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상반기*함께가는여성] 기획2-페미니스트 정치의 다양한 얼굴들(김현미)
●기획2
페미니스트 정치의 다양한 얼굴들
김현미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이 글은 2017 민우특강 <정치, 페미니스트가 싸울 자리>의 3강 ‘페미니스트 정치의 다양한 얼굴들’의 강의 내용을 편집한 글입니다.
페미니즘의 역사
페미니즘 역사는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조안 스캇(Joan Scott)은 페미니즘 역사는 ‘판타지 에코(Fantasy Echo)’라고 말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은 현재에도 일어나고, 현재에 일어나는 일들에는 과거가 반영된다. 에코는 이런 방식의 반향, 울림, 반복, 유사성을 말한다. 예를 들어, 2016년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은 1992년 발생한 윤금이 살해사건을 상기시키고, 페미니즘이 해결한 것과 해결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떠올리게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같은 곳, 같은 환상과 욕망, 정치학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세대 간의 차이가 있지만 과거-현재-미래의 행위자가 연결될 수 있다. ‘이들도 우리와 같이 이런 문제들을 고통스럽게 바라봤구나, 직면했구나, 해결하고 싶어 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끊임없이 시간성을 연결하고 시간성을 초월한 동일시의 감정들을 가지는 것이 페미니스트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페미니즘 역사는 운동의 결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만들어가는 과정, 이를 만드는 주체들의 연결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즉, 정념, 열광, 광기와 희망으로 연결된 과거, 현재와 미래의 가능성들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페미니즘의 역사는 이루어졌다. 현재의 방식을 비판하는 미래 세대가 있을지라도, 반복과 변주를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방식의 판타지를 가지고 이동해 가는 과정 속에서 한국의 페미니즘 정치의 장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경합하는 페미니스트 정치와 역사적 유사성
이와 같은 페미니즘 정치의 장에서 페미니즘은 상호경합, 경쟁, 토론을 통해 보완해 가는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현재는 1) 국가 페미니즘과 페모크랫(femocrats), 2) 넷페미와 온라인 페미니즘, 3) 광장 정치 등이 한국의 페미니스트 정치의 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국가페미니즘이란 국가나 정권이 페미니즘의 아젠다 실현을 위해 공헌할 역량을 갖추면서 공공기관을 통해 페미니즘이 제도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은 여성가족부 등의 부처나 성별영향평가 제도를 통해 외연적으로 국가페미니즘의 역량을 갖춘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부 내에 페미니즘의 관점을 갖고 있는 페모크랫( Femocrats)의 존재 여부다. 진보적 여성주의 관료를 의미하는 페모크랫은 페미니즘 관점을 가지고 국가의 제도, 정치 영역에 들어가서 여성주의 아젠다를 실현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국가나 정권이 페미니즘 아젠다를 실현할 역량이 필요하다. 그러나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지적하듯 국가는 시민과 거래, 협상을 하고 싶어 하는 조정자가 아니다. 아무리 페모크랫이 생겨난다 하더라도 협상·조정 능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는 조건인 것이다.
지난 10년간의 보수정권에서도 여성국회의원, 여성정치인은 등장했지만, 신자유주의 보수우파의 정치 환경 안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없었고, 국가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행정적이고 비효율적인 해결책만 늘어나고,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질서가 판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국가는 자본세계의 유통을 관장하는 탈규제 방식의 정치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소수자 정치, 빈민의 정치, 모든 이를 위한 좋은 삶, 복지의 개념은 파고들 수 없다. 이러한 정치적 조건 속에서 ‘페모크랫은 생존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대의정치에 대한 믿음이 상당히 약화되었다.
직접행동주의 정치
이런 상황에서 직접행동주의 정치가 주목받고 있다. 개인은 많은 의무를 지고 있음에도 국가 정책은 개인의 생활을 변화시켜내거나 이해관계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의식 때문에, 개인들은 내 권리를 보장해 줄 ‘국가가 없다’고 느끼고 직접행동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다. 거리의 정치적 열망, 변혁적인 삶을 위한 요구를 경청하지 않은 채 일시적 조치로 만들어진 정책이 난무하고, 얄팍한 방식의 제도가 마치 여성주의 아젠다를 실현한 것처럼 호명되는 상황이 직접행동주의를 낳았다.
직접행동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정책은 열정적 정치 이후의 결과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대변될 수 있다고 믿기 보다는 스스로 사회적 부정의와 맞서는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표출’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견지하고 들어가야 할 협상의 언어나 조건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의 페미니스트는 자신들의 정치적 열망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는가? 2010년대 이후 ‘촛불소녀’ 등 직접행동주의 페미니스트 정치가 발아했다. 여성혐오가 극렬하여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고 정치를 타인에게 맡길 수 없기 때문에 탈출구로서 페미니즘 정치가 발현된 것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펼쳐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페미니즘 정치 아젠다를 스스로 구현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나는 어떻게 여성혐오에 반대하고 대항할 것인가’, ‘페미니스트의 이름으로 어떻게 정치를 실현할 것인가’, ‘페미니스트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워야할 적은 누구인가’를 알아낸 상황에서 ‘메갈리안’과 같은 직접행동주의자가 탄생했다. 섹슈얼리티가 통제 당하고, 안전한 피임과 임신중단의 권리가 침해당하고, 연애관계에서 안전이별을 걱정해야 하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 위험에 처한 여성들은 정치적 자각 없이 사적인 영역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페미니즘의 아젠다를 실천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적은 ‘여성혐오’다. 남성들의 언어를 미러링하고 교묘하게 남근을 희화화 하면서 남성들을 격분시켰다. 남성들에 대한 맹목적 비하가 아닌, 미러링이라는 전략적 선택을 통해 정치는 쾌락화 되었다. 과거 페미니스트들에게 페미니즘 정치가 기쁨 없이도 실현시켜야만 하는 당위론적 목적이었다면, 온라인을 통한 속도전, 빠른 해결책 도출, 끊임없는 상호학습과 의식화를 통해 페미니즘 정치는 쾌락의 영역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한편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횡단하는 페미니스트들은 광장 정치를 만들어 가고 있다. 강남역 혐오 살인사건이후의 여성혐오 대응그룹, 탄핵정국을 만든 촛불시위의 페미니스트 존(zone), 최근 온라인/오프라인 페미니스트들의 토론 광장인 ‘페미광장’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활동의 원칙은 직접행동주의 정치로부터 탄생된 것이다. 익명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거리로 나와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인지될 수 있도록 하는 상호참조의 공동체를 만들며 광장 정치를 실현하고 있다. 또한 광장은 서로 다른 감각과 정체성을 가진 존재들이 공존하기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공간에서 광장 정치는 다양한 방식의 소수자 연대, 평등하고 자율적인 공동체 범주로의 초대, 공동체 정신의 백업을 실현해가고 있다.
페미니스트 정치의 장: '상호조정의 시간'
한국의 페미니즘은 다양한 얼굴을 갖게 되었다. 온라인 공간, 조직운동, 담론 창출, 교육 등을 통해 개인적인 인격, 정서, 살아온 배경 등이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이 각자의 힘이 가장 최적화될 수 있는 공간과 방식을 알게 된 것이다. 이때 모든 공간은 권위와 위계로 층화될 수 없는 페미니스트들의 ‘평등한’ 자리이다.
물론 한국의 페미니즘은 각 페미니즘 정치의 장들 사이에 갈등과 몰이해가 있거나 서로 격리되는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다양한 주체들을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광장에 소환하고 초청하여 상호 조정의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자신들의 익숙한 공간에서 나와 페미니즘 내부의 낯선 ‘타자들’와 조우하고 있다. 여성혐오가 더 극렬한 방식으로 작동될 때 우리는 연대하여 힘을 수렴해야 한다는 의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메갈리아’는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페미니즘 정치의 장을 열어 성폭력, ‘몰카’ 등의 이슈를 구체적인 정치의 장으로 이끌어냈다. 안전한 해방구인 익명의 온라인 공간을 통해 서로 배우고 정치적 쾌락을 누리면서 페미니즘 정치를 실현했다. ‘메갈리아’는 감각, 흥분, 열정을 통해 페미니즘을 체화한 스스로를 생활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존재이며, 여성들이 경험하는 폭력에 대한 공감능력을 기반으로 학습하고, 사후적으로 페미니즘의 언어와 개념을 접한 세대인 것이다. 이들은 감각, 소통, 정서가 유동하며 자신의 행동능력을 변화시키는 ‘정동적 회로망’을 구축하여 페미니즘의 언어와 감각을 전파시켰다. 이들이 만들어낸 언어는 한국 페미니즘의 개념어에 포함되어야 할 독자적인 것이고, 이들의 페미니즘 운동은 ‘판타지 에코잉’의 역사 안에 포함시키고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경험이다.
그렇지만 여성혐오를 혐오하는 집단에 의해 소송, 협박, 신상털기의 피해자가 되면서 세력을 잃어가고 있기도 하다. 창의적인 조롱과 울분의 감정을 통해서 페미니스트 정치에 활력을 불어넣고 쾌락의 장으로 만들었지만, ‘메갈리아’, ‘워마드’는 동료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적극적인 연대와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거나, 신상털기의 피해자가 되어서 직업을 잃거나, 다시 비(非)페미니즘적인 정체성으로 자신을 위치시키는 방식으로 감정회복을 해내가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가부장적 반동의 피해자로 고통 받고 있다. 이들이 만들어낸 폭발적 에너지를 다른 얼굴의 페미니즘 내에 접속시키고 연속적 유대를 구성해내야 한다.
이제 페미니즘 정치의 장에는 국가 페미니즘의 잔존 및 태동 세력과 온라인과 광장의 페미니스트가 있다. 그리고 온라인과 광장을 유동하며 만들어내는 또 다른 정동의 회로에 와있는 경계를 횡단하고 새로운 문화를 준비하는 페미니스트, 연대의 정치를 추구하는 페미니스트가 있다. 이제 다양한 얼굴의 페미니스트들은 특권화된 방식으로 말하지 않고, 다른 소수자를 비하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권력화하고 위계화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실현하지 않고, 우리 내부의 차이를 진압해야 할 ‘대상’처럼 간주하지 않으며, 느린 민주주의를 통해서 정치적 올바름으로 페미니즘 정치를 해나가야 한다.
'대선' 국면이라는 역사적 반복
지금 우리는 페미니즘 아젠다를 실현시킬 의지가 없는 후보에게 투표해야 하는 대선 국면에 놓여졌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들은 어떤 방식으로 페미니즘 아젠다와 정치의 장을 실현할 수 있을까? 우리가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은 직접행동주의 페미니스트 정치는 대리정치, 대의정치, 파당정치로는 번역되고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흔히 보수는 물론이고 진보 정치 리더들에게 페미니스트는 정치적 참조집단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성적 소수자 혐오, 여성혐오, 여성의 경제적 무력화 등 시급한 페미니즘 정치를 계속해서 지연시키는 낡은 진보와 마주하는 것은 질식의 경험이다. 이들은 게다가 안이하고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페미니스트들이 으레 진보 진영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긴장도 없다.
대선 국면이 오면 페미니스트들조차 누구를 뽑아서 사후적으로 페미정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지를 고민하면서 잠시 침묵한다. 그렇지만 사후적 실현에 기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대선 국면은 복잡하고 다층적이고 섬세해야 할 페미니스트 정치를 박스 안에 집어넣고 편협한 방식으로 귀결시킨다. 페미니스트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냥 진보 가부장을 믿고, 습관대로 대의정치로 포섭될 것인가? 아니면 자율적인 방식으로 페미니즘 정치를 언어화하고 광장과 온라인에서 외칠 것인가? 후자를 선택한다면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분리주의자라는 낙인화 때문에 딜레마에 놓이게 된다. 정치적 규범을 수용하라는 압박 속에서 페미니즘 아젠다를 발화할 수 없는, 비판적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에 놓인다. 이런 습관을 이제 반복하지 말자.
판타지 에코잉(Fantasy echoing), 아니면 그냥 에코잉(echoing)
이런 상황에서 페미니스트의 위치는 어디인가. 다시 욕망과 열정이라는 판타지 에코잉은 불가능한 것인가. 대선 국면이라는 역사적 반복 속에서 페미니스트는 또다시 번아웃 되고, 좌절고, 실종되는 상황에 놓일 것인가.
이제 페미니스트들은 자신을 특권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검증해가면서, 페미니즘이 어떻게 지속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지 토론해야 한다. 불평등한 권력체제에 균형을 맞추는 일은 국가나 정치인의 자발적 의지에 기댈 수 없다. 직접 행동주의에 입각한 여성주의 정치의 실현만이 반복적인 에코잉이 아닌 판타지 에코잉으로 이동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페미니스트의 이름으로 당신은 어떤 정치를 실현하고 싶은가? 여전히 정치적 열정이 있는가? 당신이 원하는 정치의 아젠다는 무엇인가? 정치적 아젠다를 행복한 남성, 이성애자, 엘리트에게 의탁하고 싶지 않다면 누구에게 의탁할 것인가? 자기 결정권의 이름으로 온/오프의 광장정치를 이어나가자.
❚ 김현미
25살에 페미니즘과 조우하여 이때부터 페미니스트로 자기명명을 하기 시작했다.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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