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다이어리📧]제가 사장이라니까요? : 여성 담당자는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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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욕심 많은 여성입니다.

사실, 일은 광고대행사가 더 적성에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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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좌) 현재 운영중인 밸브 사무실 1층에서 가장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 공간의 모습. 단조 부속류, 밸브 등이 적재되어 있는 모습. (우) 그리고 사진 1-2는 2025년 모 지자체 홍보영상 촬영 작업 당시 찍은 모니터링 화면 사진.)


현재 저는 두 개의 명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밸브 유통업체의 대표, 다른 하나는 광고대행사 대표라는 명함입니다. 밸브 유통이라는 묵직한 제조업 기반의 유통산업과, 트렌디함을 좇는 영상 광고업. 전혀 다른 두 세계를 오가며 일하고 있지만, 오늘은 그중에서도 철 냄새 물씬 풍기는 밸브 유통업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어쩌다 이런 일을 하시게 되셨어요?💥


밸브라고 하면 주로 가스 밸브나 수도 밸브를 떠올리실 테지만, 제가 다루는 것은 발전소나 플랜트 쪽에 납품되는 특수밸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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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밸브가 설치된 현장 사진)

 

일상적으로 접하는 제품도 아닌 데다, 사진으로 풍기는 업무 환경이 보여주듯이 저의 거래처 관계자는 대부분 남성입니다. 그리고 철 덩어리라 무게도 상당하죠. (1박스에 약 30kg 넘는 것들도 있어요.) 한 번씩 용차(다마스, 라보 등 화물을 싣는 용달 차량을 일컫는 업계 표현입니다.)로 물건을 실을 때면, 기사님조차 무겁다며 고개를 젓는 물건들을 저는 번쩍 들곤 합니다. 사실 무거운 물건을 드는 것은 힘보다는 요령이거든요. (웃음)

 

거친 현장을 휘젓고 다니는 저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으레 이런 질문을 하곤 합니다.

“아유, 여성분이 어쩌다 이런 일을(?) 하시게 됐어요?”

제가 광고대행사 명함을 내밀면서는 단 한 번도 듣지 않았던 말들이에요.

(대행사는 또 그곳만의 성차별이 존재하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뤄두겠습니다.)

 


“제가 사장인데요?” - 여성이 남초 직군에서 일한다는 것은💁‍♀️


낯설다는 것은 궁금증을 유발하고, 또 그 궁금증은 종종 무례함으로 둔갑해 제게 날아옵니다.

 

  • “이 회사는 품위유지비도 안 주나 봐?” _ 맨얼굴로 일하고 있으니 들은 말
  • “남편은 뭐 하시고?” _ '제가 사장인데요.'라고 하니 들은 말
  • “그럼 남편 아침밥은 누가 차려줘요?” _ 물건 팔아달라고 온 거래처에서 안부를 물으며 내게 한 말
  • “여자분이 대단하시네” _ 각종 전문적인 응대를 하면 매번 듣는 말
  • “술은 여자가 따라야 제맛이지” _ 거래처 회식 자리에서 들은 말

(발언을 정리하다 보니, 딱히 궁금하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 같네요.)

 

제가 일을 하면서 들었던 수많은 성차별과 성희롱을 글로 적는다면 아마 페이지 수가 부족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 위의 말보다 저를 더 힘들게 하는 말은 따로 있는데요, 바로 이 말입니다.

 

“아니, 사장님(담당자) 바꿔 달라고 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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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책상에 앉은 고양이가 "제가 사장입니다만.."이라고 말하고 있다. AI 생성 이미지로 필자가 키우던 고양이 린 사진을 사무실 배경에 합성하였다.)

 

“제가 사장(담당자)입니다. 저한테 말씀하세요.”

저의 대답 끝엔 으레 정적이 흐릅니다. 여성이 거래처의 최고 결정권자이자, 기술 전문가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당황하며 사과하는 이들은 그나마 양반입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정말 담당자가 맞는지 ‘테스트’를 시작하시거든요. 현장에서도 잘 쓰지 않는 어려운 전문 용어를 굳이 섞어가며, 기술적인 질문을 던지는 식이죠.

그럴 때면 저 역시 피하지 않고, 상대방이 더 모를 법한 깊이 있는 전문 용어를 써가며 대답을 해 줍니다. (상대방이 제가 쓰는 단어를 잘 못 알아듣는다면 그 짜릿함은 배가 되지요.)

대화가 끝난 후 돌아오는 대답은 어김이 없습니다. “와! 여자 분이 정말 잘 아시네요!”

 


그럼에도 우리는🚶


여성이 남초 직군에서 일한다는 것은 이런 말들이 일상이며, 종래에는 익숙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여성이 어떠한 전문성(특히 그 전문성이 남성의 것이라고 여겨지는)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불필요한 검증의 시간을 가져야만 합니다. 단지, 나의 성별이 남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정말 피곤한 일이에요, 내 일하기도 바쁜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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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고양이 두 마리가 눈에 불을 켜고 "다시 한 번 말해보시지!"라고 말하고 있다. AI 생성 이미지로 필자가 키우던 고양이 쿠마와 린이 10여 년 전, 아직 팔팔할 때 냉장고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사진이다. 불필요한 질문을 받고 열받은 필자의 심정을 대변한 표정인 것 같아 말풍선을 합성하였다.)

 

우리는 근로 현장 곳곳에 뿌리내린 성차별과 싸우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의심받고, 때로는 불필요한 증명을 요구받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위축되지 않고 우리의 일을 해낼 것이고, 그들이 던지는 얄팍한 시험쯤은 가볍게 뛰어넘어, 기어코 우리를 증명해 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젠가는 이러한 증명이 필요가 없는. 그저 내 자리에서 나의 성별과는 상관없이 오롯이 나의 실력만으로 평가받는. 그런 날이 곧 오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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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그럼에도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쿠마와 린)

 

조금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현장이 예전(10년 전..?)보단 많이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사장인데요?”라고 말하는 횟수가 예전보다는 많이 줄어들었달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나를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수많은 ‘담당자’들에게 뜨거운 연대의 인사를 보냅니다. 괜찮아요, 바뀔 거야! 그리고 바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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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2014년의 어느 날, 사랑하는 고양이 린이)


PS. 20년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지켜봐 주던, 올해 1월 고양이 별로 떠난- 나의 사랑하는 턱시도 고양이 린이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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