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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12월호[민우돋보기 II] 이효재! 그에 관한 오색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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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0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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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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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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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148
민우돋보기
ꡐ이효재ꡑ 그에 관한 오색스토리
여성학에 눈뜨게 해 준 이효재 선생 리영희 (한양대 대우교수)
80년대 나는 이 선생이 사람을 시켜서 보내온 몇 차례의 돈봉투를 전해 받았다.
알고 본 즉, 이효재 선생이 중심이 된 독지가들이 대학에서 추방된 교수들에게 생활비를 조직적으로
보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봉투 속의 돈보다, 그 인정에 감격했다.
내가 이 선생을 알게 된 것은 1970년대 초반 나의 첫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가 나온 무렵 이화여대 학생들 서너 명이(전 국회위원 이미경, 여성개발원장 장하진, 당시 한국교육연구소 원장 오성숙 등) 찾아오면서부터이다. 당시 엄격한 폐문시간을 넘기고 토론하던 이들이 소명을 요청한 교수가 이효재선생이었다.
그 후 공개 세미나에 초대되어 이 교수가 맡고 있는 학문적 역할과 학생들의 존경을 직접 목격하면서 이 선생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것으로 기억한다. 그 엄혹했던 유신체제 하에서 ꡐ민주사회와 언론의 자유ꡑ 같은 주제의 공개강의는 자칫 지도교수에게 위험이 닥침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서대문 네거리의 허름한 빌딩 2층에 있던 이 교수의 한국여성학연구소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여성학이나 여성문제 등에 소홀했던 나는 비로소 여성문제를 인식하고 학문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교수의 대학 연구실은 당시 사회 문제에 깊숙이 관여한 많은 대학생들의 토론장이자 정보교환장이었다. 또 당국의 추적을 받는 학생들의 은신처이기도 한 것을 알았다. 박정희 시대보다도 오히려 훨씬 숨막히는 80년대 나는 이선생이 사람을 시켜서 보내온 몇 차례의 돈봉투를 전해 받았다. 알고 본 즉, 이효재 선생이 중심이 된 독지가들이 대학에서 추방된 교수들에게 생활비를 조직적으로 보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봉투 속의 돈보다, 그 인정에 감격했다. 그 같은 지원은 당시 군부독재정권의 눈으로 보면 ꡐ범법 행위ꡑ였던 것이다.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채, 어려운 일을 해 준 분들 가운데 이효재 교수와 그의 친구인 이화여대 박순정 교수 그리고 윤정옥 교수 등을 그 후 자주 만나 뵙게 되었다.
이 선생은 여러 대학의 교수들을 가끔 이화여대 뒤 대신동 언덕에 있는 자택으로 초대해서 우리들의 어려움을 위로해 주었었다. 바깥세상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긴장 속에 살아야 했던 우리들에게 그 저녁과 밤만은 마치 온갖 걱정에서 해방된 기분이었다. 이런 정성 어린 환대는 이 선생이 그 후에 몇 군데 댁을 옮기면서도 변함없이 계속되었고 ꡒ위험분자ꡓ로 인정되던 우리 해직교수들에게 베풀어 준 그 정성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그 외에도 계속되는 친분을 통해 나는 이효재 선생의 인간적인 무게와, 주변 사람들을 따뜻하게 배려하고 보살피는 마음의 넓이와 깊이를 확인했다.
이런 분을 30년을 두고 알고, 사귀었다는 것을 나는 무한한 행복으로 여기고 있다.
이효재 선생님다운 겸손함을 본받아야 할 때 김수희 (민우회 회원)
인간에 대한 사랑, 특히 여성을 비롯한 소외된 자들에 대한 선생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초창기 민우회는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그 때는 회원이든 실무자든 가릴 것 없이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오로지 옳은 일이라는 생각에, 집회 하나를 참석하더라도 도움이 된다면 발벗고 나섰던 것 같다.
당시 민우회는 정말 어려웠다. 회원들과 실무자들이 내는 십시일반의 회비로 활동하다 보니 충정로 사무실 전세금을 올려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때 이효재 선생님께서 퇴직금을 일부 내놓으셨다는 말을 들었다. 이미 많은 것을 민우회에 헌신하셨는데 노후대책인 퇴직금마저 내놓으셨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참 송구스럽다. 민우회에서 이미 물러나셨을 때이므로 더욱…
인간에 대한 사랑, 특히 여성을 비롯한 소외된 자들에 대한 선생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민우회 설립이전에 이미 사회학자로, 여성운동가로, 민주화 인사로 명성이 높았는데 까마득한 후배 아니 제자들인 동지들과 함께 눈높이를 맞추는 선생님의 겸손함도 우리가 잊지 않고 본받아야할 점이다.
어렵게 어렵게 민우회를 궤도에 올려 놓으시고는 미련없이 단호하게 회장자리를 넘기신 점도 참 선생님답다. 얼마나 민우회를 사랑하시는지 아니까.
요즘 여성운동이 많은 성과를 내는 것을 보노라면 당시로선 도저히 이런 날이 오리라 상상조차 못했다는 점을 기억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한편 어떻게든 사회를 아름답게 가꾸려고 혼신을 다해 노력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오늘날 민우회와 여성운동이 이만큼 성장한데는 우리들의 훌륭한 본이 되신 이효재 선생님이 계셨고 선생님의 뜻을 따르는 많은 이들의 노력 때문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이효재 선생님의 건강을 빈다.
선생님의 거울에 나를 비추어 보다
신진화 (민우회 창립 당시 홍보부장, 현재 서울지방법원 판사)
내가 뵈었던 짧은 시간 동안 선생님은 늘 여장부였고, 합리주의자였고,
민우회 내에서도 제일 원칙적인 분이셨다.
이효재 선생님을 회고하면서 바로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을 찾았지만 없었다. 갑자기 소중한 일기를 잊어버린 것처럼 난 안절부절못했다.
대학교 1학년(1980년)때까지 부끄럽게 난 여성으로 울분을 토할 일이 있으리란 사실을 의식해 본 적이 없었다. 여성문제를 강조하는 선배들의 이야기도 어줍잖은 고집에 사로잡혀 있던 내게는 부정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렇게 1년 후 결국 사회적 문제들을 내 삶에 받아들이면서 마음의 새 집을 짓는 일에 몰두할 때 내가 지주(支柱)로 모신 책들 중 하나가 바로 「여성해방의 이론과 실제」였다.
요즘의 현란한 담론들에 비하면 선생님의 책은 좀 무뚝뚝하고 불친절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런 불친절함이 문제되지 않았던 것은 그 책이 거의 모든 여성문제와 그와 연관된 사회문제들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을 직접 뵙게 된 건 그 뒤 87년 여름, 민우회 창립 직전, 선배들과 함께 인사를 드리러 간 선생님의 아파트에서였다. 조용하고 간결하여 조금은 휑덩그레한 분위기의 선생님 댁은 연구와 먹고 자는 일 외에는 용도가 없어 보였다. 그 때 선생님이 내게 짓던 약간은 걱정스러운 표정이 ꡐ물정 모르는 어린애가 어떻게 여성운동을 할까ꡑ하는 걱정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은 내 자격지심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ꡐ 누구보다 열심히 할 자신은 있는데…ꡑ 하고 반문했었다.
그 후 내가 뵈었던 짧은 시간 동안 선생님은 늘 여장부였고, 합리주의자였고, 민우회 내에서도 제일 원칙적인 분이셨다. 실무자들이 뭔가 좀 적당히 편법적으로 하려다가는 곧 선생님한테 지적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곧 나는 민우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님을 모시고 민우회 활동을 하던 그 시기가 내게 얼마나 소중했는가 하는 것은 지금의 내 삶 역시 선생님의 책에 또 한 번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점점 더 들기 때문이리라.
이효재 선생님의 삶과 학문적 의미 강인순 (경남대 사회과학부)
선생님이 행하신 가부장제의 극복을 위한 여성운동은 분단극복을 위한 통일운동이요,
정치사회의 민주화운동이었다.
ꡒ가부장제는 나의 한국가족연구의 화두가 되어왔었다. …나는 미국 유학중에 일어난 민족상쟁의 6․25전쟁을 멀리서 바라보며 한반도의 분단과 민족분열의 아픔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분단조국의 현실과 앞날을 우리 여성들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ꡓ
위의 글은 이효재선생님이 가장 최근에 집필하신 책 「조선조 사회와 가족」의 머리말이다. 윗 글에도 나타나 있듯이 1950년대 말 미국에서 구조기능주의 사회학을 공부한 선생님의 한국에서의 학문 화두는 ꡐ가부장제ꡑ의 변화를 밝히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미국에서 영향 받은 근대화론적 시각에서 농촌가족과 도시가족을 비교연구하는 것으로부터 학문활동을 시작하셨다.
이후 선생님의 관심은 여성들의 문제에서 한걸음 나아가 조국의 분단현실과 정치적 비민주성으로까지 확장되었고 1970년대 초엔 ꡐ여성은 지역사회의 주인이다ꡑ는 주제로 여성들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강조하셨다. 이 화두는 30여 년이 지난 오늘 지역사회 여성들의 정치참여와 사회참여를 위한 중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다.
또한, 1980년대에 선생님은 ꡐ분단시대의 사회학ꡑ을 제기하심으로써 사회과학분야의 모든 연구자들에게 진정한 학문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하였다.
이효재 선생님의 이러한 학문과 실천적 관심은 1960년 「가족과 사회」, 1970년대「여성의 사회의식」, 1980년대 「분단시대의 사회학」,「한국의 여성운동, 어제와 오늘」, 2000년대 「조선조 사회와 가족」 에 이르는 십여 권의 저술과 많은 연구논문으로 나타났다. 이런 연구업적은 선생님의 실천적 삶과 그대로 연결되며, 선생님이 행하신 가부장제의 극복을 위한 여성운동은 분단극복을 위한 통일운동이요, 정치사회의 민주화운동이었다.
1990년 중반 낙향하신 후 선생님은 고향인 진해 지역사회에서 어린이도서관 건립운동과 여러 봉사활동을 하시면서 지역사회의 여성연구, 가부장제의 뿌리를 밝히는 가족사 연구 등을 수행하고 계시다.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항상 여성을 둘러싼 모든 문제의 한가운데에 계셨다. 감히 후학으로서 우러러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으로 선생님이 언제 또다른 문제에 관심기울일지 기대하게 된다.
언제나 감격할 수 있는 마음 한명숙 (환경부장관)
선생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옆에 계시기를 좋아하신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 틈에서는 늘 마음이 불편하다고 하시면서
여성운동이나 노동운동 하는 후배나 제자들과 더불어 반생을 지내셨다.
선생님을 처음 뵌 지 벌써 30여 년의 세월이 지나가 버렸다. 아직도 그 때의 그 모습과 그 인상 그대로시다. 세월이 지나도 그리 변하시지 않는 것은 아마도 선생님의 삶의 자세 때문이리라. 선생님을 뵐 때마다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모방심리가 발동한다. 나이 들어서도 저렇게 순수하고 여유있게…
선생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옆에 계시기를 좋아하신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 틈에서는 늘 마음이 불편하다고 하시면서 여성운동이나 노동운동 하는 후배나 제자들과 더불어 반생을 지내셨다. 해직교수시절 여성운동 한복판에 깊숙이 들어오셔서 여성단체연합, 여성민우회,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회장을 맡으시면서 여성과 평화,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여성문제 해결에 심혈을 기울이셨다.
또한 선생님은 항상 여유 있는 삶을 사신다. 천천히 말씀하시는 어눌한 말씨에서도 풍기듯이 언제나 도량이 크고 여유가 있으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엄격하시다. 1996년 7월 여성주간 때 수여되는 국민훈장을 거절하셨다. 독재정권에 협력한 인사와 상을 함께 받는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상을 거절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선생님은 단호하셨다. 우리들은 그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신 선생님을 너무나 좋아했다. 그리고 존경했다.
선생님과의 추억은 수없이 많다. 1992년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감격하던 일, 광화문 네거리에서 선생님과 팔짱을 끼고 최루탄 쏟아지는 거리를 활보하던 일 등 민주화운동, 평화운동, 여성운동의 현장에 가면 언제나 선생님은 그 자리에 계셨다.
지금은 고향 땅 진해에서 연구에 몰두하시면서 지역사회를 챙기고 계시다.
순수하면서도 열정이 넘치고 탐구욕이 강하면서도 여유로운 선생님의 삶의 자세를 배우며 살고 싶다.
1_ 미국에서
2_ 지인들과 함께
3_ 명동성당 앞 시위
4_ 북한방문
5_ 미국 백악관 시위
6_ 여성한국사회연구소 설립
7_ 학교에서 제자들과
8_ 11월 2003년 팔순잔치
사진제공․미즈엔
이효재 프로필
학력
1945 - 1947 이화여대 영문학과 수료.
1948 - 1951 UNIVERSITY OF ALABAMA, TUSCALOOSA, ALA, USA 사회학 학사학위 취득
1953 - 1954 Presbyterian School for Christian Education. Richmond, Va.U.S.A. 기독교 교육석사학위 취득
1955 - 1957 COLUMBLA UNIVERSITY 대학원 NYC. N.Y. 에서 사회학 석사학위 취득
1962 - 1963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CALIF. 대학원에서 사회학 연구
경력
1958 - 1980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1980 - 1984 이화여대 교수해직(광주민중항쟁 연루)
1984 이화여대 교수 복직
1990. 2 이화여대 교수 정년퇴임
1970 - 1971 한국사회학회 회장
1978 - 1989 한국가족학회 초대회장, 현 고문
1987 - 1990 한국여성민우회 초대회장 역임
1990 - 1992 한국여성 단체 연합 회장, 현 고문
1991 - 현재 한국정신대 문제 대책협의회 공동대표, 현 명예대표
1995 - 1998 한국여성사회 교육원 원장, 현 이사
1996 - 현재 진해, 경신사회복지재단부설 사회복지연구소 소장
1998 - 현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저서
가족과 사회 - 1968
분단시대 사회학 - 1985
한국여성운동, 어제와 오늘 - 1989
사회와 가족 - 2003, 외 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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