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하반기-함께가는 여성] 열개의 시선_페미니즘 운동을 축구처럼
[2020 하반기-함께가는 여성] 열개의 시선
페미니즘 운동을 축구처럼
작년 여름 1020 리더십캠프를 준비하면서 젊은 페미니스트들과 연대할 거리를 찾던 중 대전의 페미니스트 문화기획자그룹 보슈(BOSHU)에서 운영하는 여성축구팀을 알게 되었다. 여자도 축구를 했던가? 학창시절 축구를 한 기억이 있던가? 텅 빈 학교 운동장이나 가끔 남학생들이 뛰어 놀던 운동장만을 기억하던 우리는 그래, 우리도 잔디 운동장을 밞아보자고 다짐했다. 다행히 보슈의 매니저가 행사가 있어 춘천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운명이라 여기고 보슈를 만나 섭외하고 캠프 준비를 하게 되었다. 많은 여자축구 선수들이 축구라는 불평등한 세계 안에서 경기하며, 싸우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감격하고 흥분했다. 캠프에 참가한 회원들은 페미니즘 토론과 축구라는 좋은 추억을 가지고 돌아갔다.
코로나19로 사회가 일시정지 되어버린 1월. 나의 본업과 민우회의 행사가 모두 중단 됐을 때 오리건, 미션파트너, 나 이렇게 셋이 밤 10시에 동네 초등학교 축구장에 모였다. 늦은 밤 축구장에는 가로등, 잔디밭, 골대 그리고 달빛 밖에 없었고, 준비해간 것은 바람 빠진 축구공이었다. 모두 40대였기에 힘껏 차면 너무 멀리 날아가는 탱탱한 공은 주워 오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바람 빠진 공을 차면서 우리는 많이도 웃었다. 공 한 번 차고 오늘 알게 된 페미니즘 관련 소식, 정보들을 나누면서 뛰고 웃고 그러면서 축구장이 아동과 여성에게 맞게 설계되었나부터 학교 시설과 안전에 관해 얘기하게 되었다. 걸어서 한 시간 내에 있는 4~5개의 초중고 학교들과 대학교 축구장을 하나씩 점검하기 시작했다. 일명 축구장 깨기. 코로나 때문에 운동장 출입을 막을 땐 근처에서 약식 축구를 하며 100일을 채웠다. 그리고 축구단 창단을 결심하게 되었다.
축구장 깨기를 하며 우리 세 명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족 이야기도 했지만 민우회 활동, 페미니즘, 성평등, 불평등하게 사는 것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다. 특히 올 상반기에 N번방 사건이 터지면서 피켓시위를 하고 다스리지 못했던 감정들을 주저 없이 털어놓을 수 있었다. 타인의 이야기를 깊게 듣고 공감하며 소통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느끼던 그 순간들이 돌아보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고 지금까지 축구단을 지탱하는 힘이 됐다. 10년 넘게 꾸준히 민우회 활동을 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닌데 지칠 때 같이 얘기하고 어두운 현실도 유머를 섞어 풀어내며 우리는 정말 많이 웃었다. 글을 쓰면서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누가 여자 축구에 관심이 있을까. 창단을 위해 사람을 모집한다는 기사가 신문에 나서 다양한 축구에 대한 사연을 가진 여성들이 모였다. 춘천시에서 창단한 여자 축구단이 지원자가 2명밖에 없어 취소되는 바람에 온 20대, 운동장을 마음껏 뛰어보고 싶다는 40대, 독박육아에 아들 둘과 축구를 많이 했다는 주부, 모든 운동을 좋아하고 잘하는 데 축구만 못해봤다는 30대, 학교운동장 가운데 서본 적이 없다는 40대 등 그동안 축구로부터 소외됐던 다양한 여성들의 축구에 대한 서사가 넘쳐났다. 세대 구분 없이 나누는 축구 이야기는 여성이 어떻게 스포츠에서도 소외되고 좌절당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여자 축구단을 만든다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감독을 추천해주었다. 여자들이 자유롭게 축구장을 뛰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라고 해도 남자들은 그게 아니라고 했다. 축구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며 승부욕 넘치는 감독들을 소개해주겠다, 심지어 무료로 레슨해주겠다고도 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력 많은 감독이 아니라 축구를 즐기면서 하고 배려하면서 하는 법을 일러줄 수 있는 감독인데. 그 과정에 다양한 사람을 만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나눌 때 또 다른 소통이 시작되는 거라고 믿었다. 다행히 축구를 좋아하는 후배에게 여러 가지를 배우게 되었다. 축구를 좋아하지만 페미니즘이 뭔지 잘 몰라 유튜브를 보고 공부하고, 떨면서 우리에게 축구의 기본 기술을 가르쳐주던 그를 보며 다양한 소통방식과 과정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축구를 할수록 페미니즘 운동을 축구처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팀원들이 어우러져 한 팀이 되고, 필요에 따라 공격도 하고 후퇴도 하고, 공을 지키는 것처럼 우리의 가치를 연대해서 지키고, 힘들면 잠시 교대도 하고… 인생의 그라운드에서 44 함께가는 여성 Vol. 230 승리해서 내려올 때 함께 웃고 소리 지르고 싶다. 성평등이라는 우승컵을 거머쥐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달빛 아래 축구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달빛 축구단이 되었다. 365일 24시간 떠있지만 낮에는 보이지 않다가 밤이 되면 빛을 밝히는 달빛이 민우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요일 저녁 7시 인공 조명을 받으며 운동을 하다가 9시가 넘어 조명이 꺼지면 달빛 아래에서 운동을 하게 된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맘껏 웃으며 축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축복 아닌가.
춘천여성민우회 달빛축구단 단원들이 축구를 마치고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수우
❚춘천여성민우회 운영위원
쉽게 편하게 하자는 말 하지 말아주세요. 그게 더 어렵습니다. 제대로 하는 것이 더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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