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기억을 가진 광장을 돌아보며🌿
희동/광주여성민우회 머릿속이 너무 시끄러운 사람
4월 4일 낮, 광주여성민우회 활동가들은 깃발을 들고 광장으로 나갔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광장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방송으로 송출되는 판결문 한 줄 한 줄이 들릴 때마다 활동가들끼리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풀리길 반복했어요. 11시 22분, 주문이 읽히고 우리가 승리했다는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그날 제 점심 메뉴는 잔치국수였는데요. 고명으로 올라간 ‘파’랑 소‘면’을 같이 들면서 "이것 좀 보세요, 파면이에요ㅎㅎ" 같은 농담을 주고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시시한 농담을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안도했던 날이었어요.

(▲ 이미지: 여러 개의 깃발이 깃대 끝을 모으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 깃발 중에는 광주여성민우회의 붉은 깃발도 섞여 있다.)
이곳은 518 민주화운동 최후의 항쟁지 옛 전남도청입니다. 🔊
광주의 광장은 5·18 민주광장입니다. 이곳은 5·18 민주항쟁의 최후 항쟁지인 구 전남도청의 앞에 있는 광장이에요. 광주의 탄핵 집회는 늘 5·18 영령에 대한 묵념과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시작합니다. 매일 오후 5시 18분이면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오는 시계탑, 1980년 5월에도 2025년 4월에도 자리를 지킨 광장의 분수대. 45년 넘게 그 광장을 내려다봐 온 전일빌딩까지. 이 광장의 어느 것 하나 그날의 오월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떤 집회에서든 늘 그랬지만, 이번 탄핵 정국에서 5·18 민주광장이 갖는 의미는 광주 사람들에게 더 각별하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과장이라 하기 어려울 만큼요.
광주, 광장 🌟
서울과 비교하면, 광주의 광장은 분명 작습니다. 광장의 크기도, 모이는 인원도 차이가 날 수 밖에 없겠죠. 그러니 시각적인 압도감은 덜할 수 있겠지만, 저는 그 광장을 채운 사람들이 가진 마음의 ‘밀도’는 결코 작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건 어느 곳의 광장이든 똑같았을거예요. 어떤 사람은 광주의 광장이라고 하면 당연히 처음부터 완벽한 광장이었을거라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광주라고 처음부터 무조건 평등하고 안전한 광장은 아니었습니다. 장애혐오, 여성혐오 발언이 여과되지 않은 채로 나오는 일이 종종 있었고, 그럴 때마다 매주 광장에 다녀온 활동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곤 했어요. 모든 참여자의 발언을 통제하거나 검열할 수는 없지만 이 광장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안내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행사 시작 전 평등 선언문을 읽으면 좋겠다거나 하는 제안을 드리기도 했고요. 얼마 지나지 않아 광주 집회에선 식전에 평등 선언문 이미지가 전광판에 띄워져있기 시작했고, 집회를 여는 멘트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기 시작했어요.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장소인만큼 완전히 통제되고 안전한 집회는 있을 수 없겠죠. 하지만 제한된 범위 안에서 광주의 비상행동 담당자분들은 광장을 더 안전하고 더 평등하게 만들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해주셨습니다. 그 노력이 느껴져서 참여자로서도 든든했고요.
개인적으로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늘 광장을 지켜준 광주의 개인기수 분들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광주여성민우회 활동가들은 매주 광장에 나갈 활동가를 정해 돌아가면서 광장에 민우회 깃발을 올렸지만(그리고 사실 이것도 꽤 고된 일이었지만요ㅎㅎㅠㅠ), 개인기수 분들은 다들 학업이 끝나고, 회사가 끝나고 개인시간을 내서 와주셨어요. 단체 활동가인 제 입장에선 ‘활동가들만 광장에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이 있었습니다. 시민들이 관심을 잃은 건 아닐까, 점점 참여가 줄어드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요. 하지만 광장에 갈 때마다 그곳을 지키고 있는 개인 깃발들을 보면 그런 불안함은 많이 줄어들고, 이 광장에서 우리가 연대하고 있다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현수막 퍼포먼스 🚩
많은 분들의 주목을 받았던 전일빌딩의 현수막 교체 퍼포먼스는 사실 저희도 너무 궁금했습니다. 전일빌딩에 걸려있던 [광주가 왔다! 파면이 온다!] 플랜카드가 아래로 내려가고 그 뒤에 있던 [지켰다 민주주의! 고맙다 광주정신!] 플랜카드가 공개되는 이벤트였는데요. 다른 활동가를 통해 물어보니, 그 현수막은 2월 15일부터 거기 걸려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극우세력이 금남로까지 와서 반핵 반대 집회를 벌였던 날입니다. 광주 시민사회는 그들에 맞서 항의의 뜻을 담아 이 현수막을 기획했고, 원래는 5·18기록관에 설치하려다가 전일빌딩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해요. 여러 사정으로 2월 15일에는 공개되지 못했지만, 결국 4월 4일. 탄핵 판결이 난 날에 맞춰 공개된 것이죠. 생각해보면, 그 현수막도 우리처럼 탄핵의 날을 한참 동안 기다려온 거겠죠? 
(▲ 이미지: 5·18 민주광장의 사진. 전일빌딩에 '광주가 왔다! 파면이 온다!'라고 쓰인 큰 현수막이 걸려 있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니까. 🔗
계엄령 선포를 보고 활동가 톡방이 시끄러웠던 3일 밤, 밤잠 설친 채 광장으로 출근했다가 대표님과 방송 인터뷰까지 하게 된 4일 아침, 활동가들끼리 돌아가며 매주 토요일 광주집회에 나갔던 날들, 탄핵소추안 가결 선포를 보고 겨우 산 하나를 넘었다고 숨 돌리던 때, 음악에 맞춰 일사분란하게 흔들리던 깃발들, 승리보고대회 때 밤하늘에서 춤추던 비눗방울과 음악... 아득하게 멀지만 어제처럼 가까운 기억들이에요. 광장을 지키러 나갔던 순간이나, 그곳에서 본 수많은 사람들을 곱씹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장소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연결될 수 있었을까?'
지난 12월 3일부터 4월 4일에 닿기까지, 정말 힘든 기간이었습니다. 그래도 광장에는 더 나은 광장을 함께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내가 광장을 지키지 못할 때에도 자리를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서로 잘 몰라도 깃발을 환대 해주는 시민들이 있었어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이 광장 안에서 함께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지키고 또 서로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광주의 역사를 알고, 광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 있었고 그 사람들과 내가 연결되어 ‘우리’가 된다는 감각이 있었기 때문에 광주의 광장은 저에게 참 각별하고 의미 있는 곳으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가지 작은 기대를 갖고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작으면서도 거대한 광장에서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세계들을 만날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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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동/광주여성민우회
머릿속이 너무 시끄러운 사람
4월 4일 낮, 광주여성민우회 활동가들은 깃발을 들고 광장으로 나갔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광장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방송으로 송출되는 판결문 한 줄 한 줄이 들릴 때마다 활동가들끼리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풀리길 반복했어요. 11시 22분, 주문이 읽히고 우리가 승리했다는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그날 제 점심 메뉴는 잔치국수였는데요. 고명으로 올라간 ‘파’랑 소‘면’을 같이 들면서 "이것 좀 보세요, 파면이에요ㅎㅎ" 같은 농담을 주고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시시한 농담을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안도했던 날이었어요.
(▲ 이미지: 여러 개의 깃발이 깃대 끝을 모으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 깃발 중에는 광주여성민우회의 붉은 깃발도 섞여 있다.)
이곳은 518 민주화운동 최후의 항쟁지 옛 전남도청입니다. 🔊
광주의 광장은 5·18 민주광장입니다. 이곳은 5·18 민주항쟁의 최후 항쟁지인 구 전남도청의 앞에 있는 광장이에요. 광주의 탄핵 집회는 늘 5·18 영령에 대한 묵념과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시작합니다. 매일 오후 5시 18분이면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오는 시계탑, 1980년 5월에도 2025년 4월에도 자리를 지킨 광장의 분수대. 45년 넘게 그 광장을 내려다봐 온 전일빌딩까지. 이 광장의 어느 것 하나 그날의 오월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떤 집회에서든 늘 그랬지만, 이번 탄핵 정국에서 5·18 민주광장이 갖는 의미는 광주 사람들에게 더 각별하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과장이라 하기 어려울 만큼요.
광주, 광장 🌟
서울과 비교하면, 광주의 광장은 분명 작습니다. 광장의 크기도, 모이는 인원도 차이가 날 수 밖에 없겠죠. 그러니 시각적인 압도감은 덜할 수 있겠지만, 저는 그 광장을 채운 사람들이 가진 마음의 ‘밀도’는 결코 작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건 어느 곳의 광장이든 똑같았을거예요.
어떤 사람은 광주의 광장이라고 하면 당연히 처음부터 완벽한 광장이었을거라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광주라고 처음부터 무조건 평등하고 안전한 광장은 아니었습니다. 장애혐오, 여성혐오 발언이 여과되지 않은 채로 나오는 일이 종종 있었고, 그럴 때마다 매주 광장에 다녀온 활동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곤 했어요. 모든 참여자의 발언을 통제하거나 검열할 수는 없지만 이 광장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안내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행사 시작 전 평등 선언문을 읽으면 좋겠다거나 하는 제안을 드리기도 했고요. 얼마 지나지 않아 광주 집회에선 식전에 평등 선언문 이미지가 전광판에 띄워져있기 시작했고, 집회를 여는 멘트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기 시작했어요.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장소인만큼 완전히 통제되고 안전한 집회는 있을 수 없겠죠. 하지만 제한된 범위 안에서 광주의 비상행동 담당자분들은 광장을 더 안전하고 더 평등하게 만들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해주셨습니다. 그 노력이 느껴져서 참여자로서도 든든했고요.
개인적으로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늘 광장을 지켜준 광주의 개인기수 분들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광주여성민우회 활동가들은 매주 광장에 나갈 활동가를 정해 돌아가면서 광장에 민우회 깃발을 올렸지만(그리고 사실 이것도 꽤 고된 일이었지만요ㅎㅎㅠㅠ), 개인기수 분들은 다들 학업이 끝나고, 회사가 끝나고 개인시간을 내서 와주셨어요. 단체 활동가인 제 입장에선 ‘활동가들만 광장에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이 있었습니다. 시민들이 관심을 잃은 건 아닐까, 점점 참여가 줄어드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요. 하지만 광장에 갈 때마다 그곳을 지키고 있는 개인 깃발들을 보면 그런 불안함은 많이 줄어들고, 이 광장에서 우리가 연대하고 있다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현수막 퍼포먼스 🚩
많은 분들의 주목을 받았던 전일빌딩의 현수막 교체 퍼포먼스는 사실 저희도 너무 궁금했습니다. 전일빌딩에 걸려있던 [광주가 왔다! 파면이 온다!] 플랜카드가 아래로 내려가고 그 뒤에 있던 [지켰다 민주주의! 고맙다 광주정신!] 플랜카드가 공개되는 이벤트였는데요. 다른 활동가를 통해 물어보니, 그 현수막은 2월 15일부터 거기 걸려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극우세력이 금남로까지 와서 반핵 반대 집회를 벌였던 날입니다. 광주 시민사회는 그들에 맞서 항의의 뜻을 담아 이 현수막을 기획했고, 원래는 5·18기록관에 설치하려다가 전일빌딩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해요. 여러 사정으로 2월 15일에는 공개되지 못했지만, 결국 4월 4일. 탄핵 판결이 난 날에 맞춰 공개된 것이죠. 생각해보면, 그 현수막도 우리처럼 탄핵의 날을 한참 동안 기다려온 거겠죠?
(▲ 이미지: 5·18 민주광장의 사진. 전일빌딩에 '광주가 왔다! 파면이 온다!'라고 쓰인 큰 현수막이 걸려 있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니까. 🔗
계엄령 선포를 보고 활동가 톡방이 시끄러웠던 3일 밤, 밤잠 설친 채 광장으로 출근했다가 대표님과 방송 인터뷰까지 하게 된 4일 아침, 활동가들끼리 돌아가며 매주 토요일 광주집회에 나갔던 날들, 탄핵소추안 가결 선포를 보고 겨우 산 하나를 넘었다고 숨 돌리던 때, 음악에 맞춰 일사분란하게 흔들리던 깃발들, 승리보고대회 때 밤하늘에서 춤추던 비눗방울과 음악... 아득하게 멀지만 어제처럼 가까운 기억들이에요. 광장을 지키러 나갔던 순간이나, 그곳에서 본 수많은 사람들을 곱씹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장소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연결될 수 있었을까?'
지난 12월 3일부터 4월 4일에 닿기까지, 정말 힘든 기간이었습니다. 그래도 광장에는 더 나은 광장을 함께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내가 광장을 지키지 못할 때에도 자리를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서로 잘 몰라도 깃발을 환대 해주는 시민들이 있었어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이 광장 안에서 함께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지키고 또 서로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광주의 역사를 알고, 광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 있었고 그 사람들과 내가 연결되어 ‘우리’가 된다는 감각이 있었기 때문에 광주의 광장은 저에게 참 각별하고 의미 있는 곳으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가지 작은 기대를 갖고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작으면서도 거대한 광장에서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세계들을 만날 수 있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