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상반기*함께가는여성] 민우ing_안개가 걷힐 때 : 자, 이제 낙태죄 폐지 타임
민우ing
안개가 걷힐 때 : 자, 이제 낙태죄 폐지 타임
노새(홍연지)
여는 민우회 여성건강팀 | 원고 마감을 잘 지키는 사람, 3점슛을 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낙태죄는 사문화 된 법인가?
요즘도 한 달에 서너 건의 임신중절 상담전화가 온다. 애타게 병원을 찾고 있는 사람들, 100여만 원에 달하는 병원비를 구하는 사이 한 주 한 주 시간이 흘러 후기임신이 된 여성들, 병원이 요구하는 수술동의서에 서명해줘야 할 남성이 연락을 끊어버려 병원은 찾았지만 수술 받지 못하는 여성들, 몇 해 전의 수술 사실을 고발하겠다고 협박하는 전 파트너의 스토킹에 신고도 할 수 없이 속수무책으로 혼자 고민하는 여성들의 전화가 주를 이룬다.
‘낙태죄’가 있지만 기소되는 사건은 한 해 십여 건에 불과하고, 산부인과 의사회에서 추정하는 한 해 임신중절수술 건수는 100만 건1)에 달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이미 암암리에 다 수술 받을 수 있는데 뭐가 문제냐?”, “사문화된 법인데 여성들이 무슨 피해를 입는단 말이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게 ‘덮어놓고 퉁 치기엔’ 너무 많은 문제들이 암암리에 산적해있다는 것이 바로 문제다. 어느 병원에서나 중절수술을 한다지만, 낙태죄가 있기 때문에 병원 정보나 수술 정보는 가로막혀 있다. 한 해 수십만 건이나 이뤄진다는 이 수술에 대한 믿을만한 정보를, 여전히 대부분의 여성들은 찾지 못해 헤맨다. 수술 가능한 병원은 찾을 수 있어도, ‘괜찮은 병원, 믿을만한 병원, 안전한 병원’을 알기 어렵다는 것도 문제다. 어디 여성 당사자들만의 일일까. 의사들 역시 수련 과정 중 ‘안전한 임신중절 방법’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다.2) 초기 임신의 경우 수술적 방법보다 안전하게 임신중단이 가능한 유산유도제와 같은 의료정보에 대해 의사가 잘 알지 못한다. 약물 도입도 되어 있지 않아 병원을 찾은 여성들에게 놓인 의료적 선택지가 궁색한 것은 당연지사다.
인구 수에 따라 바뀐 국가의 '가족계획' 표어·포스터. '둘만 낳아 잘 기르자(1970년대)', '둘도 많다(1980년대)'를 거쳐 '하나는 부족합니다(2015년)'
1) 2005년 보건복지부의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결과 한 해 약 3천 만 건의 수술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실제 수술 건수는 이 3배인 100만여 건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2) 2017.1.24 국회 <불법 인공임신중절수술 논란에 대한 해결책은?> 토론회. (직선제)대한산부인과의사회 의사의 발표중.
“의료 과실로 태아의 일부가 자궁에 남아있어 재수술을 해야 한다고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이전 수술과 같은 금액의 재수술 비용을 청구했고, 전 그 병원에서의 기억이 너무 좋지 않아서 다른 병원을 찾아가고 싶은데 불법 중절 수술을 받았다는 걸 말하기도 어렵고, 어떤 상황인지 도움을 청할 데도 없고, 다시 수술비용을 마련하는 것도 너무 막막합니다”
“일부러 외곽지역에 있는 작고 허름한 개인병원을 찾아갔어요. 왜, 누가 봐도 눈에 띄지 않는 병원 있잖아요. 수술 후에 배가 계속 아프고 하혈이 심했는데, 산부인과에 가보고 싶어도 (중절)수술했다고 말을 못할 것 같아서 병원은 못 갔어요. 혼자 앓다 보니까 ‘혹시 병원 때문인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힘들더라고요”
“외국에서 살다 온 제 친구 말로는 임신 초기에는 약물로도 안전하게 낙태할 수 있다고 하던데, 제가 갔던 병원에선 그런 이야길 들은 적이 없고 수술밖에 선택지가 없었어요. 전 워낙 초기에 발견해서, 수술하려면 아기집이 보여야 한다고 해서 심지어 몇 주 더 기다렸다가 더 비싼 돈 내고 수술 받았어요”
(2017년 임신중절 당사자 이야기모임 중)
상담전화를 받을 때마다 드는 참담함도 있다. 인공임신중절이 불법이기 때문에, 당장 의료적·사회적·심리적 지원과 정보가 절실한 여성들에게 심리적 지지 외에는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고 답답하다. 이게 다, 낙태죄가 ‘사문화되었다’고 해도 전혀 괜찮지 않은 이유요, 이미 발생한 고통과 피해에 우리 사회가 책임을 통감하며 하루 빨리 낙태죄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 되겠다.
‘생명권 대 자기결정권’이란 프레임은 틀렸다
국제사회 역시 한국 정부에 ‘낙태죄를 비범죄화할 것’을 지속적으로 권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사회적 합의가 우선’이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3) 필요한 의료정보와 병원을 쉽게 찾을 수 있고,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의료시술을 받을 수 있는 건강권, 몇 명의 아이를 언제 누구와 함께 낳아 어떤 가족을 꾸릴지에 대한 권리는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 인권의 문제를 ‘사회적 합의’의 문제로 돌릴 순 없다. 얼마나 더 많은 사회적 고통이 쌓여야 당사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실질적인 변화가 만들어질까. 고통은 이미 차고 넘친다.
‘낙태’의 문제는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충돌’이란 흔한 말은 완전히 틀렸다. 일본의 형법을 따라 낙태죄를 형법 안에 넣었고, 인구증가로 산아제한이 필요하자 다시 일본의 우생법을 따라 ‘모자보건법’을 만들어 예외적인 허용사유를 만든 후, 국가 주도의 산아제한정책을 오랫동안 펼쳐온 한국사회가 걸어온 역사에는 ‘태아의 생명’도 ‘여성의 자기결정권’도 없다. 낙태죄를 두고, 인구가 많을 땐 처벌하지 않다가 인구가 적어지자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에는 ‘오직 인구만이’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낙태죄 이슈는 ‘국가의 인구조절정책 대 국민(여성)의 기본권의 충돌’이라고 하는 게 훨씬 더 본질에 근접한 말이다.
자, 이제 다 같이 낙태죄 폐지 타임!
‘낙태’를 다룬 다큐멘터리 <자, 이제 댄스타임>에는 자신의 임신중절 경험을 들려주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뿌연 안개 같은 모자이크 뒤에서 이야기하던 그녀들의 얼굴은, 영화의 중간에 마치 안개가 걷히듯 우리 앞에 선명하게 등장한다. 그 순간, 우리 역시 어떤 진실, 어떤 용기, 어떤 구체적 현실과 얼굴 앞에 마주서게 된다. 마치 <검은 시위>때 광장에 나와 자신의 수술 경험을 증언한 여성들의 얼굴과 용기를 마주할 때와 비슷한 느낌으로. 한국 사회가, 그런 순간을 더 많이 마주하며 이 문제를 해결해나가길 바란다. 만약 한 해 100만 건의 수술이 이뤄진다면 100만 건의 이야기, 100만 건의 진실이 있을 것이고, 더 많은 여성들이 용기 내 그 진실을 말해주기를, 더 많은 이들이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기를 바란다. 올해 민우회는 전국 9개 민우회 지부와 함께 이 다큐멘터리 <자, 이제 댄스타임>를 상영하는 시민 워크샵 “자, 이제 낙태죄 폐지 타임(5~6월)”과 전국에서 활동하는 시민 액션단(6월~)을 운영할 예정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여성의 77.4%가 낙태죄 폐지에 찬성한다.4) 5월 24일에는 낙태죄가 헌법에 위배되는지를 묻는 위헌소송의 공개변론이 있다. 바야흐로 중대한 국면에 와 있는 2018년이다.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여성의 삶을 억압했던 낙태죄와 이제는 드디어 이별할 수 있을지, 낙태죄를 폐지하고, 여성의 인권에 기반한 새로운 변화들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지- 올해, 더 많은 여러분과 더 많은 지역에서 ‘안개가 걷힐 때’를 만들어 나가며, 2018년을 낙태죄 폐지의 원년으로 만들었으면 한다.
3) UN 여성차별철폐협약(이하 CEDAW)위원회는 이미 2011년 한국 정부에 ‘여성의 재생산권 보장을 위해 임신중절을 처벌하는 형법상의 낙태죄를 재고할 것’을 권고했다. 지난 3월 열린 CEDAW 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임신중절을 비범죄화하고 처벌조항을 삭제할 것, 안전하지 않은 임신중절로 합병증을 겪는 경우를 포함해 임신을 중단한 여성에게 양질의 지원 체계를 마련할 것’을 재차 촉구했다.
4) 김동식 외. 16-44세 여성 2,006명을 대상으로 2018년 1~2월 실시한 온라인조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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