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하반기-함께가는 여성] 활동가 다이어리_민우회_면접본썰_푼다.txt
[2020 하반기-함께가는 여성] 활동가 다이어리
민우회_면접본썰_푼다.txt
그럼 여성단체에서 일하시든가요
“그럼 여성단체에서 일하시든가요.” 종종 듣던 비아냥이었는데 결국 여성단체 신입활동가가 됐다. 비아냥대로 될 줄은 몰랐는데 역시 인생 알 수가 없다. 비아냥이 듣기 싫어서 백수가 됐을 때도 그런 종류의 비아냥은 따라다녔다. 백수가 되고 나니 그것이 무엇이든 연결되고 싶은 마음에 타임라인을 계속 들여다보게 되었다. 활동가를 찾는다는 민우회의 게시물을 보고, 이건 운명이다 싶었다. 사진 속 활동가들은 여성단체 가라는 비아냥 들을 일은 없어서 그런가, 다들 좋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활동가 모집 공고를 살펴보니 ‘평등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써야 한다니 생각만으로 피로와 부담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증명사진 파일을 어디에 저장해뒀는지 떠올리다 증명사진을 삽입하는 셀이 없는 이력서를 보고 약해졌던 의지를 다잡을 수 있었다. 이력서에 사진 붙이는 칸이 없고 학력과 사는 지역을 적지 말아 달라는 이력서는 낯설고 멋졌다. 지우고 다시 쓰고 반복하다 고치기를 수십 번, 겨우 서류를 마무리 짓고 메일을 발송했다. 연락을 기다리면서 좌절했다가 다시 희망에 부풀었다가 오락가락하며 며칠이 지났다. 서류에 합격했으니 면접을 보러 오겠냐는 문자가 왔다. 당연히 갑니다!
역시 민우회 가입하길 잘했나
잘 가고 있는 건가 몇 번이고 지도앱을 확인하면서 걸었다. 빌라와 빌라 사이에 있는 사무실이 사무실인줄 모르고 지나치길 몇 번, 노심초사하며 사무실에 도착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고 현관문을 여니 활동가 두 분이 반겨주셨다. 대기시간동안 대화를 하며 두 분이 아이유 팬, 재재 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면접비를 주신다고 해서 또박또박 계좌번호를 적었다. 사려 깊은 마음에 길을 찾으며 동동거리던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차례가 되어 면접실 안으로 들어갔더니 훈훈하고 촉촉한 공기 속에 여러 사람이 책상에 둘러 앉아 있었다. 처음 뵙는 분도 있었지만 얼마 전 참석했던 총회에서, 형법 269조 삭제 퍼포먼스에서 보았던 분들이 계셨다. 줄넘기를 넘으면서 사업계획 발표하던 분이네. 엄청 높은 유압식 사다리에 올라가 있던 뾰족 머리 모양을 하신 분도 있고. 떨리긴 해도 아는 얼굴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안도감이 들었다. 역시 민우회 가입하길 잘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싸한 답변을 하지 못한 거 같아 회한이 가득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왔지만 면접 보면서 이상하게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면접이든 면접을 보고 나면 허기가 지고 왠지 외로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지만 면접실 안에서의 시간은 유쾌하고 따뜻했다. 하지만 그 날 밤은 면접 때 했던 말을 되감기하고 허공에 발을 차며 보냈다.
전화가 오면 합격이고 메일이 오면 탈락인데 내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더니 배터리가 나가버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충전기 선을 연결하고 전원버튼을 초조하게 눌렀다. 부재중 전화 한 통과 연락을 달라는 문자 한통이 와 있었다. 와 대박 민우회 붙었나봐!
민우회 활동가는 처음이라서
출근은 일주일 정도 뒤였다. 딱히 준비할 게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시간이 귀하게 느껴졌다. 친구들에게 ‘취뽀’* 소식을 전하는 게 약간은 머쓱했지만 퇴사부터 취뽀까지 내막을 아는 그들은 결국 그렇게 되었냐며 축하와 응원의 말을 해주었다.
첫 출근 날, 사무실에 들어서자 준비한 듯이 모두가 안녕하세요~! 하고 반겨주셨다. 나중에 들어보니 준비한 게 맞았다. 한 달 넘게 업무는 거의 없었고 오리엔테이션을 듣는 게 전부이긴 했지만 혼자서 팩스도 못 보내고, 전화도 못해서 활동가들에게 신세를 지며 뻔뻔함이 늘기도 했다. 막상 필요할 때는 안 보이는 손톱깎이나 귀이개처럼 신입활동가를 위한 매뉴얼이 앞에 있어도 필요한 내용만 못 찾아 먹는 기현상을 경험하곤 했다. 점심시간이면 민우회 활동가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혹은 회의 공간에서 식사를 하거나 사무실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민우회 활동가들이 뽑은 사무실 근처 맛집 지도인 민슐랭 지도도 있다. 햇살이 좋고 시원한 날에는 옥상에 올라가서 식사를 해도 기분이 좋다.
잘 돼가? 무엇이든
민우회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조금씩 변했다. 이경미 감독의 단편영화 〈잘 돼가? 무엇이든〉에 등장하는 인물인 ‘지영’을 보며 방향 없이 화나 있던 나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지영이 큰 칼을 옷 속에 숨기고 흉기에 베일까 기묘한 자세로 거리를 걷는 장면이 특히 그랬다. 누군가 지영을 치고 지나가면서 목 언저리를 베여 행인에게 버럭 화를 내는 그에게 행인은 말한다. “누가 그런 칼을 옷 속에 넣고 다니래?”
어디로 향하는 건지 모르는 날카로운 분노를 품고 다니다가 사람들의 의미 없는 말에 스스로 상처받곤 했는데 조금씩 분노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방향 없는 분노를 품고 있기보다 활동가들과 함께 회원들과 함께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나아갈 방향을 찾아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취뽀: 취업뽀개기란 취업준비 인터넷 사이트 줄임말로 최근에는 취직했다는 뜻으로 쓰임.
2020년 한국여성민우회 정기총회에서 사업계획 발표를 위해 줄넘기를 하며 등장하는 활동가 꼬깜
2018년 9월 29일, 형법 제269조 낙태죄 삭제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활동가 노새(왼쪽)(사진 촬영: 라용)
나래(옥나래)
❚여는 민우회 액션회원팀
9개월 차 신입활동가..☆ 이미 그런 자유로운 세상에 있는 것처럼 살고 싶어요.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