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상반기-함께가는 여성] 민우ing_‘[단독]’ 이런 기사 그만 써라
[2020 상반기-함께가는 여성] 민우ing
‘[단독]’ 이런 기사 그만 써라
3월 23일, 서울지방경찰청 신상정보공개 심의위원회에서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핵심 가해자의 신상정보 공개 여부를 심의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올라왔다. 만약 공개가 결정된다면 이는 성폭력 혐의로는 첫 사례였다. 신상공개가 실효성 있을까 하는 고민과는 별개로, 여태까지 신상이 공개된 피의자 면면을 떠올려 보면 신상공개는 수사기관이 사건을 어떠한 무게로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한 메시지로 느껴지기도 했다.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던 중, SBS에서 [단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피의자의 신상정보를 먼저 공개해버렸다.
성폭력 사건 보도의 핵심은 보도의 목적과 이유
해당 뉴스는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이 조○○이 누구인지부터 전해드리겠다’며 피의자의 신상을 조목조목 읊는다. 피의자가 언제 대학교를 다녔는지, 어떤 교내 활동을 했는지, 교우 관계는 좋았는지, 심지어 글쓰기를 좋아해 학내 독후감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는 TMI* 까지 전한다. 피의자가 글쓰기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알리는 데 꼭 필요한 정보였다면 이를 전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피의자가 글쓰기를 좋아했다는 건 성폭력 사건과 당연히 아무 관련이 없다. 정보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정보를 어떤 이유로 왜 공개하는지가 더 중요하게 고민되어야 한다. SBS는 ‘추가 피해를 막고 또 드러나지 않은 범죄를 찾아 수사에 도움을 주자는 차원’이라고 이유를 밝혔지만 피의자의 학과와 학점, 교내 활동, 그 당시 썼던 글, 교우 관계가 정말 수사와 관련 있는 정보였을까?
* TMI는 Too Much Information의 준말로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자세한 정보를 이른다
언론이 해야 하는 역할은
성폭력 사건을 보도하면서 계속해서 단순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은 보도의 공익적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없다. 언론은 성폭력 사건이 얼마나 잔인하고 특수한 범죄인지 전하는데 그 역할이 있는 게 아니다. 문제가 터지고 나면 뒤쫓아 사건을 보도 하는 게 아니라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사회가 함께 고민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언론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역할이다.
성폭력 사건이 이슈가 될 때마다 많은 사람이 언론의 보도 방식에 문제제기를 해왔다. 매번 다른 이야기도 아니었다.
• 성폭력을 흥밋거리로 다루지 말 것
• 불필요한 경우에도 피해 내용을 자세히 묘사해 선정적으로 보도하지 말 것
• 가해를 변명하는 가해자의 말을 부각시켜 보도하지 않을 것 등
이와 같은 최소한 성폭력 보도 가이드라인만이라도 꼭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문제제기가 무색하도록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보도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해자와 사건 내용만 다를 뿐 복사해서 붙여넣기 한 듯 똑같이 문제적인 기사를 바라볼 때면 이게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기사인지 작년에 봤던 전 충남도지사 안희정 성폭력 사건 유죄 판결 기사인지, 재작년 들끓었던 #미투운동 기사인지 그 전 해 있었던 남배우A 성폭력 사건 기사는 아닌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러다 문득 작년에 있었던 언론인 단체 대화방 사건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불법 촬영물을 공유하고 동료 기자에게 성매매 업소 추천을 받던 ‘그 방’ 말이다. 여태까지 보아 온 문제적인 기사가 왜 등장하게 되었을지 알 것도 같아진다.
SBS는 핵심 피의자 조○○의 신상정보가 정식 공개되기 하루 전, 단독으로 공개하였다.
문제적인 언론에 익숙해지지 않고 지치지 않고
이런 생각에 이르면 목소리 내는 게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실눈을 뜨고(?) 잘 살펴보면 작은 변화가 오고 있는 듯도 하다. 한겨레는 지난해 11월부터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보도해오며 이는 ‘악마’같은 누군가가 저지른 ‘특별한’ 범죄가 아니라 남성중심문화가 누적되어 발생한 일임을 꾸준히 전해왔다. MBC는 이 사건을 몇몇 가해자가 저지른 게 아니라 해당 방에 있던 모든 사람이 가담한 사건임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집단 성착취 사건’으로 명명한다고 밝혔다. 또 〈개발자 꿈꾸던 모범생, ‘부따’ 강○의 이중생활〉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써 독자의 비판을 받은 머니투데이의 남형도 기자는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의견에 공감한다”며 기사의 제목과 일부 내용을 수정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변화가 오긴 오는구나’ 싶은 마음과 동시에 ‘아니 이정도로 만족(?)하는 게 맞아?’하는 마음이 쫓아온다. 이 두 마음을 놓치지 않고, 멈추지 않고 문제제기할 때 실눈 뜨지 않고도 볼 수 있는 큰 변화가 찾아올 거라 믿고 싶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에서는 〈이런 기사 그만 써라: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문제적 언론 보도 시민제보〉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는 지켜보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겨워하지 않고 문제제기할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제대로 된 성폭력 보도를 보고야 말 것이다.
한국여성민우회에서 3월 26일에 발표한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관련 언론 보도 가이드라인
은사자(신혜정)
여는 민우회 성평등미디어팀/
자기소개를 쓰고 있는 오늘은 4월 16일. 권나무의 이천십사년사월을 듣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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