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9*10월호 [만나고 싶어요] 삶과 그림의 조화를 꿈꾸는 이기연 _ 정리 권미혁
[만나고 싶어요]
삶과 그림의 조화를 꿈꾸는 이기연
여성운동가라면 누구나 변화를 꿈꾼다. 기존의 질서와 삶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꾸는 것, 그 중에서도 문화를 바꾸는 일이라면 더욱 매력적이지 않을까? 이번 호 ‘만나고 싶어요’에서는 ‘우리 옷입기’운동을 주도적으로 벌였고 생활한복을 개척했으며 지금은 생활한복 브랜드인 ‘질경이 ’의 사장으로 있는 이기연씨를 만났다.70년대에 이미 생활과 미술, 그리고 우리 옷을 접목한 이기연씨를 통해 치열한 문화게릴라의 삶을 들여다 보았다.
정리 ●권미혁
권미혁 : 지금은 생활한복이라는 것이 많이 보급되었지만 처음 시작할 때는 지금과는 다른 환경이었을 것 같다. 처음에 어떻게 생활한복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나?
이기연 : 사실 내가 이렇게 사업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70년대 나는 민족생활문화운동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민족생활문화운동은 당시의 문화운동이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공연과 집회활동 위주로 되는 것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옷입기운동’은 그 구체적 실천의 하나였고, 이것이 사업으로 연결되어 벌써 23년이나 된 것이다.
권 : 단순히 우리 옷을 입자는 운동은 그 전에도 있지 않았나?
이 : 일제 때부터 이런 운동은 있었다. 그러나 1954년의 국민생활 간소화운동이나 56년 신생활운동이 정부주도로 우리옷을 개량하자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70년대의 우리 옷입기는 당시의 민중미술운동과 맞닿아 있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고급 예술품인 미술, 특히 순수미술 만이 높은 평가를 받는 기존 통념은 해체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처럼 그림이 사람들의 삶과 좀 더 밀접한 관련이 있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술이 사람들과, 생활과 가까워져야 했는데, 그 작업이 쉽지 않았다. 미술은 고급한 예술이라는 인식이 쉽게 바뀌지 않았었다. 예를 들어 아무도 이해할 수 없게 엉망으로 그린 그림도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놓으면 전문적인 예술품으로 인정해주었다. 이런 벽을 깨기 위해 착안한 것이 바로 옷이었다.
권 : 어떤 측면에서 미술과 생활을 접목한 아이템으로 옷을 선택하게 되었나?
이 : 옷에 그림을 넣으면 그 옷을 입은 사람들은 모두 가슴에 그림을 하나씩 갖고 다니는 것이다. 옷에 그림을 넣는 발상은 미술을 대중화하려는 시도로 판화나 만화같은 장르를 실험해 본 과정의 결과이기도 했다. 판화는 기존에 값비싼 미술품의 유통구조를 깰 수 있다는 면에서, 만화는 일상적으로 누구나 보는 친근한 매체로서 가능성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었다. 상상해보라. 사람들의 가슴에 미술작품이 박혀 돌아다니는 것을. 그 하나하나가 개인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지를...
권 : 모두가 옷에 그림을 갖고 다니게 한다는 발상이 신선한 것 같다. 미술과 생활의 경계를 뒤흔든 것 아닌가? 당시 반응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이 : 처음에 그냥 티셔츠에 그림 문양을 찍고 우리나라 전래의 동정을 간단하게 변형해서 붙힌 윗도리부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옷이 나오자마자 그 반응이 열화와 같았다는 것이다. 너무나 호응이 좋았다. 늘 입는 옷에 작은 변화를 시도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입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뜨거운 호응 속에 가방, 소품, 어린이 옷 등 점점 아이템이 늘어갔다. 당시 신촌 대학가 앞 몇몇 매장에선 곧바로 우리가 발표한 문양을 복제해 팔기 시작할 정도였다.
권 : 생활문화운동과 사업은 다를 것 같다. 사업으로 유지되려면 옷에 그만한 장점이 있어야 했을 텐데...
이 : 생활한복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자연섬유를 사용한 생태적 옷이고 문양에 나타난 의미도 남다르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생활한복이 “해방의 공간과 열린구조의 미학”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 옷은 넉넉한 여유품을 갖고 있다. 서양옷과 달리 개인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가 보장되는 구조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 여유품은 그 공간을 어떻게 여며 입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맵시가 다르게 나타남으로써 개인의 개성을 발휘할 수 있다. 옛 여인들은 치마 감싸는 법이 36가지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장점은 입는 사람의 반응에서 나타난다. 서양옷이 옷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보게 만든다면 우리옷은 그 옷을 입은 사람을 돋보이게 만든다.
권 : 기업을 한다는 것은 치열한 시장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 같다.
이 : 물론 어려운 점이야 많지만 내가 만든 옷을 입고 남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음으로써 이겨나가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동안 “부조리와의 싸움. 그 속에서 자존심을 지키는 것”을 동력으로 살아온 것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사회가 부조리하다고 느꼈다. 하나는 돈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로 가르고 차별한다는 것, 또 하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한다는 것이었다. 대학 때 새벽 누구보다 일찍 나와 그림 그리며 “깡순이”라는 별명으로 살았으면서도 술자리에서 선배, 동료들로부터 듣는 이야기는 “너는 여자일 뿐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쉼 없이 살아온 힘은 이런 부조리에 저항하는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이기연씨가 시도한 삶과 미술의 결합, 그 고리로서 그림과 옷의 결합이라는 방식을 지금의 버전으로 이야기하면 ‘일상의 문화개혁’이 아닐까 한다. 우리옷에는 인간의 몸을 새롭게 해석하고 인간이 자연과 하나라는 생태적 관점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이기연씨는 물질위주의 생활태도를 옷을 통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염색기법을 통해 처음엔 낡아 보이지만 입으면 입을수록 낡은 것에 친숙하고 아름답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새것을 사면서 만족하는 게 아니라 있는 것을 자꾸 새로 보게 하는 것이다. 이기연씨는 우리옷이 세계 패션계에서 하나의 대안이 되기를 꿈꾼다. 돈을 많이 주어야 살 수 있는 명품이 아닌 철학적 내력이 있어서 명품인 옷 말이다.
권미혁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
민우회와 함께 재미있는 세상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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