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상반기*함께가는여성] 활동가 다리어리-아파서 배우는 것들(정하경주/달개비)
★활동가 다이어리
아파서 배우는 것들
정하경주(달개비) | 여는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계단에서 고꾸라졌다.
올해 구정 연휴가 끝나갈 즈음 밤마실을 나가려고 집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아래층 계단의 센서 등이 꺼져 있어 센서 등을 켜려고 벽을 짚고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느끼는 찰나 내 머리는 아랫집 문 앞 모서리에 처박혀 있었다. 쿵하는 소리에 함께 살고 있는 친구가 놀라서 계단을 내려와서 센서 등을 불을 켰다.
늙은 호박 두 덩이
계단에는 늙은 호박 두 덩이가 놓여 있었다. 아래층 사람이 계단에 놓은 것이었다. 계단이 어둡지 않았다면 호박을 피해서 계단을 내려갔을 텐데, 아래층 사람들이 구정연휴 긴 휴가를 떠나면서 센서 등을 꺼 두어서 미처 호박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며칠 전부터 호박 두 덩이가 놓여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호박을 보지 못한 내 부주의를 탓하며 마실을 포기한 채 집으로 돌아 왔다. 무릎이 너무 아파서 바지를 걷으니 왼쪽 다리 정강이에 멍이 들어 있었고 계단 모서리에 패여 피가 조금 났다. 상처에 약을 바르고 차가운 찜질을 하고 누워서 안정을 취하면 나아지겠지 싶었다.
타박상:MRI
다음날 다리가 많이 부었다. 혹시 뼈에 이상이 있을까 싶어 반차를 내고 병원에 갔다. 엑스레이 상 뼈에는 이상이 없단다. 타박상이니 찜질하고 약을 먹으면 나아질 거라고 했다. 일주일 지나니 정강이 멍이 발등으로 내려왔고 이주일쯤 되니 멍은 사라졌다. 정강이 뼈 옆으로 물컹거리는 무언가가 없어지지 않았고 가끔 시큰거리는 느낌이 있었지만 걷는 것은 이상이 없어서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고 한 달을 보냈다. 하지만 물컹거리는 증상이 없어지지 않아 다른 병원에 갔다. 의사는 타박상으로 인해 근막에 염증이 생긴 것 같은데, 그러면 걸을 때 아플 거라며 MRI를 찍어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해 봐야 한다고 했다.
세 번째 병원
걷는 것에는 문제가 없어서 MRI를 찍으라는 의사가 미덥지 않았다. 세 번째 병원을 찾았고, 타박상으로 으깨진 지방조직이 염증을 유발하는 것이니 우선 물을 빼고 안 되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수술을 하지 않으려고 토요일마다 병원에 가서 다리의 물을 뺐다. 그렇게 또 한 달이 지났지만 차도가 없자, 의사는 염증유발 조직을 긁어내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타박상인데 수술을 해야 하다니, 이상이 있을 때 빨리 병원에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앞으로는 바로 병원에 갈 것을 다짐했다.
병원에 가기 싫은 것은 이유가 있다
금요일 오후 반차를 내고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수술 후 일상생활에 지장 없다고 말했다. 다음날 페미피켓대행진에 당연히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수술대에 누웠다. 국소 마취를 하고 기다리는데 의사가 의대생 3명과 함께 수술실에 들어왔다. 의사는 의대생들이 실습을 나왔는데, 수술하는 것을 봐도 되냐고 물었다. 당황스러웠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의사는 수술 전에 나에게 간단히 말했던 것을 실습 학생들에게 자세히 말한다. 내 증상을 학생들에게 설명하던 의사가 갑자기 나에게 “계단은 부서지지 않았어요?”라고 농을 친다. 나는 “네, 건물이 무너졌어요!”라고 받아치지 못하고 “호박이 두 덩이 있었고…….”구구절절 설명했다.
“계단은 부서지지 않았어요?”라는 재미없는 의사의 농을 듣는 순간,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20대 초반에 목감기가 심하게 걸려 2주일 정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병원에 갔다. 의사가 증상을 물어 목도 아프고 입맛도 없다고 말했다. 돌아오는 의사의 대답은 “입맛 더 좋아서 뭐하게요”였다. 수술 전에는 아프면 빨리 병원에 가야지 다짐했지만, 한남 의사를 만나야 하는 병원은 역시 가기 싫다.
나만 페미피켓대행진 못 갔어 ㅠㅠ
의사 말대로 수술 후 걸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아주 천천히 움직이지 않으면 개복되어 있는 상처에 박혀있는 나사가 느껴졌다. 결국 나만 페미피켓대행진에 못 갔다. 상담소 활동가 텔레그램방에 수술경과를 공유하면서 ‘계단에 호박 놓지 않기 운동본부’발족해야 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나도 다치기 전에는 계단에 호박이 놓여있는 것을 보고 사람이 다칠 수 있다고 인식을 하지 못했었다. 이번 일로 계단에 놓인 물건은 흉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말그대로 뼈아픈 배움을 수행 중이다.
❚ 정하경주(달개비)
천천히 걸으며, 빠름에 익숙한 나와 거리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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