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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12월호 [창…窓]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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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0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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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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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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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144
창…窓
풀
유소림
이렇게 저렇게 주어 모은 생각들을 이리 저리 꿰어 맞춰 게으르게 살면서 중년으로 꼬부라들던 나를 강하게 후려친 것은 부모의 죽음이었다. 두 사람의 죽음으로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된 듯 싶었다. 나는 내가 그 동안 정말 뭣 모르고 살았음을 절감했다.
나를 낳아준 부모의 죽음은 그 때까지 내가 겪었던 경험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근원적인 것으로 기존의 나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그것은 우선 부모 두 사람에게 품고 있던 이끌림의 우선 순위를 바뀌어 버렸다.
아버지는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로 식민지 시대부터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아오면서 그 신념에 대한 논리정연함과 확고부동함으로 늘 주위 사람들을 압도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그에 비하면 엄마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신념이니 학식이니 하는 그런 것은 물론 자식들을 설득하는 권위도 없었고 당신의 인생을 빛나게 하는 뚜렷한 목표도 없었다. 그저 아이들을 낳고 기르고 살림하면서 짐승과 꽃을 좋아해 고양이하고도 이야기하고 어디 산비탈에서 새끼 손가락 만한 빨간 단풍나무를 캐와 마당에 심고는 아침저녁 물주며 좋아라했다.
ꡐ똑똑함ꡑ을 좋아하던 젊은 나이의 나에게는 물론 엄마보다 아버지가 더 근사하고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다 떠나고 나자 정작 내 가슴에 길게 여운을 남기는 사람은 칼날 같은 논리로 무장되었던 아버지가 아니라 어딘가 아기 같던 엄마였다. 마흔이 넘은 나에게 사람 사는 일이란 두뇌의 사고력이나 논리만으론 알 수 없는 어떤 신비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기 같던 엄마는 그 신비함을 훨씬 더 가까이에서 맛보고 있었던 듯 싶었다.
부모에 대한 이끌림의 순서가 바뀌던 즈음, 주변에 대한 나의 시각도 바뀌기 시작했다. 엄마의 천진함보다 아버지의 사고력이 훨씬 더 큰 호소력을 발휘했던 시절, 동물이 식물보다 훨씬 더 우월해 보인 건 당연했다. 땅 속에 뿌리가 붙박혀 꼼짝도 못하고 주위환경이 허락하는 한에서만 살아가는 식물들은 너무도 수동적이고 무능해 보였던 것이다.
식물에 대한 이런 나의 견해는 내 교육 과정 속에서도 줄곧 강화되었다. 사 십 년에 가까운 내 성장 과정과 교육 과정은 삼라만상의 질서에 대해 내 머리 속에 어떤 확고한 구조를 만들어 냈으니 가장 잘난 사람 밑에 털짐승이 있고 그 짐승 밑에 온갖 벌러지들, 그 벌러지 밑에 식물들이 있다는(그 식물들 중에서도 풀은 가장 하층이었다) 거였다. 하지만 삼십대 후반에 아버지가 떠나고 마흔 넘어 엄마마저 떠나보낸 내 눈엔 나무와 풀들이 참으로 새롭게 비치기 시작했다.
가을에 엄마마저 떠나보내고 겨울이 다 가도록 눈물 찔끔거리며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나는 어느 이른 봄날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공원 양지쪽 벤치 위에는 노숙자가 한 사람 잠들어 있고 그 벤치 밑에 어느새 풀이 파랗게 돋아 있었다. 나는 갑자기 그 풀잎이 나를 만나러 온 내 어머니임을 깨달았다.
풀은 모든 생명의 어머니였다. 풀과 나무가 한 곳에 뿌리 박혀 살고 있는 것은 식물들에겐 스스로 먹거리를 생산해 낸다는, 동물로선 꿈도 못 꾸는 그 탁월한 능력이 있어 동물처럼 떠돌아 다닐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풀과 나무는 그런 능력으로 스스로를 살리고 무능력자 동물까지 키우고 있으니 이 지구 위의 모든 것들은 우주의 에너지를 물질로 변화시켜 스스로 다른 목숨들의 먹이가 되는 풀들의 그 신비한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였다. 생명 진화의 최전선이라는 젖먹이 짐승들, 제 몸에서 젖을 생산해내 어린것들을 먹이는 그 목숨붙이들은 사실 풀을 향해 진화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신비한 능력을 지닌 풀이라 해도 저 혼자 홀홀 단신으로 그런 능력을 발휘하는 건 아니었다. 풀들은 하늘의 빛과 비를 필요로 하지만 그런 신의 은총 외에도 벌러지라는 땅 위의 친구들을 필요로 하지 않은가 말이다. 벌러지는 꽃의 잎새를 먹고 자라 날개를 얻고 꽃은 그 날개들 덕분에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풀을 그 뿌리에서부터 열매에 이르기까지 깡그리 먹어댈 뿐 아니라 풀이 키워낸 최종 생명들인 물고기와 육고기까지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뻔뻔한 인간들도 죽고 나면 흙먼지가 되어 다시 풀뿌리로 돌아가니 우주란 애초에 이렇게 상부상조의 원리, 서로가 서로에게 먹이가 되어주는 절대 자비의 원리로 작동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나물 한 접시를 먹는 것도 제 목숨을 통째로 내어주는 풀은 물론 햇빛과 물과 벌레와 풀을 키운 이 등등 알 수 없게 중중층층으로 엮어진 도움의 실타래 속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이 세상에선 꽃 한 송이가 피고 벌레 한 마리가 날기 위해서도 온 우주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불교설화는 싯달타 왕자가 탄생할 때 왕자를 시중들 남녀 시종과 왕자를 태우고 다닐 말까지 한날 한시에 태어났다고 이야기한다. 이 설화는 이 우주에서는 돌멩이 하나에서부터 깨달은 이에 이르기까지 달랑 저 혼자 생겨나는 존재는 아무도 없으며 그 근원부터 서로서로 어울어져 부축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니 석가모니 부처님이 우둔한 우리 중생들에게 사십오년 동안 팔 만 사 천 가지의 설법을 동원하며 애쓰시던 것도 우주의 작동 원리가 바로 자비임을 깨우쳐주시기 위함이었으리라.
불경에서 갠지스 강가의 모래알보다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고도 스스로는 제도했다는 생각이 없어야 보살이라고 이르고 있음은 우주의 작동 원리가 자비임을 궁극까지 사무쳐 깨달으면자비를 베푸는 일이 절대 남에게 자랑할 공덕이 아니요 오히려 숨쉬는 일처럼 자기 존재에 필수적이고도 극히 자연스런 것이 되기 때문일 게다. 어디 불경뿐이겠는가. 인류의 스승들은 모두가 한 목소리로 사랑을 말하지 않는가.
지구촌은 갈수록 아귀다툼판이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닌 바로 사람들 탓이다. 지구의 숱한 생명들 중에 오로지 사람만이 유일하게 쩔쩔매고 갈팡질팡하며 살고 있다. 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이래 그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들이 겪고 치러온 그 가지가지 갖가지 고통과 모험과 애씀을 생각하면 사람이란 존재는 행복해져도 벌써 진작에, 어떤 생물들보다 월등하게 행복해졌어야 되련만 어쩐 일인지 이제는 사람 저 혼자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산것들까지 한꺼번에 죽음으로 처넣고 있다.
자비가 작동원리인 곳에선 행복해지기보다 불행해지기가 수백 배, 수천 배 더 어렵지 않겠는가. 세상을 보자. 꽃과 새와 나무들, 짐승들과 벌레들 모두가 호수처럼 안정되어 있고 아기처럼 행복해 하는데 사람만 저 혼자 우주의 질서에서 빠져나가려는 엉뚱하고 어리석고 헛된 발버둥을 치며 끝없이 끝없이 불행해지고 있다.
올해도 여지없이 수능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 세상을 버린 일이 생겼다.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이런 일들을 그만두지 못하고 살아야 하나. 하루하루가 무한경쟁이요 전쟁판인 세상에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온갖 거룩함을 다 부리며 저 혼자 부처 찾고 성인 찾냐, 그런 욕을 먹어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이런 글이나마 끄적거려 보았다.
유소림 | 「함께가는여성」 ꡐ창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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