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무게를 함께 감당할 수 있다면 회귀는 필요 없어!😌
구구🕊️ 소설, 만화, 케이팝 등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는 거라면 장르불문 퍼먹는 오타쿠 활동가. 올해 2월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윤석열 퇴진 집회가 한창이던 1월의 어느 날, 광장에 나가는 일이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그 시기에 중학교 동창을 우연히 마주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20여년만에 친구를 마주친 것도 신기했는데, 친구 얼굴이 그대로라 더 놀랐다.
친구는 웹소설이 좋아 공무원에서 웹소설 PD로 전직했다고 말했다. 중학생 때 친구와 팬픽1)을 써서 돌려 읽던 게 떠올랐다. 역시 사람은 생긴대로 살아야 한다며 한참을 낄낄댔다. 친구는 너야말로 무얼 하고 있냐고 물었다. 나는 책이 좋아서 독서 모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 일을 하다 보니 책보다 사람을 더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어서 시민단체에 활동가로 지원해 보려는 참이라고 대꾸했다. 친구는 중1 때도 집회에 나가더니 결국 활동가가 되는구나 하고 놀리듯 말했다. 우리는 또 한 번 중학교에 다니던 그 시절처럼 얼굴을 마주보고 크게 웃었다. 이후 친구와 신나게 웹소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문득 웹소설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친구가 그리운 줄도 모르고 살아오다 마주치고 나서야 그리워했던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웹소설에 대한 그리움도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하니 짙어졌다.

(▲ 이미지: 친구를 마주쳤던 1월, 한강진에서 찍은 사진.)
1) 팬 픽션Fan Fiction의 줄임말로 특정 연예인 및 작품의 팬이 해당 대상을 소재 삼아 만든 2차 창작 소설을 일컫는 말
픽션이 말을 걸어올 때 📲❗
그때부터 광장에 혼자 나가는 날에는 웹소설을 읽었다.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기엔 부담이 있어서 전에 재밌게 읽었던 〈전지적 독자 시점〉(이하 〈전독시〉)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평범한 회사원이던 주인공 ‘김독자’가 자신이 읽던 소설이 현실이 된 상황에서 원하는 결말을 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의 작품에서 내가 가장 되고 싶다고 여겼던 인물은 바로 ‘유중혁’이었다. 그는 수차례 회귀2)를 거듭한 회귀자로, 무려 1800번이 넘는 회귀를 감행한 인물이다. 〈전독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마치 회귀자의 회한을 이해하기라도 하듯 그에게 과몰입했다. 그가 살고 있는 세계를 굴러가게 만드는 시스템은 누군가를 희생시켰고, 심지어는 희생을 유희 삼았다. 이에 분노한 그는 모두를 살리겠다는 대의를 품은 채 모든 기억을 안고 특정 시점으로 돌아가기를 택했다. 모두가 나를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하는 과거로 돌아간다는 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일일까. 나는 그의 선택을 지켜보며 몇 번이나 눈물을 삼켰다. 2) 주인공이 죽음 또는 특정 사건을 계기로 현재의 기억을 가진 채 과거로 돌아가는 것
회귀의 문턱에서 현실을 보다 🎗️
타고난 공상가인 나는 그가 회귀를 감행할 때마다 내가 회귀를 감당할 깜냥을 가진 인물인지, 회귀를 한다면 어느 시점으로 가고 싶은지 상상했다. 그때마다 내 마음은 자꾸만 세월호 참사가 있기 몇 달전 어느 날로 향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기로 결정한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결정을 번복할 수 있다면 어떨까? 감히 그 자리에 닿을 수 없단 걸 알면서도 회귀를 상상할 때면 마음은 늘 그때로 돌아갔다. 그러나 유중혁이 그토록 수없이 회귀한 이유는 회귀가 유토피아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회귀라는 상상의 세계에서조차 무력한 인간에 대한 서러움이 몰려왔다. 상상 속에서도 모두를 살릴 수 없다면, 나는 이 참담한 현실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지? 마음 한 구석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 이미지: 2016년 세월호 유가족이 운영하는 심야식당의 자원봉사자로 함께 했었다.)
회귀가 불가능한 현실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 답을 몰랐고 답을 구하기 위해, 모두와 답을 찾아 함께 헤매기 위해 활동가가 됐다. 그때부턴 광장에도 더욱 열심히 나갔다. 모두가 소망하는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 나는 회귀보다 더 어렵고, 어쩌면 더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시간을 돌이키고 싶다는 욕망은 여전했다. 후회, 자조와 같은 감정이 내가 딛고 선 땅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무게를 시시각각 감당하면서 불가능한 세상을 ‘가능’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 수없이 많은 밑밥을 까는 일뿐이었다.
실패를 함께 감당할 수 있다면 🫂
실패한 즉시 회귀를 선택하며 회귀 우울증에 시달리는 유중혁에게 〈전독시〉의 주인공 김독자는 대의를 위해 회귀를 거듭하는 일 말고,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시간을 되돌려서 실패를 없던 셈 치는 게 아니라 실패를 끌어안은 채 다음에 올 실패를 좀 더 작게 만드는 것. 그게 김독자가 줄곧 시도하는 일이었다. 또, 김독자는 실패는 함께 할 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되니까, 혼자 외로워 말고 그것을 함께 감당하자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잃어버릴 수도,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귀’라는 되돌림이 가능하지 않은 세계에서 우리는 지금 주어진 상황과 사람들을 함께 부둥켜 안는 일이 필요한 지도 모른다.
집회 기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자주 무력감에 시달렸다. 그래도 계속해서 광장에 나갈 수 있었던 건 광장에서 함께 실패를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사람들은 핫팩을 건네고 방석과 간식을 내어주며 서로를 보살폈다. 그곳은 후회, 자조만이 자리한 공간이 아니라 아픔을 함께 감당하며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자리였다. 나는 그들 덕에 오래 싸울 수 있었고,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을, 모두를 살리고 싶어졌다. 내가 활동가가 된 까닭도 이런 바람과 무관하지 않다.
 (▲ 이미지: 추운 날씨에도 많은 사람들이 실패를 실패로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 국회 앞에 모였다.)
혼자서 감당하지 않아도 괜찮아 😌
김독자가 유중혁에게 보여줬듯, 나 역시 매 순간 크고 작은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하고 싶다. 회귀라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일 말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내가 만나는 사람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하고 싶다. 함께한 순간을 기억하고, 모두를 짓누르는 실패의 무게를 같이 감당하고 싶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제안하고 싶다. 삶의 무게를 당신 혼자 감당하지 말라고, ‘함께’의 힘을 믿어보라고. 함께하는 순간마다 대의보다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실패’이더라도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 이미지: 광장에서 한 시민 분이 활동가들에게 건넨 감자튀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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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
소설, 만화, 케이팝 등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는 거라면 장르불문 퍼먹는 오타쿠 활동가.
올해 2월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윤석열 퇴진 집회가 한창이던 1월의 어느 날, 광장에 나가는 일이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그 시기에 중학교 동창을 우연히 마주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20여년만에 친구를 마주친 것도 신기했는데, 친구 얼굴이 그대로라 더 놀랐다.
친구는 웹소설이 좋아 공무원에서 웹소설 PD로 전직했다고 말했다. 중학생 때 친구와 팬픽1)을 써서 돌려 읽던 게 떠올랐다. 역시 사람은 생긴대로 살아야 한다며 한참을 낄낄댔다. 친구는 너야말로 무얼 하고 있냐고 물었다. 나는 책이 좋아서 독서 모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 일을 하다 보니 책보다 사람을 더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어서 시민단체에 활동가로 지원해 보려는 참이라고 대꾸했다. 친구는 중1 때도 집회에 나가더니 결국 활동가가 되는구나 하고 놀리듯 말했다. 우리는 또 한 번 중학교에 다니던 그 시절처럼 얼굴을 마주보고 크게 웃었다. 이후 친구와 신나게 웹소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문득 웹소설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친구가 그리운 줄도 모르고 살아오다 마주치고 나서야 그리워했던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웹소설에 대한 그리움도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하니 짙어졌다.
(▲ 이미지: 친구를 마주쳤던 1월, 한강진에서 찍은 사진.)
1) 팬 픽션Fan Fiction의 줄임말로 특정 연예인 및 작품의 팬이 해당 대상을 소재 삼아 만든 2차 창작 소설을 일컫는 말
픽션이 말을 걸어올 때 📲❗
그때부터 광장에 혼자 나가는 날에는 웹소설을 읽었다.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기엔 부담이 있어서 전에 재밌게 읽었던 〈전지적 독자 시점〉(이하 〈전독시〉)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평범한 회사원이던 주인공 ‘김독자’가 자신이 읽던 소설이 현실이 된 상황에서 원하는 결말을 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의 작품에서 내가 가장 되고 싶다고 여겼던 인물은 바로 ‘유중혁’이었다. 그는 수차례 회귀2)를 거듭한 회귀자로, 무려 1800번이 넘는 회귀를 감행한 인물이다. 〈전독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마치 회귀자의 회한을 이해하기라도 하듯 그에게 과몰입했다. 그가 살고 있는 세계를 굴러가게 만드는 시스템은 누군가를 희생시켰고, 심지어는 희생을 유희 삼았다. 이에 분노한 그는 모두를 살리겠다는 대의를 품은 채 모든 기억을 안고 특정 시점으로 돌아가기를 택했다. 모두가 나를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하는 과거로 돌아간다는 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일일까. 나는 그의 선택을 지켜보며 몇 번이나 눈물을 삼켰다.
2) 주인공이 죽음 또는 특정 사건을 계기로 현재의 기억을 가진 채 과거로 돌아가는 것
회귀의 문턱에서 현실을 보다 🎗️
타고난 공상가인 나는 그가 회귀를 감행할 때마다 내가 회귀를 감당할 깜냥을 가진 인물인지, 회귀를 한다면 어느 시점으로 가고 싶은지 상상했다. 그때마다 내 마음은 자꾸만 세월호 참사가 있기 몇 달전 어느 날로 향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기로 결정한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결정을 번복할 수 있다면 어떨까? 감히 그 자리에 닿을 수 없단 걸 알면서도 회귀를 상상할 때면 마음은 늘 그때로 돌아갔다. 그러나 유중혁이 그토록 수없이 회귀한 이유는 회귀가 유토피아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회귀라는 상상의 세계에서조차 무력한 인간에 대한 서러움이 몰려왔다. 상상 속에서도 모두를 살릴 수 없다면, 나는 이 참담한 현실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지? 마음 한 구석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 이미지: 2016년 세월호 유가족이 운영하는 심야식당의 자원봉사자로 함께 했었다.)
회귀가 불가능한 현실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 답을 몰랐고 답을 구하기 위해, 모두와 답을 찾아 함께 헤매기 위해 활동가가 됐다. 그때부턴 광장에도 더욱 열심히 나갔다. 모두가 소망하는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 나는 회귀보다 더 어렵고, 어쩌면 더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시간을 돌이키고 싶다는 욕망은 여전했다. 후회, 자조와 같은 감정이 내가 딛고 선 땅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무게를 시시각각 감당하면서 불가능한 세상을 ‘가능’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 수없이 많은 밑밥을 까는 일뿐이었다.
실패를 함께 감당할 수 있다면 🫂
실패한 즉시 회귀를 선택하며 회귀 우울증에 시달리는 유중혁에게 〈전독시〉의 주인공 김독자는 대의를 위해 회귀를 거듭하는 일 말고,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시간을 되돌려서 실패를 없던 셈 치는 게 아니라 실패를 끌어안은 채 다음에 올 실패를 좀 더 작게 만드는 것. 그게 김독자가 줄곧 시도하는 일이었다. 또, 김독자는 실패는 함께 할 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되니까, 혼자 외로워 말고 그것을 함께 감당하자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잃어버릴 수도,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귀’라는 되돌림이 가능하지 않은 세계에서 우리는 지금 주어진 상황과 사람들을 함께 부둥켜 안는 일이 필요한 지도 모른다.
집회 기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자주 무력감에 시달렸다. 그래도 계속해서 광장에 나갈 수 있었던 건 광장에서 함께 실패를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사람들은 핫팩을 건네고 방석과 간식을 내어주며 서로를 보살폈다. 그곳은 후회, 자조만이 자리한 공간이 아니라 아픔을 함께 감당하며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자리였다. 나는 그들 덕에 오래 싸울 수 있었고,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을, 모두를 살리고 싶어졌다. 내가 활동가가 된 까닭도 이런 바람과 무관하지 않다.
(▲ 이미지: 추운 날씨에도 많은 사람들이 실패를 실패로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 국회 앞에 모였다.)
혼자서 감당하지 않아도 괜찮아 😌
김독자가 유중혁에게 보여줬듯, 나 역시 매 순간 크고 작은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하고 싶다. 회귀라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일 말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내가 만나는 사람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하고 싶다. 함께한 순간을 기억하고, 모두를 짓누르는 실패의 무게를 같이 감당하고 싶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제안하고 싶다. 삶의 무게를 당신 혼자 감당하지 말라고, ‘함께’의 힘을 믿어보라고. 함께하는 순간마다 대의보다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실패’이더라도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 이미지: 광장에서 한 시민 분이 활동가들에게 건넨 감자튀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