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하반기*함께가는여성] 아홉개의 시선_우리들의 안전 지대, Untitle
★아홉개의 시선
우리들의 안전 지대, Untitle
가연(성가연) | 진주여성민우회 활동가
내가 페미니스트가 된 것은 페미니즘을 접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혼자 책상에서 들여다본 몇 권의 페미니즘 이론서들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현실과 활자 속의 간극을 인식하게 해서 무력해지게 만들었다. 이런 내가 페미니스트가 된 것은 일상 속에서 페미니즘을 추구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였다. 2016년의 강남역 여성 혐오 살해 사건 당시 페미니즘 스터디 단톡방에 “너무 화가 나네요. 저는 혼자서 대자보라도 붙여야겠어요.”라는 나의 말 한 마디에 “저도 같이 해요.” 라고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 그 손들을 서로 맞잡았을 때 나는 내가 더 이상 여성 혐오로 가득한 세상 속의 무력한 개인이 아님을 알았다. 그 손들의 온기 덕분에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었고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혼자 읽거나 분노하는 것을 넘어 페미니즘을 위해 시간을 따로 내어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쉽지 않기에 더욱 가치 있다. 진주여성민우회의 청소년 인권 모임 언타이틀은 진주 지역의 중, 고등학생과 기타 청소년 인권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소모임이다. 학교와 학원 스케줄로 바쁜 멤버들의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유동적으로 만난다. 만나서 무얼 하냐고? 우리는, 이야기를 나눈다.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해외 드라마를 함께 감상하기도 하고 진지하게 언타이틀의 방향 대해 고민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카페에서 딸기 스무디 같은 걸 마시며 수다를 떤다. 학교에서 교사나 같은 반 친구에게서 들었던 성차별적 “빻은 말”을 공유하며 서로 분노하고 열심히 욕을 하고 서로를 위로 한다. 페미니즘 운동 내부에도 존재하는 나이주의, 예컨대 교복을 입은 페미니스트들을 향해 “기특하다”고 말하는 분위기들에 대해서도 분노한다. 일상 속에 널리고 널린 것이 성차별이며 나이주의이기에 우리의 입은 쉴 틈이 없다.
언타이틀 멤버들이 언타이틀의 존재를 알고 활동하게 되는 것은 주로 진주여성민우회의 공개 페미니즘 강연들을 통해서다. 공개 강연을 열면 어떤 경로로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한두 명씩 찾아온다. 처음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페미니즘 강연을 듣기 위해 찾아온다는 사실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강제적인 야간 자율 학습이나 학원을 빠지고 페미니즘 강연을 들으러 오는 학생들의 선택이 무척 대단해 보였다. 이제는 페미니스트 각자가 속한 생애 주기에 따라 고유의 문제들을 껴안고 고민할 뿐 ‘나이가 어린데 페미니스트라니, 민우회에 오다니!’라는 생각이 얼마나 나이주의적인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입시라는 단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달려가기를 강요받는 갑갑한 시절 안에서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 페미니즘을 ‘선택’하는 것, 그 선택을 민우회 안에서 함께 하기로 나눈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함께 하는 기쁨을 느낀다.
함께 하는 기쁨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혼자 있을 때의 외로운 싸움들이다. 언타이틀의 멤버들은 각자의 일상에서 고군분투 하고 있다. P는 도저히 변하지 않을 듯한 엄마가 그래도 변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식탁 위에 슬쩍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를 올려놓았고, K는 ‘노브라의 권리’를 위해 엄마에게 긴 편지를 썼고, Q는 각종 페미니즘 모임에서 칭찬처럼 듣는 “청소년인데 기특하다”라는 말이 얼마나 차별적인지를 ‘페미니즘적인 페미니스트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여전히 노력 중이다. 이러한 노력들은 세상을 눈에 띄게 변화 시키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노력을 하는 당사자들, 지켜보는 페미니스트 동료들을 변화 시키는 데는 큰 도움이 된다.
언타이틀은 이러한 싸움들을 더 잘 하기 위한, 열심히 하기 위한 안전망이 되는 안전지대SAFE ZONE다.
언타이틀은 진주여성민우회의 청소년 인권소모임입니다. 한 달에 1~2회 모임을 하고 있고, 모임에서는 외국 드라마를 보고 페미니즘 비평도 하고, 거리액션을 나가기도 합니다. 언타이틀 소모임 활동을 하시고 싶다면 진주여성민우회 트위터 @jinjuwomenlink로 연락주세요.
❚가연
반년차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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