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상반기*함께가는여성] 문화산책-똑똑한 여자를 ‘편집’하는 창작자에게: 영화 <히든 피겨스>, <미스 슬로운>, 드라마 <스콜피온>(리아)
★문화산책
똑똑한 여자를 ‘편집’하는 창작자에게: 영화 <히든 피겨스>, <미스 슬로운>, 드라마 <스콜피온>
리아 | 여는 민우회 회원
미디어에 자주 나타나는 ‘성 역할 패턴’ 하나를 소개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 딸 헬레나는 정체 모를 바이러스에 노출돼 죽을 위기에 놓인다. 주지사는 천재 미스터리 사건 해결팀 ‘스콜피온’을 호출한다. IQ 197 남성 윌터는 “의료 사건인데 왜 절 불렀어요?”라는 ‘논리적’ 질문을 던진다. 여성 페이지는 “주지사님, 이런 일을 겪다니 정말 안타까워요”라며 “저도 아이가 있는데 지금 심정이 어떨지 상상도 안 돼요”라고 말한다. 미국드라마 <스콜피온> 시즌1에 나오는 장면이다.
공감 능력은 중요한 재능이다. 공감 능력이 좋은 사람은 타인을 설득하거나 타인과 협상하는 데 능하다. 언어, 수리 지능이 그렇듯, 공감 지능 역시 아무나 갖지 못한다. 문제는 공감 지능이 여성적인 특질 또는 여성적 의무 정도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남자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여자는 감정을 이해받고 싶어 한다” 같은 말을 떠올려보자. 과학적으로 보이지만 성 편견을 바탕으로 한 말이다. 페미니스트 뇌과학 비평가 코델리아 파인은 책 『젠더, 만들어진 성』에서 여성과 남성 간 차이를 주장하는 많은 학설을 반박한다. 연구자들이 성 편견을 전제로 실험에 임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이야기다.
여성과 남성 캐릭터를 만들 때 본인이 가진 편견을 그대로 투영하는 창작자들이 있다. 그래서일까. 창작물에 등장하는 여성과 남성은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보다 젠더 통념에 더욱 부합한다. 일부 남성 창작자는 똑똑한 여성 캐릭터를 남성이 찾는 ‘뮤즈’, 영리한 ‘미녀 스파이’, 빈틈없고 ‘예쁜 모범생’, 현명한 ‘어머니’ 정도로만 그린다. 똑똑한 남성 캐릭터는 상황이 다르다. 그들은 똑똑한 남성을 성별이 아닌 ‘온전한 특성’으로 묘사할 줄 안다. 비운을 타고난 예술가, 괴팍한 박사, 천재 사이코패스, 사회성 없는 탐정, IQ 높은 너드 대학원생 등. 이들은 ‘여성적 시각에서’ 편집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미디어를 통해 롤모델을 구축하기도 한다. 남자 청소년은 이 과정이 어렵지 않다. 미디어에는 ‘닮고 싶은’ 남성이 한 무더기로 출연한다. 여자 청소년은 상황이 다르다. 자신이 ‘똑똑하다’는 자의식이 어느 정도 있는 청소년은 혼돈을 느낀다. 기존 미디어에서 롤모델로 삼을 만한 똑똑한 여자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실에 그런 여자가 없어서가 아니다. 남성 창작자, 혹은 남성주의적 사고 알고리즘을 장착한 창작자들이 똑똑한 여자를 본인 취향대로 가공해서다.
나는 미디어가 똑똑한 여성을 ‘있는 그대로’ 다루는 풍경을 보고 싶었다. 괴짜여도 좋고, 자기중심적이어도 좋으니 자연스럽게 두뇌를 과시하는 인물이 나오길 바랐다. 올 상반기에 이 기준을 충족하는 영화를 두 편 봤다. <히든 피겨스>와 <미스 슬로운>이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60년대 NASA에서 일한 흑인 여성들 이야기다. 캐서린 존슨은 천부적인 수학 능력을 갖췄다. 도로시 본은 프로그래머다. 메리 잭슨은 나사 최초 여성 엔지니어를 꿈꾼다. <히든 피겨스>는 흑인인 동시에 여성으로서 ‘이중 차별’을 받는 이들이 백인과 남성을 제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아쉬운 지점도 있다. ‘능력이 뛰어난’ 흑인 여성만이 차별을 딛고 일어서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여성 주인공들은 겸손하지 않다. <히든 피겨스>는 여성을 남성 ‘뮤즈’ 정도로 그리지 않는다. 이것만으로도 조명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 캐서린은 “이게 얼마나 엄밀한 계산을 요구하는 프로젝트인 줄 아느냐”는 질문에 “그것은 엽총으로 1000피트 거리에 있는 새가 작은 구멍을 통과하는 것을 잡아내는 것과 같다”라며 “나는 명사수다”라고 대답한다. 나는 스크린에 ‘명사수’라는 자막이 떴을 때 감동했다. 자기 실력에 확신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표현이니까. 메리 잭슨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내가 남자라면, 진작 엔지니어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영화 <미스 슬로운> 주인공 슬로운도 비슷한 성향을 보인다. 슬로운은 승률 높은 로비스트다. 그는 승리만을 생각한다. 슬로운은 남을 이길 수만 있다면 도덕적으로 어긋나는 결정일지라도 과격하게 밀고 나간다. 이런 태도는 슬로운을 고립되고 고독한 존재로 만든다. 슬로운은 개의치 않는다.
슬로운은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먼 인물일 수도 있다. 슬로운은 ‘여성 인권’에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는다. 애초에 윤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까. 나는 슬로운과 같은 여성 캐릭터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슬로운은 “여자는 공감을 잘하고 타인을 배려한다”는 통념과 반대로 움직인다. 그는 온 신경이 자기 자신에게 쏠려 있다.
슬로운 같은 남성 캐릭터는 흔하다. 성공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남성 말이다. 이들은 “남성은 공격적이고 성취욕이 강하다” 통념과 부합한다. 여성은 미디어에서 어떻게 그려졌나. 전에 봤던 고전 할리우드 영화 한 편이 생각난다. 인물들이 악당과 싸우는 장면이었다. 여성이 중요한 순간에 마음에 약해져 모두가 함정에 빠졌다. 이런 서사, 너무 보편적이다.
여성주의 시각에서 <히든 피겨스>나 <미스 슬로운>은 논쟁점이 많은 영화다. 어떤 장면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장면도 있다. 슬로운은 때론 비열한 선택을 한다. 나는 두 영화가 ‘머리 좋고 승리 욕구가 충만한 여성’을 충실하게 그려냈다는 점에 만족한다.
나는 똑똑한 여자들이 미디어에 더 많이 노출됐으면 한다. 단, 창작자들이 그들을 진심으로 조명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남자 천재를 다룰 때처럼 말이다.
❚ 리아
여자들이 잘난 척을 더 많이 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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