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9*10월호 [지역News]_사람을 만다다
[지역News]
사람을 만나다
지역여성 복지욕구 조사를 위한 설문 조사 활동을 하고 난 후
박은영 ●
설문조사를 위한 지역 주민(여성)의 명단을 받아 들고 지도에다 주소지를 확인하면서 저 번지수 하나하나에 어떤 사연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도 되고, 문전박대 당하거나 철없는 멘트로 실수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일었다. 더구나 내가 받아 든 명단엔 유난히 2~30대가 많아 내가 설문조사 할 수 있는 낮 시간대엔 일하러 나가서 집에 사람이 없을 것 같아 기대했던 많은 만남들이 이뤄지지 않으리란 걱정도 들었다. 일단 시작해보자. 대단한 모험을 떠나는 양 대범함으로 첫 전화번호를 누르자 아주 쉽게 오시라는 응답이다. 엇, 생각보다 쉽네?
취업을 간절히 원하는 20대의 미혼모, 나의 얕은 복지정책에 대한 지식으로는 감히 말도 붙이지 못할 게 뻔한데, ‘엄마가 되었다’라는 생체 변화가 이 젊은 여성에게 분명 큰 생존욕구와 삶의 의욕을 준 것 같다. 10년 이상의 나이 차이에도 이 젊은 엄마는 나보다 더 삶을 잘 아는 듯하다. 이어서 만난 70대 할머니, 자식이 없으셔서 자매들의 도움으로 집 얻어 혼자 살고 계신다. 나이가 드셔서 그러신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평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득하시다. 역시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다. 무방비로 설문조사를 나온 조사원일 뿐 영양가 있는 조언은 내게서 나올 자원이 없다.
일 나간 사람들을 위해 아이디어를 짜내 전화통화하고 설문지를 서류봉투에 두고 나왔더니 다음날, 가을날 감나무에 열린 붉은 감 마냥 열매처럼 설문지가 대문마다 꽂혀있다. 못다 나눈 사연들이 그 안에 도식화된 설문조항에 녹아 있음을 느끼자 마음이 아파온다. 한 엄마의 쪽지, 차량으로 노점을 하는데 초등학교 아이들의 교육비가 많이 부담되고, 늦게 귀가하는 터라 아이들 건사하기가 여의치 않아 많이 힘든 모양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외식이나 휴가, 가족들과의 여가는 꿈도 꾸지 못하는 한부모 가정의 엄마들과 아이들, 형편을 알고 몰래 쌀을 놓고 가곤 했던, 큰 딸의 예전 중학교의 학생회장 엄마를 눈물을 글썽이며 추억하는 한 엄마(큰 딸이 고등학교에 와서도 그 쌀은 계속 현관 앞에 놓여 있었고 어느 날 중단되자 그 분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이 된다신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여의고 유가족 지원으로 집을 마련하자 여러 복지 혜택이 중단되어 어려움을 겪는 한 엄마는 자신이 이런 설문조사의 대상이 된 것에 못내 자존심 상해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만난, 이혼한지 얼마 안 되는 20대 엄마는 하루 종일 일하느라 쉴 틈이 없다가 간만에 쉬는 날 집에서 친구랑 쓴 소주로 푸념 푸닥거리를 하고 있다. 얼떨결에 동참하게 된 그 푸닥거리에 난 사실 거기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이에겐 위로가 되지 않고 자기보다 형편이 좋은, 다만 엄마라는 공감대만이 있는 먼 발치의 과객일 뿐이다. 몇 순배 오고 간 소주로 얼굴이 벌겋게 되어 20여부의 설문지를 들고 돌아오는 길, 마치 먼 여행을 갔다 오히려 지친 마음을 안고 돌아오는 기분이다. 하나같이 곰팡내 나는 낮은 천장의 지하에, 깊이 패인 상처와 심신의 피로를 안고, 하나같이 자신의 미래를 불안하게 꺼내드는 그들에게 ‘힘내세요, 잘 될 거예요, 돌아보면 생각처럼 그렇게 힘든 일만 있진 않을 거예요’라는 말이 얼마나 약발 가는 위로가 될까. 이 설문을 하는 난 그들에게 하루하루 먹고 살 걱정 없이 남는 시간에 봉사라는 허울로 지적인 여가를 즐기는 속 편한 여인네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녀들 품 안에 있는, 나이보다 조숙한 아이들은 어쩌면 내가 그녀들 대신 손을 잡아줘야 할 또 하나의 과제가 아닐까, 그것보다 그들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할 수 있는 접근과 대화의 테크닉을 우선 배워야 한다. 나는 절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아니라 다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하는 동반자일 뿐이니까.
서울동북여성민우회는 지난 8월말부터 9월초까지 10여명의 회원들이 도봉구 방학1,2동을 중심으로 지역여성들의 복지 욕구 조사를 위한 설문조사 작업을 진행하였다.
사회양극화가 점차 심화되고 있는 현재, 우리들은 복지에 대한 관심과 욕구가 높아지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거시적인 따라서 최소한의 복지정책만이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이제 복지정책은 구체적으로 각 지역의 요구에 맞게 새롭게 구상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 시작으로 우리들의, 우리와 함께 사는 지역의 여성들의 복지에 대한 생각과 그 요구를 스스로 파악하고 그 대안 마련을 시작하고 있다.
박은영 ●서울동북여성민우회 새내기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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