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상반기-함께가는 여성] 기획_기술로 하는 피해지원, 기술을 넘어선 피해지원
[2020 상반기-함께가는 여성] 기획
기술로 하는 피해지원, 기술을 넘어선 피해지원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삭제지원은 무엇인가?
2018년 4월 30일,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이하 센터)가 개소했다. 처음에는 모든 과정이 수작업이었다. 모 교수는 우리를 ‘300(스파르타)’이라 불렀다. 피해 촬영물을 찾아내기 위해 인터넷 공간을 떠돌며 관련된 모든 정보를 검색하고 수집하여 일일이 삭제 요청을 한다. 무한의 공간에서 무한의 데이터를 찾아내 삭제를 하는 업무인 것이다. 이런 업무를 하는 삭제지원자에게 가장 중요한 직무 윤리는 젠더 감수성이다. 피해촬영물을 계속 봐야 하기 때문에 피해자를 가해자의 눈으로 보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각해야 한다. 하지만 이 부분이 맹점이기도 하다. 젠더 감수성이 높을수록 피해촬영물을 보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가해자들과 다르게 삭제지원자들은 피해촬영물에 등장하는 피해자가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이에 따른 대리외상*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당사자가 아니지만 간접 경험으로 인해 마치 자신에게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난 것처럼 불안을 겪는 증상을 말한다.
결국 피해자를 위한 신속하고 효율적인 삭제지원과 삭제지원자의 소진방지를 위해서는 ‘기술’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언제까지 일일이 검색하면서 할 거니! 센터는 어떤 기술을 활용하고 있는가?
디지털성범죄 피해지원에서 가장 필요한 기술은 ‘보안’과 ‘검색’이다. 센터 개소 초기에는 보안에 집중하여 센터에서는 내담자의 정보와 피해촬영물 등의 민감정보가 안전하게 보관될 수 있도록 외부에서 접속할 수 없는 서버를 활용하였다. 그리고 단순반복 업무였던 삭제지원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2019년 삭제지원시스템을 구축하여 올해 고도화를 진행하고 있다. 삭제지원시스템은 DNA 검색을 통해 재유포 게시물을 찾아내는 시스템이다. DNA는 영상이 담고 있는 유전자 정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영상이 뒤집히거나, 짧아지거나, 다른 영상과 합쳐지는 등 다양한 방식의 편집이 이루어져도 삭제지원시스템은 해당 영상들을 동일한 영상으로 판단한다. 이 시스템에는 여성가족부방송통신위원회-경찰청-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 4개 기관의 공공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어있어 삭제지원이나 수사 과정에서 피해촬영물을 더 안전한 방식으로 공유하고 삭제지원이 빠르고 효율적으로 될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에도 한계가 있다. 첫째는 피해촬영물을 찾아내는 것은 기계가 해주지만 삭제요청은 결국 삭제지원자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해촬영물이 주로 공유되는 웹사이트, 소셜미디어 등의 플랫폼 운영자도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과 소통하는 것이 바로 삭제지원자의 주요 업무이다. 게다가 해당 웹사이트는 서버가 해외에 있는 경우가 대다수라 국내법에 적용 받지 않는다. 사이트 운영자는 삭제지원자를 ‘페미나치’라 부르며 스스로를 “당신네 나라 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둘째는 플랫폼의 다양성이다. 가해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플랫폼을 찾아내 이동한다. 사이트가 폐쇄되고 플랫폼에 피해촬영물 공유를 제재하면 가해자는 바로 다음 플랫폼으로 이동한다. 이렇게 쌓이고 쌓이면서 피해촬영물이 유포되는 디지털공간은 무한대로 늘어난다. 이 사이트는 또 각자 다른 기술을 활용하여 만들어져있기 때문에 삭제지원시스템이 해당 사이트에서 정보를 가져올 수 있도록 하려면 그에 대응하는 기술을 또 만들어야 한다. 100개의 사이트에 대응하려면 100개의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기술은 피해지원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절대 해답이 아니다.
피해지원의 사각지대_‘키워드’에 관하여
최근 텔레그램 성착취가 공론화되며 연이어 다른 사건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이 과정을 보며 피해지원자로서 꼭 공유하고 싶었던 부분은 ‘키워드’에 관한 것이다.
디지털성범죄 피해자가 요청하는 것은 ‘피해촬영물 삭제’만이 아니다. ‘키워드’에 대한 삭제지원은 피해촬영물 삭제만큼 중요하다. 피해촬영물을 검색하고 소비하기 위해 가해자는 이 키워드를 이용한다. 키워드란, 가해자에 의해 생산되는 피해촬영물의 제목 및 관련 내용이다. 피해자의 신상정보인 경우도 있지만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붙이는 멸칭(‘○○녀’)이나 피해촬영물의 내용/특징을 담은 단어 혹은 문장이 이에 해당한다.
가해자를 부르는 ‘별명’이 키워드가 되기도 한다. 가해자가 사용하는 별명은 웹사이트에 접속할 때 쓰는 아이디(ID)나 별칭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된다. ‘○○녀(피해자)’는 피해가 되지만 ‘○○남(가해자)’은 권력이 되고 ‘브랜드명’이 된다. ‘○○남’을 계속해 호명하면 그들의 이름에 힘이 생기고 상품성이 생기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디지털성범죄를 범죄로 인식하지 않고, 여성의 신체를 사고 파는 물건처럼 여기며, 더 자극적인 피해촬영물을 보고 유행시키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그들에게 계속 권력을 부여하고 있다.
센터에서는 이 키워드 유포 또한 ‘성범죄 피해’라는 사실을 플랫폼 운영자들에게 알리고 기술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현재 삭제지원시스템에도 피해촬영물 삭제만이 아닌 키워드 삭제를 위해 빅데이터나 매크로 시스템 등의 기술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작 몇 개의 단어들로 피해자의 안전이 위협받는 사회는 바뀌어야 한다.
행복한 백수가 되고 싶다_ ‘삭제지원’이 필요 없어질 그 날까지
‘디지털성범죄 피해촬영물 삭제지원’이라는 업무가 이 세상에 필요 없어질 날이 오는 것, 이것이 센터 팀원들의 소원이다. 현재 디지털성범죄는 한국 사회에 너무 뿌리 깊게 박혀있다. ‘야동’, ‘몰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고 아직도 많이 쓰이고 있다는 것, 범죄가 ‘문화’가 되어버린 것은 우리가 잊지 않고 계속 경각심을 가져야 할 문제다. 2015년 소라넷 공론화, 2018년 양예원 님의 #미투, 혜화역 시위 등 여성은 끊임없이 외치고 있다. 이전에 상담원 양성 과정 강의를 나혜석의 〈이혼고백서〉를 인용해 ‘여자도 사람이외다’라는 문장으로 끝마친 적이 있다. 재밌게도 다음 차례로 강의를 하신 분도 〈이혼고백서〉를 인용하며 강의를 마치셨다. 거의 90년 전에 나혜석이 외친 이 문장을 왜 아직도 말하고 있어야 하는가.
삭제지원은 결국 사후 조치이다. 범죄를 종식시킬 수 있도록 디지털 성범죄가 조직적인 성착취 카르텔임을 잊지 않고 플랫폼 사업자에게 책임을 묻고, 운영자를 처벌하여 그들의 수익 구조를 완전히 차단해야한다. 다음 세대가 이 직업을 가질 필요가 없고 가해자들의 클릭질에 여성들의 삶이 좌지우지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
전화: 02-735-8994 내선 1번
상담 시간: 평일 9:00~18:00
온라인 상담: https://www.women1366.kr/stopds/ (온라인 게시판으로 상시 신청 가능하나, 답변 시간은 평일 9:00~18:00)
쪼이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
센터 개소 때부터 2년간 삭제지원 업무를 해오고 있다. 행복한 백수가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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