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상반기*함께가는여성] 기획1-태극기에서 촛불까지: 광장에 나온 여성들(권김현영)
●기획 소개
2016년 7월, 이화여대에서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을 반대하며 본관을 점거했다.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은 백지화 됐지만 투쟁은 이어졌고, 정유라 관련 의혹이 불거졌다.
2016년 10월, JTBC가 최순실의 태블릿PC를 입수하여 보도한 이후, 국정농단 의혹들이 속속 밝혀졌다. 그리고 10월 29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첫 번째 촛불집회가 개최되었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 재판관 만장일치로 박근혜 대통령 파면이 결정됐고, 5월 치러진 촛불대선에서 제19대 대통령이 선출됐다.
이 역동 속에서 페미니스트들은 탄핵을 위해 싸우고 동시에 여성혐오에도 맞서야 했다. 집회현장에서 쏟아졌던 여성혐오 발언에 대해 문제제기 해야 했고, 여기서 벌어진 성희롱, 성추행에 대응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 여성 대통령은 안 된다’는 여성 대표성에 대한 근거 없는 불신을 해소해야 했다.
정권은 교체되었지만 페미니스트들의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다. 성평등 없이 민주주의는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더욱 치열하게 페미니즘 정치는 무엇인지, 페미니스트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
●기획1
태극기에서 촛불까지: 광장에 나온 여성들
권김현영 | 여성주의 연구 활동가
*이 글은 2017 민우특강 <정치, 페미니스트가 싸울 자리>의 4강 ‘태극기에서 촛불까지: 광장에 나온 여성들’의 강의 내용을 편집한 글입니다.
탄핵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할지 모를 때에는 역사를 보는 일이 필요하다. 역사가 ‘거다 러너’는 “역사는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집단적 연속성에 확신을 가지게 하는 수단”이고, “공동의 미래를 위한 목표와 비전의 윤곽을 그릴 수 있는 도구”라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 120년 동안 한국에서 거리에 나선 여성들의 광장 정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여성들의 광장정치 120년
1898년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남성과 동등하게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토론하는 경험을 한 여성들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만민공동회의 경험을 한 여성들은 같은 해 9월 한국판 ‘시민과 여성의 권리 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 <여권통문>을 발표했고, 10월에는 경복궁에서 “왕부터 축첩을 폐지하라” “국립 여학교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고, 고종에게 <부인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만민공동회부터 직접 상소에 이르기까지 단 1년 만에 여성들이 그 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정치적 행동주의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보다 조금 먼저 해외에서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다양한 국제여성조직이 창설되었는데, 당시의 여성 조직들의 양상은 ① 기독교 중심의 부인선교와 자선활동, ② 여성 참정권론자 중심의 여성 참여형 노동조합과 정당조직, ③ 금주·금연, 생활개선 운동 등 신생활 신도덕 운동 등으로 나눠질 수 있다.
조선의 여성들은 삼종지도와 칠거지악에 갇혀 바깥출입조차 어려웠지만 서로에게 한글을 배우고 한글본 고소설을 나눠읽으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20세기 초에야 한국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이, 아이러니하게도 나라를 잃고 난 조선인들 사이에서 잠정적으로 허용되었다. 식민지 시기 여성들은 3.1운동에 참여하며 자의식에 변화를 겪었다. 여성과 남성 모두 나라를 잃은 같은 처지였고, 모두에게 해야 할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학생들을 비롯하여 여성들 사이에서의 독립 운동은 굉장히 활발히 이루어졌고, 후에 박용옥을 비롯한 역사학자들이 ‘3.1운동은 한국의 여성들에게 참정권 운동이었다’는 평을 할 정도였다. 3.1운동에 대거 참여한 여성들은 태극기를 그리고, 만세를 부르고, 집회를 조직하는 등의 일을 통해 ‘몸’이 변화한다. ‘유관순’을 비롯하여 3.1운동에 참여했던 여학생들은 ‘자신이 여자 영웅으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굉장히 기쁜 일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즉 자아가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는 황민화 정책에 가담했던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 제국주의적 책략에 단순히 동원됐다기보다 자기 스스로 제국의 식민이 되어서 자아를 확장해 보게 된다. 이것은 여성도 가정이 아닌 공적영역에서 무언가를 해볼 수 있다는 감각을 가지게 된, 근대 초 여성들에게 공통된 경험이기도 했다.
3.1운동 이후 여성들은 ‘싸우는 집단’으로 존재하며 지속적으로 투쟁한다. 특히 ‘강주룡’은 최초로 고공농성을 했던 여성이다. 그가 을밀대에 올라가 주도했던 ‘평원고무공장 동맹파업’은 11개 공장 2,300명의 노동자 중 1,800여 명이 참여한 굉장한 파업이었다. 하루 15시간 노동을 해도 일본 노동자에 비해 1/4, 조선 남성에 비해 1/2의 임금을 받았던 이들은, 1929년 세계적인 경제대공황 이후 또다시 임금이 삭감되며 파업을 하게 됐다. ‘평양 을밀대에 체공녀 돌현’(동아일보, 1931), ‘을밀대 상의 체공녀, 여류투사 강주룡 회견기’(동광, 1931) 등의 기사가 쓰였고, 일본에서도 이 사건을 취재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립한 뒤, 평양에서의 세력 확장을 위해 ‘고무공장 노동조합’의 총파업에 관여했기 때문에 이 파업은 엄청난 탄압을 받기도 했다.
이 파업 이전에는 ‘조선방직 파업’도 있었다. 임금인상, 8시간 노동제 확립, 승급제 확립, 해고 반대, 식사 개선, 벌금제 폐지, 부상에 대한 위자료 지불, 조선인과 일본인 차별금지 등 15개 조항을 요구하지만 파업은 실패했다. 왜 실패했을까? 여성노동자중심의 부족한 파업동력, 파업지도부의 유약한 자세 등이 이유로 꼽혔지만, 사실 일제가 ‘조선공산당’ 재건과 ‘신간회 지부’ 등 ‘외부세력’의 개입을 근거로 파업을 무력 제압했기 때문이다. 외부세력의 개입은 여성 노동자 내부에서의 리더십을 성장하지 못하게 했고, 이념적 최전선의 투쟁을 하느라 당시 사업장의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보다 실효성 있는 협약을 체결하지 못하게 하는 등의 문제를 발생시켰다. 1920~30년대의 또 다른 형태의 운동은 농촌계몽운동 등의 문화운동이었는데, 이 당시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순천이 있다. 그는 과학적 접근을 통해 생활 개선에 힘쓰는 등 실용적인 것을 중요시 하는 인물이었다. 후에 박순천의 제안으로 생리휴가가 도입되기도 한다.
1857년 미국에서는 방직공장 여성노동자들이 봉기했고, 이 흐름은 1912년까지 이어진다. 노동집약적인 공장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휠씬 많았고, 당시의 노동운동은 여성이 주도했다고 보는 것도 틀리지 않다. 1920년대 대공황 시대로 오면서 남성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일자리 확보를 위해 여성노동자들, 특히 맞벌이를 한다는 이유로 기혼여성노동자들을 쫓아낼 것을 요구했다. 그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은 남성의 50%로 기업주의 입장에서는 여성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남성노동자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과부’만을 고용하겠다고 공표하는 곳이 있을 정도였다. 결국 고용주의 이해관계와는 무관하게 가부장제에 의해 여성을 고용하지 않게 되었고, 여성의 노동을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는 감각이 굳어지고, 직장 내 성희롱도 확산되었다.
1945년 조선은 해방을 맞이한다. 이 시기 광장에 선 여성들에 대한 재미있는 기록이 있는데, 한 인터뷰에서 대한부인회 회원은 “매일매일 종로에 나와 토론하는게 그렇게 재밌어서, 왜 남자들이 정치에만 빠지면 집안을 다 말아먹는지 이해가 가드라고”라고 말한다. 이렇게 해방 이후 국가의 향방을 토론하는 경험은 여성들에게 쟁의 의식이 고양되는 경험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여성의 자주적 경제생활 확립, 남녀임금 차별철폐 등을 내용으로 하는 건국부녀여성동맹 강령도 이때 만들어졌다. ‘부인운동에 기대한다’(자유신문, 1945)는 사설이 신문에 실릴 정도로 여성들은 발 빠르게 나라와 관련된 일을 위해서 움직였다. 광범위한 여성조직이 설립되었고, 정당 활동과 민간 여성조직 활동이 결합해서 기세를 떨쳤으며, 사회주의 부녀동맹, 자유주의 부인회 등이 새로운 사회참여 세력으로 부상했다. 여성들은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획득했고, 이때부터 여성정치인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여성정치인들은 실패한다. 그 이유는 여성 운동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여성 해방(축첩제 폐지, 공창제 폐지) 때문에 생계가 곤란해지는 여성들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성정치인들에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말하는 남성정치인들의 방해, 투표를 하러가도록 여성을 독려하지 않는 분위기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정치인들은 그런 말에 굴하지 않고 “어디서 병아리가 우는가”라고 일갈하며 스스로 길을 내어갔다. 1공화국 시기 여성정치인들의 집단적 부상이 가능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3선을 하기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하는 등의 부정의한 정치환경을 거치면서 1공화국은 드디어 국민의 손으로 끌어내려지게 된다. 하지만 이런 한국사회의 혁명적 순간들이 익숙한 여성혐오와 만나게 된 것만은 유감이다. 당시 이승만의 불통과 독재에 항거했던 여성 정치인으로 박순천이 있었고, 임영신조차 나중에 이승만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유당과 1공화국이 이 정도로 몰락하게 된 이유는 여성 때문이라는 말이 돌았다. 당시 “자유당의 2가지 암”으로 꼽힌 사람은 대한민국 최초의 영부인 프란체스카와 부통령 이기붕의 부인이었던 박마리아였다. 정권 몰락의 핵심 원인으로 매우 손쉽게도 권력 바로 옆에 있었던 여성들을 문제 삼고 방패삼았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1966년 전미여성기구 NOW가 설립되었다. NOW는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목표로 삼고, 당대의 페미니스트 이슈들에 개입하고, 로비, 시위, 가두행진, 학회개최 등을 통해 이러한 의제를 관철하려고 노력한다. 이때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가 미 전역에 걸쳐 베스트셀러가 되는 분위기 속에서 NOW는 당대 여성들의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를 폭로하였고, 이때부터 페미니스트 정치가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970년대 급진적 여성운동이 등장한다. 1970년대의 2물결 페미니즘은 급진페미니스트 그룹에 의해 주도되었었는데 당시 레드스타킹은 성명서를 통해 ‘우리는 무엇이 `혁명적'이며 무엇이 `개량주의적'인지를 묻지 않는다. 오직 무엇이 여성에게 이익이 되는가를 물을 뿐이다.’라고 하며 분리주의에 입각한 여성해방운동을 시도하게 된다.
1968년부터 1980년에 이르는 전세계적인 여성해방 제2물결 시기에는, 급진적 여성운동, 섹슈얼리티에 대한 완전히 다른 식의 감각, 몸에 대한 질문, 퀴어 이슈의 부상 등이 등장했고, 다양한 방식의 집회가 발달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커피 심부름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아이리스 베라(Iris Rivera)를 해고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 남성 상사들을 대상으로 “커피 끓이는 법” 교육을 실시하고, 커피의 나쁜 점에 대한 배지를 증정하는 등 기존의 운동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운동을 펼쳐 화제가 되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여성노동자들의 문제를 기발한 시위를 통해 드러내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호감을 얻으며 운동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북미와 유럽에서 페미니즘 제2물결이 꽃필 때, 한국은 박정희 독재체제 하에서 ‘전국재건청년회 및 부녀자 대표자 대회’를 열고 재건청년회와 재건부녀회를 만들었다. 가입자는 1962년 360만여 명이나 됐다. 이들은 국가재건범국민운동을 펼쳤고, 그 다음으로는 새마을운동이 이어졌다. 1960년대 한국에서는 박마리아, 프란체스카 등의 여성이 정치적 관여를 하는 바람에 나라를 망쳤다는 이야기가 회자되며, 관변여성단체를 포함한 여성단체들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이후 관변여성단체만 다시 부활하여 새마을부녀회처럼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는 하부 조직으로 활동하게 된다. 다른 한편에는 ‘동일방직’과 같은 여성노동자들의 운동이 존재했다. 이 당시 공장 활동에는 잠입 위장 취업했던 학생운동세력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 정도로 여성노동자의 수가 많았고, 여성노동자의 작업장에는 항상 먹을 것과 모임과 배울 의지가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공장에 취업하는 것이 본인의 부르주와성을 버리고 소시민적 삶에 다가가며, 미조직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할 수 있는 매우 매력적인 활동방식이었다.
군부독재가 끝나고 1987년에는 진보적 여성운동을 선언하는 한국여성단체연합이 만들어졌는데, 당시의 선언문을 살펴보면 “여성 일반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민중의 생존권 확보와 민주화 달성을 위한 투쟁을 중점적으로 행해야 한다.”고 쓰였다. 여성들 역시 민주주의를 위해서 헌신하는 진보 그룹이라는 것을 인정해달라는 이야기가 강령 전반에 굉장히 많이 드러나 있다. 진보적 여성운동을 만들기 위해 페미니스트 담론을 들여온 것이 아니라, 진보 그룹에서 여성 부류 조직이라는 것을 인정받아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1975년 최초의 UN 여성대회가 개최된 후 1995년 북경 여성대회까지 20여년에 걸쳐서 국제적인 여성조직에서 다양한 협약과 선언이 채택되고, 모든 여성에게 적용 가능한 방식의 글로벌 스탠다드를 만들어내게 된다. 하지만 각국 세계 여성 지위에 대한 토론과 연대가 시작된 동시에 여성들 간의 ‘차이’에 대한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해외에서는 레이건-대처 시대 때의 적극적 조치를 비판했던 남성그룹들이 ‘남성위기론’을 만들고, 이는 여성혐오적 언설이 문화적으로 강화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한국의 경우 이 시기는 남성이 생계부양자로서의 자기 지위를 안정적으로 가질 수 있는 시기였고, 중산층이 안정화되면서 성차별이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그러면서 중산층의 물질적 조건을 기반으로 많은 사람들이 대학교육에 노출됐다. 이에 여성에 대한 폭력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 그룹들이 생겨났고, 여성들이 전문직으로 등장하면서 성희롱이 문제화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는 여성들 간의 차이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성주류화 너머의 문제제기가 본격화되기도 하고, 남북갈등·동서갈등이 가시화되고, 탈식민주의적인 문제의식이 시작되고, 인종과 계급 같은 차이에 대한 사유방식의 전환이 요구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부터 ‘영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집단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른 최초의 집단이다. 이들은 대학 내 성차별주의, 사회운동 내의 성차별과 성폭력, 의제의 위계에 대해 질문했다. 중앙집권적인 조직방식이 아닌 사안에 따른 연대조직으로 분화됐고, 이슈 파이팅 소그룹을 만들어 게릴라식으로 조직을 만들고 없애는 방식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8년부터 2015년까지는 한국사회의 모든 운동이 공백기를 맞는다. 2007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가 발발되고 이명박이 당선된 후, 2008년 촛불시위, 2009년 용산참사, 2011년 청소노동자 파업을 겪게 된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모든 사회운동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망가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사회 위기 속에서도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고공농성을 할 때 희망버스로 시민과의 연대가 만들어졌고, 강정, 한진, 유성, 재능, 명동 마리, 홍대 두리반 등의 투쟁 현장에는 20대 페미니스트들이 활발하게 참여했다. 사회가 암흑화, 빈곤화 되어 내쫓겨지는 상황에서도 페미니스트들은 함께 운동하고 있었다.
이 시기 여성의 경우에는 빈곤화의 속도가 빨라지는 만큼 양극화가 심각해졌고, 여성 섹슈얼리티가 유일한 자원으로 작동하게 됐다. UN에서는 여성 폭력을 핵심 의제로 다뤘는데, 이는 피해자로서의 여성 문제 이외의 사안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2011년 캐나다에서 진행된 ‘슬럿워크’ 시위가 21세기 처음으로 성공한 페미니스트 시위라고 평가되는 것이 이러한 현실을 드러낸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2014년 세월호, 2015년 개그맨 장동민의 "떠들고 설치고 생각하는 여자는 싫다"는 발언,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겪으며, 거리에서 페미니즘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뉴페미’의 새로운 액티비즘
지금부터는 2015년 이후의 ‘뉴페미’들의 새로운 액티비즘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첫 번째로 이들은 미러링을 통해 되돌려주기, 되받아치기라는, 상상도 못한 방식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현해내며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리고 여성혐오와 폭력에 대한 아카이브를 만들어 이러한 문제들이 왜 구조적 문제인지 밝혀내고, 기록하고, 해석하여 역사로 구성했다. 미러링-아카이빙-큐레이팅으로 이어지는 ‘뉴페미’들의 방법론은 그것을 갱신해나가는 해석공동체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이 어느 순간 공격에 매우 취약해지고 내부 비판이 불가능해진 상태로 멈출 수도 있다는 우려가 들기도 한다. 혐오는 쾌락이고 혐오를 반대하는 움직임으로 똑같이 되돌려주는 과정에도 쾌락이 반드시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혐오의 쾌락에 중독되는 것은 경계되어야 한다. 복잡한 상황을 쉽고 간단하게 전달해서 제시하는 서사화를 빠르게 해내는 사람들이 공론장에서 지지받는데, 정보를 매뉴얼로 만들고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소구될 수 있는 방식으로 가공해서 보여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입문을 반복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이 들기도 한다. 물론 한국의 페미니즘은 장필화 선생님이 퇴임강연 때 말한 바와 같이 계속 서문을 고쳐 쓰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가 폐쇄회로에 갇히지 않으려면 ‘그 다음 어떻게 가야 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필수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액티비즘, 그 다음에 대한 기획은 무엇이 있을까. 우선 구조와 특권에의 도전을 위해 적대와 갈등을 가시화해야 한다. 제대로 적대하지 않으면 문제는 반복될 뿐이다. 그리고 새로운 개인과 집단이 등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 페미니즘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한 사람들은 ‘몸’이 달라지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되돌아갈 길이 없는 상태에서 한 자리를 맴돌 수는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배우고 고민하며 내가 새로운 개인이 되고, 새로운 집단이 되어야만 또 다른 길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공론장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 없이는 아무리 큐레이팅을 해도 해석의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없기에 공론장에서 해석의 가능성을 개방해야 한다. 차이와 다양성이 환영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이 필요하다.
앞서 구조와 특권에의 도전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이 부분에 있어 누가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는가가 굉장히 중요하다. 북미와 유럽의 경우 여성의원들이 의제설정과 위원회 선택 단계에서 성차가 뚜렷하고 여성대표로서 자의식이 높은 편이다. 그런데 한국 여성의원들은 그렇지 않다. 여성의원들에게 표결행위에 있어 성차가 전혀 보이지 않고, 정당충성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여성 대표로서의 자의식을 갖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여성할당제 이후 여성혐오 문제에 적극적으로 응답해야할 존재이지만 이것을 무시하고 책임지지 않는 것은 무책임하다.
이렇게 과소 대표되어 있는 소수의 여성정치인들에게 과도한 징표적 상징성을 부여하는 현실에서 이들은 과연 생물학을 넘어선 ‘여성정치인’이 될 수 있을까? 우선 ‘박근혜’가 여성을 대표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문재인’, ‘안철수’는 여성을 대표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성적 차이라는 것이 대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폭로되고, 성적 차이와 관련된 이해를 대표하는 것 역시 정치인으로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임이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성문제에 대한 뚜렷하고 선명한 입장을 가진다고 해서 여성대표성의 위기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은 대중과의 교감을 잃어버리지 않아야만 요구를 관철할 수 있고 이를 위해 협업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성이 사회에서 동등한 주권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여겨지기 위해서 민주주의는 필수조건이 되어야 한다. 전두환, 박정희 정권에서 여성 관련 전문가와 관료가 기용되지 않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말도 반드시 재구성 되어야 한다. 남성들이 싸우면 그들 간의 차이를 확인하지만, 여성들이 싸우면 그 장면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은 오히려 토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잘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며, 여성을 입체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으로 이해되는 과정을 인지시켜 주어야 한다.
지금까지 3.1운동부터 촛불집회까지 100년에 걸친 이야기를 했다. 광장의 정치 이후 ‘몸’이 완전히 달라지고 다른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 그 경험을 가지고 다른 세상으로, 다른 개인으로, 다른 집단으로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권김현영 선생님께서 강의에서 마지막으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의 원칙, 현실과 목표, 방법과 원칙을 제안해 주셨는데요, 그 내용 전해드리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기본원칙 •모든 사람들은 그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남성도 이 변화를 만들어낼 의무가 있다. •타자에 대한 억압에 의존하지 않는 권력구조를 창출하고, 그러한 세상에 대한 상상이 가능해야 한다. •피해경험과 억압의 교차성을 인정하되, “각각의 범주들은 명확한 경계와 차원을 지닌 실체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속에 있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현실과 목표 •권력구조의 문제(공적영역: 정부와 조직들/ 사적영역: 집, 가족)는 지배와 억압 그리고 가부장제에 기반해 있다. •여성은 단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은 억압자가 되는 것에 저항해야만 한다. •페미니즘의 목표는 지배와 압제의 가부장체계와 개인적인 관계에서의 억압을 종식시키는데 있다. 다시 말해, 해방된 개인이 없으면 구조에의 저항은 불가능하다. 또한 개인이 ‘혼자’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방법과 원칙 •여성은 다양하다. 여성의 정체성은 섹스, 인종, 계급 등 다양한 사회관계에 기반해 있다. •차이는 중요하다. 차이들은 그것이 더 많은 갈등을 낳는다고 해도 토론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한다. •더 작게 나뉘어져 더 많이 토론하라. 작은 집단 내의 토론은 효과적이다, 개인적인 경험들은 토론을 인간적으로 만든다. 아이디어에 대한 피드백의 기회를 얻게 되고 변화를 위한 노력들을 더욱 강력한 것으로 만든다.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일이있다. 사랑은 타자를 이해하기 위한 욕망과 그들을 동등하게 대하려는 의지이므로 변화의 촉매가 된다. |
❚ 권김현영
민우회에서 공식적로는 정책위원이지만 사실은 비상근 상시자문 및 참견 같은 역할을 맡도 있다. 정덕·역덕·여덕 삼덕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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