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상반기*함께가는여성] 민우ing-우리는 서로의 용기다(노새)
●민우ing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노새 | 여는 여성민우회 여성건강팀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님을 확신한다.”
‘낙태죄’ 폐지를 기획으로 다룬 지난번 함여에서 혜원님은 이렇게 글을 끝맺는다.** 그리고 지금, 그 문장을 다시 한 번 확신하며 이 원고를 쓴다.
지난해 10월의 <검은 시위> 이후,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다양한 구호들이 한국 사회에 쏟아져 나왔다. <검은 시위>는 이어졌고, 3·8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한국의 여성대회는 ‘낙태죄 폐지’를 올해의 5대 핵심 요구사항 중의 하나로 꼽았다. 그리고 그 즈음에, 민우회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낙태’를 경험한 여성들이 만나 이야기 나누는 모임이 있으면 좋겠다”는 한 여성의 제안이었다. ‘낙태’가 형법상의 ‘죄’라는 점을 악용해 여성을 협박하는 등 침묵과 두려움 속에 여성이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지금의 불합리한 상황에서, 여성들의 임파워링이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판단으로, 즉각 이 ‘이야기모임’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인공임신중절을 경험한 여성들을 위한 이야기모임이 열립니다
‘이야기모임이 열린다’는 공지를 올리자마자, 차곡차곡 여성들의 신청이 이어졌다. ‘아직까지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다’는 분, ‘조금씩 내 경험을 털어놓을 때마다 조금씩 스스로가 단단해지는 걸 느끼고 있다. 더 단단해지기 위해 모임에 신청한다’는 분, ‘비슷한 경험을 한 분들에게 위로받고 싶다’는 분들이 모였다. 그렇게 <달마다 작은 이야기모임: 있잖아, 나 낙태했어>가 시작됐고, 3월부터 4월 현재까지 총 9명의 여성들을 만났다.
그녀들의 키워드
이야기는 그녀들이 가져온 키워드를 통해 이어졌다. 겨울방학, 배신감, 성교육의 부재, 피임, 산부인과에 가기 두려움, 공포, 남자친구, 거짓말, 경구피임약, 비밀, 부활, 그리고 페미니즘까지. 수술 전후를 함께 있(지 않았)었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 그 때 당시의 감정들, 그 경험을 기억하는 자신만의 굴곡,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그 경험의 얼룩과 무늬들에 대해 말하고, 또 듣는 시간이었다.
서로 다른 무게로 간직하고 있다
예상했던 대로, 여성들의 경험은 그 모양도 결도 무게도 제각각이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언젠가 짜두었던 시나리오대로(?) 곧바로 병원을 찾은 여성이 있는가 하면, 임신테스트기를 몇 개나 사서 재확인에 재확인을 거친 이도 있었다. 두 팔이 묶인 채 누워야 했던 수술대에서의 공포가 지금까지도 선명한 이가 있는가하면, 괴로운 기억이기 때문에 빨리 잊어버려 수술 당시의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이도 있었다. 크게 염려했던 수술이 너무 간단하게 끝나버려서 황망하기도 하고, 간단히 끝난다던 수술의 통증과 후유증이 너무 심해 몸고생 마음고생을 심하게 겪은 이도 있었다. 쉽게 떨쳐지지 않는 죄책감에 왕왕 기도하는 곳을 찾는다는 이도,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자신이 ‘도덕성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노파심이 든다는 이도 있었다. 한 참가자가 남겨준 편지의 내용대로, “모두 같은 경험을 했지만 그 안에서 각자의 이야기는 다 다르네요. 인생의 모든 부분이 그렇듯이.”
그러나 그 속에 모두가 공통으로 겪은 감정의 결 또한 존재했다. 내 삶이 나 자신의 통제권 바깥으로 나아가려 할 때의 두려움과 막막함, 당장 내 몸으로 겪게 될 수술에 대한 공포, 이 모든 두려움과 고통을 오롯이 (네가 아닌) 내가 겪고 느껴야 한다는 중압감, 여성들이 낙태를 ‘너무 쉽게’ 한다고, 낙태죄가 사라지면 ‘더 쉽게 낙태할 것’이라는 세간의 곡해에 대한 격노까지.
‘낙태’가 ‘죄’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
“낙태가 불법이잖아요. 그래서…” 그녀들의 이야기 속에 자주 등장했던 말이다. 여성의 원치 않는 임신과 임신 중단을 ‘범죄’로 여길 때 일어나는 일은 뭘까.
더 좋은 병원을 두고 일부러 조금 더 후미진 병원을 찾게 되거나, 더러운 수술도구와 수술대를 보고도 비위생적인 병원의 환경에 대해 불만을 제기할 수 없거나, 조금 더 나은 수술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내 몸으로 받게 될 수술인데도 필요한 의료 정보를 받아볼 수 없고, 설명 듣지 못했던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더라도 상담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마음 졸이는 일. ‘낙태’가 범죄일 때, ‘낙태죄’는 여성에게서 가장 기본적인 의료권을 빼앗아간다. 그리고 의료권이 박탈된 채 행해지는 수술은 너무도 손쉽게 여성의 건강과 생명을 빼앗아가고 있다.
가려져있는 정보는 의료 정보 뿐만이 아니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형편 없는 성교육에 대한 지탄에까지 가 닿았다. 남자는 교실에, 여자는 음악실에 불러다놓고 ‘낙태 비디오’를 틀어주며 (정보가 아닌) 겁을 강요하는 ‘성 엄숙주의’ 사회에서, “밖에다 싸면 괜찮다”, “임신이 뭐 그렇게 쉽게 되는 줄 아냐”, “콘돔 끼면 남자는 못 느끼는데 콘돔을 끼라니 이기적이다”라는 남자의 말에 응수하는 법을, 성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을, 누군가는 ‘너무 늦게’ 알게 되기도 한다.
여성들이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강제로 떠안게 되는 일도 큰 문제다. 죄책감의 지뢰는 어디에나 널려있고, 낙태는 ‘죄’라고, 낙인찍으면 찍을수록 여성들이 ‘왜 이렇게 됐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를 고민하다가 ‘내가 점점 작아지는 일’은 너무 쉽게 일어났다. 병원비를 ‘더치페이’하는 것으로 손쉽게 ‘책임을 분담했노라’ 말하고 사라진 파트너도, 함께 가기로 한 병원에 나타나지 않는 파트너, 친구들과 하하호호 ‘내가 누구 임신시켰다’ 안주거리 삼는 파트너도 지뢰처럼 널려있어서, 아무리 피하려고 발버둥 쳐봐도, 여성들은 비밀과 죄책감, 우울과 자괴감의 미로에서 홀로 길을 잃기도 했다. (‘누가’ 낙태를 ‘쉽게’ 생각한다고?)
이것은 이야기의 연대: 우리는 서로의 용기가 될 거야
첫 모임에서 한 참여자가 그런 말을 했다. ‘그건 니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오랜 시간 힘들었다고, 이제 내가 그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인지하며 힘을 느낀다고. 그 힘을 나누면서, 마지막 시간에는 함께 다음 모임 참여자들에게 보내는 연대의 메시지를 썼다.
“이 자리에 와주어서 고맙습니다.
당신이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보내온 시간, 경험, 용기에 큰 지지를 보내요.
같은 경험을 나눈 우리는 열심히 싸웠고, 싸우고 있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이 모임이, 느끼지 않았어도 될 불필요한 감정들과 죄책감을 느끼고 싸우느라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 그 감정들을 툭툭 털어버리는 모임이 되었으면 한다. 이것은, 이야기의 연대이고, 우리는 서로의 용기가 될 것이다.
<달마다 작은 이야기모임>은 5월 중순, 6월 초에 ‘달마다’ 열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민우회 홈페이지 및 SNS를 참고해주세요. 7월에는 작은 이야기모임을 만들고 싶은 이들을 위한 이야기모임 가이드북이 e-book으로 발간될 예정입니다.
*본 글에서는 참가자 개인정보가 드러나지 않도록 사례를 각색하였음을 밝힙니다.
**함여 222호, <국경을 넘어 우리는 연대한다>
❚ 노새
아름답게 살려면 ‘존나게’ 싸워야 한다.
“낙태죄를 폐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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