다. 연구자 정사강 선생님(이화여자대학교)의 모니터링 결과 분석과 시민모니터링단 참여자의 소회도 들을 수 있다. (관련 글 링크🔗)

둘. 11월 8일 금요일 저녁 7시 30분에는 미디어 다양성 토크쇼 <보고싶다, 보고싶지 않다>를 망원역 창비서교빌딩 지하2층에서 열 예정이다. 폭력, 중고령캐릭터 뿐만 아니라 미디어 속 퀴어, 이주여성, ‘고아’ 재현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다양한 발표자들과 함께 ‘더 보고싶은 것과 더는 보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 이야기 나눠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