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상반기*함께가는여성] 기획3-‘여성대표성’ 업데이트: 불화하며 시끄럽게, 다양한 여성대표성을 떠들 때(김은희)
●기획3
‘여성대표성’ 업데이트: 불화하며 시끄럽게, 다양한 여성대표성을 떠들 때
김은희 |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연구위원 / 녹색당
2016년 찬바람이 시작될 즈음부터 겨울 내내, 시민들은 주말을 잊은 채 광장으로 발걸음 했다. 시민들이 손에 든 촛불로 민주주의에 불을 지피며 그 열기로 ‘최초 여성대통령’ 박근혜를 탄핵했다. 이 과정에서 이전의 광장과는 다른 새로운 균열을 만들어 낸 주체는 바로 여성들이었다. “민주주의는 여성혐오와 함께 갈 수 없다”고 당당히 외치며, 말하는 존재임을 드러냈다. 정치를 정의하는 관점은 다양하겠으나, 랑시에르는 정치를 ‘몫이 없는 이들이 몫을 요구하는 것’이자, ‘권리 없는 이들이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정치라고 오해해왔던, 통치활동이자 이를 위해 특정한 양상으로 분배된 권력을 행사하는 ‘치안’이 가둬버린 감각을 넘어서 ‘불화’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정치다1). 여성들은 불화를 일으키며 정치의 장소로 ‘페미존’을 형성했고,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를 냄으로써 민주주의를 채우는 열쇠말로 만들었다.
올해 3.8 여성의 날 슬로건은 광장의 외침을 이어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로 정해졌다. 거리행진과는 별도로 진행된 제33회 한국여성대회 행사장 전면에는 익숙하고도 절실한 ‘낙태죄 폐지’ ‘성별임금격차 해소’ ‘차별금지법 제정’ ‘여성대표성 확대’이라는 구호가 내걸렸고, 조기대선을 앞두고 유력한 대선(예비)후보들도 참석해 성평등 공약을 약속했다.
당일 행사에 참석해 무대를 바라보고 있던 나의 시선이 ‘여성대표성 확대’라는 구호에 머물러 있는 걸 보고는 옆자리에 앉아계신 어느 분께서 “이제 저 ‘여성대표성 확대’라는 말도 안했으면 좋겠어”라고 넋두리를 하셨다. 오래도록 여성정치세력화 운동에 기운을 쏟아 오신 분으로 왜 그런 말을 꺼내셨는지 모르는 바 아닌지라, 얼마간 자괴감 섞인 대화를 함께 나누었다.
사실 과소대표된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여성정치할당제 제도화나 이를 통한 여성대표성 제고는 ‘기존 여성운동’의 자랑할 만한 성과였다. “박근혜가 출마하면 나는 그를 찍겠다”고 말해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던 최보은씨는 “한국여성의 정치운동사 단계에서 지금의 액션은 외형적으로는 나이브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거라고 봐요. 지금은 세련될 수가 없어요. 세련되려면 내공이 쌓여야 하는데, 그걸 해보지 않았단 말이죠. 현실정치에 개입하는 방식의 운동이 지금은 거의 초기단계이기 때문에 세련미를 요구하고, 면면을 따지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오히려 트집잡기식이 될 수 있다고 봐요.”2)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2004년 총선 당시 제도개선운동과 후보추천운동을 병행하면서 비판적 평가도 없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진보 여성 운동이 채택한 제도화 전략은 일정 정도 단일한 집단으로서의 ‘여성’ 개념을 바탕으로 해왔다. 정치 영역에서 여성들이 공유하는 ‘배제의 경험(experiences of exclusion)’은 진보와 보수를 넘어 ‘여성계’가 여성정치할당제를 요구하는 연대를 형성하는 경험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여성운동이 발 딛고 있는 사회는 진공 상태가 아니었고, 폭넓은 연대를 위해서는 그 합의 수준이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론적인 철저함을 관철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나 척박하기에 여성 정치 참여 운동은 때때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인 실천을 해야 했고, 어떤 국면에서 의미 있고 부분적으로 옳았다. 과거의 누적된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로서 여성 정치 할당제의 효과는 부인하기 어렵다. 통상 30% 정도로 이야기되는 여성정치할당제 임계치(critical mass)는 발화점이지 목표치가 아니다. 여성정치할당제 제도화의 단기적 과제는 짧은 시간 안에 제도정치에 보다 많은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고, 끼어들기는 부분적으로 가능했지만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정치 구조와 문화를 재구조화하는 새판짜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한국사회에서 지적되고 있는 여성정치할당제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임계치에 크게 못 미치는 여성정치 참여 현실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여성정치 참여의 수적 확대와 질적 전환은 도식적 양자택일의 관계로 보기 어렵다.3)
하지만, 이제 우리가 좀 더 숙고해야 할 지점은 여성 정치참여 확대 혹은 여성대표성 논의가 여성정치할당제로 과도하게 수렴된 것은 아니었는지, 그리고 여성정치할당제는 ‘수적 확대’로만 좁게 다뤄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여성은 여성을 대표하는가?’ 혹은 ‘여성 정치인은 (남성보다 더) 성 평등하고 여성 친화적인가?’는 페미니즘 또는 여성정치인들에게 계속적으로 던져지는 질문이다. “성적 차이는 대표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기호로서의 여성과 존재로서의 여성 사이의 공백으로 인한 ‘여성의 대표불가능성’을 지적하기도 했다.4) 뒤집어보면 남성 정치인들에게는 그들이 ‘모든 남성을/집단으로서의 남성을 대변하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제기되지 않는다. 이러한 질문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여성이 인간으로서 존재 자체의 보편성이 부정되는 상황의 역설적 표현이다.
여성‘들’은 동질한 하나의 집단일 수 없고, 어떤 여성정치인도 여성들 모두를 대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양한 여성들 간의 차이는 은폐되거나 삭제될 이유가 없다. 서로의 차이는 여전히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고 때로는 불쾌하게 하겠지만 이제 차이는 소란스럽게 교차되고 교감되며 어긋나고 상응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란은 여성을 분열시키는 만큼 묶어줄 것이다.5)
다시, 대선이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남성후보도 있고, 수퍼우먼방지법을 내놓은 여성후보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페미니스트 정치’는 유보되고, 여성들은 누구를 찍어야 할지 찜찜함을 온전히 털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는 여성들이 판을 까는 대선후보TV토론회도 다시 추진된다고 한다. 천 명의 페미니스트가 천 가지의 페미니즘 관점에 질문하자. 그리고 그 ‘N개의 페미니즘’이 만나는 지점을 발견해내자. 하나로 뭉뚱그려진 여성대표성 보다, 다양한 여성대표성들을 ‘다발’로 만들어 여성대표성을 업데이트하자.
1) 랑시에르(2008), 양창렬 옮김,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길.
2) 정박미경·송란희(2004), 「특집 | 좌담 : 여성 정치 원년, 무엇을 할 것인가?」, 『페미니스트 저널 if』 28.
3) 김은희(2017), “그럼에도, 페미니스트 정치”, 『그럼에도 페미니즘』, 은행나무
4) 권김현영·루인·김주희·한채윤(2012), 『성의 정치 성의 권리』, 자음과 모음
5) 이현재(2007), 『여성의 정체성-어떤 여성이 될 것인가』, 책세상
❚ 김은희
여성운동에 발을 들이면서 정치세력화운동을 주요이슈로 삼아왔다. 페미니스트 정치가 각축하고 손잡고 버티고 살아남기를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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