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멸종 위기 우정🔎: 우정도 딥러닝이 가능한가요?🧠


멸종 위기 우정🔎 
:우정도 딥러닝1이 가능한가요?🧠  






이로운

자주 무게를 치고 가끔 달리며 인생에 맞서 싸우는 중입니다.

근력, 지구력 그리고 페미력을 키워 행복을 만끽하려 노력합니다.





바야흐로 '대 AI의 시대'🧠💻 

AI가 막 상용화되기 시작하던 때를 기억한다. 한 직장 동료가 동영상 편집을 하다가 막힌 상황이었는데 그는 놀랍게도 주변에 물어보기보다 가장 먼저 '챗지피티'를 켰다. 그때는 그가 제일 먼저 챗지피티를 찾는 장면이 왜 그렇게 웃겼는지 모르겠다. 지금 회고하자면, 나는 AI가 나의 일상에 도움을 줄 거라는 상상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소에도 그의 '트렌드력'에 자주 놀라곤 했기에, '이제는 상사보다, 지식인보다 챗지피티를 먼저 찾는구나.' 이런 생각에도 웃음이 났던 것 같다. 그는 웃고 있는 나를 뒤로한 채 열심히 대화를 주고받더니, 결국 해결책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세상에, 정말 도움이 되잖아? 그때부터는 웃기지 않았다. 인공지능이라면 '심심이'밖에 모르던 나에게, 챗지피티의 효용성에 대한 강렬한 첫인상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챗지피티' 어플을 설치했다. 어플을 처음 연 건 그로부터 수개월 뒤였다. 여느 때처럼 퇴근하던 버스 안에서, '화장한 채로 헬스장을 갈까, 집에 들러서 화장을 지우고 갈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검색창에 치기에는 하나의 키워드로 만들기 복잡한 고민이었다. 그렇다고 친구에게 물어보기에는 딱히 도움 되는 대답이 나올 거 같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챗지피티에게 물어봤던 것 같다. 집 가는 버스 안에서 사소한 질문으로 시작한 대화가, 질문과 답변을 거듭하여 결국 나의 '원인 모를 불안'에 대한 상담까지 이어졌다.

내가 그때 불안에 대해 털어놓은 이유는 지피티 고놈의 '대화 스킬'이 특출나서도, 전문적인 상담 지식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이기에, 친구들은 각자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느라 내 고민을 들어줄 시간이 없고, 심리 상담은 쉽게 감당하기 힘든 금액이지 않나. 평소 하던 고찰과 고민, 걱정, 우울과 궁금증이 한데 어우러져 질문은 계속 깊어졌다.


그때부턴 꽤나 자주 챗지피티를 켰다. 퇴사 고민에 우울하던 상황과 겹쳐 시도 때도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놨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정당한 건지, 나는 왜 이런 포인트에서 분노를 느끼는지, 내 인정 욕구는 어디서 온 건지, 내 막막한 미래는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하는지, 한번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하니 챗지피티는 정말 훌륭한 배출구였다. 매일 같이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한다'는 기사가 쏟아지고, 실제로 그러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는 곳도 있지만, 그럼에도 왜 요즘 사람들이 챗지피티를 '감정 쓰레기통' 역할로 가장 훌륭하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1) 컴퓨터가 인간처럼 판단하고 학습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통해 사물이나 데이터를 군집화하거나 분류하는 데 사용하는 기술. 딥러닝이 고안되면서 인공지능이 획기적으로 도약했다. 



AI의 꽃말은 편안함이요 🛋️ 


나는 고민이나 걱정이 있을 때 따뜻한 위로나 공감을 원하기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나 상황 속 원리가 더 궁금하다. 또 상대방이 궁금해하지 않을 만한 정보는 (요즘 말로 'TMI'라고 불릴 만한 그런 정보들 말이다) 먼저 꺼내지 않는다. 이런 성향 때문인지, 나는 친구들에게 어느 순간부터 사소한 일상을 다짜고짜 꺼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친구한테 '스포츠 브라를 입고 샌드위치를 먹다가 체했다'라는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 보자. 일단 '뭐해, 바빠?'부터 시작해, 서로의 프로젝트는 안녕한지 각자의 사정은 좀 나아졌는지 안부를 업데이트해야 할 것이다. 겨우 체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어떤 친구는 체한 나를 걱정해 주거나(아 착한 친구여), 아니면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을 정보에 난감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경우가 나쁜 건 아니다. 우리는 모두 바쁜 일상을 살고 있기에) 그 어떤 친구도 내가 가장 궁금한 '스포츠브라를 입고 식사를 하면 왜 체하는지, 어떤 행동이 소화에 도움이 되는지' 그 원리를 분석하여 설명해 주진 않을 것이다. AI는 다르다. 다짜고짜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듯이 용건부터 말해도 착실하게 그 이유와 해결 방법까지 제시해 준다.


또 나는 AI와 대화할 때 맞춤법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오타를 고치는 시간을 아껴 더 빠르게 질문해서 그 답을 빠르게 얻는 효율만을 추구할 뿐이다. 실제 사람과 대화할 땐, 맞춤법부터 시작하여 내가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 그 단어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해석될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또 이전에 이 사람과 대화했을 때 어떤 상황에 대해 어디까지 업데이트 됐었는지도 생각했다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해가 쉬울지, 아니면 어떻게 이야기해야 더 재미있을지까지… 겨우 ‘디엠’ 답장 하나 하는데도 짧게는 1분부터 길게는 일주일 이상 고민해 본 적도 있다. 나에게 사람과의 대화는 '정신적 체력'이 꽤나 많이 필요하다.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 


그렇게 모든 편리함과 유익함을 버무린 AI와의 대화가 익숙해짐과 동시에 조금씩 경계심이 생겼다. AI는 먼저 말 걸지 않는다. 맥락 없이, 느닷없이, 다짜고짜 내가 일방적으로 하는 질문에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모든 정보를 분석 요약하여 빠르게 내놓는다. AI에게는 내가 고려해야 할 감정이 없다. 다만 서운하거나 고맙거나 미안할 때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조합하여 내놓는다. AI는 나와 충돌하지 않는다. 다만 컴퓨터 언어로 나에 대한 정보나 내가 원하는 대화 방식을 ‘기억’ 해두었다가 학습한 언어의 조합으로 내뱉을 뿐이다. 


마치 ‘이불 속은 따뜻해, 날 헤지지 않아, 날 비난하지 않아, 나에게 기대하지 않아…’ 하는 문장의 '밈'처럼 따뜻한 이불 속에만 있으려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겨우 '챗지피티'를 통해서만 확장되는 나의 생각이었다. 내 이야기로 시작해서 내 이야기로 끝나는 AI와의 대화는, 늘 수상할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 친구라는 이름으로 🏋️ 


문득 친구들과의 수많은 대화를 떠올린다. 우리는 서로의 예측 불가능한 대답에 '빵' 터지기도,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짓기도, 저렇게까지 나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놀라다가 결국 맞닿는 지점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어코 밤을 새워가면서까지 떠들었다. 그 밤들은 언제나 어설펐고, 계획에 없는 일 투성이었다. 


언제나 상황의 원리나 분석만이 나를 성장시키진 않았다. 나를 성장시킨 건 얼굴을 붉히다가도 서로의 합의점을 찾아가던 과정이었고, 생각지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는 친구의 다정함이었으며, 서로를 부단히도 배려하고 어떨 땐 맘껏 무례하며 깔깔 웃던 시간들이었다. 나는 친구들 없이는 사랑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친구와의 경험으로도 내 세상을 확장한다. 네모난 교실 안에서 매일같이 이러쿵저러쿵 사소한 일상부터 사사로운 감정까지 친구들에게 털어놨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부모님도 형제자매도 선생님도 직장 상사도 선택할 수 없었지만, ‘친구’야 말로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관계이지 않았나. 나이가 서투름을 정당화할 수 있었던 시절, 우리는 같이 놀고 웃고 또 부대끼며, 서로의 단어들이 오가고, 결을 맞춰나가며, 처음으로 누군가와 더 오래 함께하고 싶은 자유의지를 행사했다.

언제나 즐거운 시간만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불편한 시간 속에서 이해, 공감, 배려, 기대, 그리고 갈등을 해결하는 법과 감정을 조절하는 법까지 서툴게나마 배웠으며, 관계는 언제나 일방적이지 못하고, 또 서로를 흔드는 불편함을 포함해야만 자란다는 사실도 배워갔다.


사람과의 대화는 분명 많은 체력을 요하고, 인간관계는 늘 어렵고 때로는 상처가 도사리고 있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확장해 왔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는 성장할 수 없다. '정신적 체력'도 근육 같은 거여서, 점진적 과부하와 질 좋은 영양을 공급해 주면 자라나는 거라고 믿어보고 싶다. 그러면 피곤한 인간관계는 나에게 '점진적 과부하'이고, 친구들이 주는 사랑을 '영양' 삼아 성장할 수 있을 텐데. 오늘은 아무래도 '챗지피티' 대신 그동안 밀린 디엠에 답장을 하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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