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9*10월호 [쟁점과 현안] 성적 욕망과 권리, 그 유혹 혹은 좌절 _ 김일란
[쟁점과 현안]
성적 욕망과 권리, 그 유혹 혹은 좌절
김일란 (꼬무)●
지난 7월 말, 민우회를 비롯한 7개의 여성단체들이 시민방송 RTV 편성국에 항의 공문을 보냈다. ‘시민방송의 <핑크팰리스>방영 및 적극적 홍보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통해서, 핑크팰리스>의 방영 중지와 ‘R레터 89호’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RTV는 <핑크팰리스>의 홍보 문구를 그대로 사용하여 “숫총각으로 죽으면 진짜 억울하다, 억울해!!”라는 제목으로 한 40대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의 사연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 다큐멘터리의 주요 내용과 방영 시간을 머릿기사로 예고하였다. 퍼블릭액서스를 지향하는 시민방송의 공공성을 고려했을 때, 여성의 인권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방송편성에 중지를 요청한 것은 여성주의적 실천이자 문화권의 적극적인 행사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사건은 1년 전, <핑크팰리스>가 상영될 당시의 논쟁을 다시금 촉발시켰다. 1년 전의 논쟁이 별다른 진전 없이 재연된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가 장애인의 다양한 성적 권리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음을 의미한다. 장애인의 ‘성’에 관해 직접적으로 말걸기를 시도한 것으로 평가되는 <핑크팰리스>는 장애 남성의 성적권리와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성매매를 둘러싼 성 담론, 대상의 재현에 관한 윤리적 태도, 영화적 사건을 유도하는 제작진의 개입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논쟁의 중심에 놓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성매매 특별법 이후, 성매매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다각화되는 지형의 변화 속에서 장애 남성의 성적 권리의 행사와 그 해결방식으로 제시되는 성매매는 성노동과 성적 활동보조 그리고 공창제 사이의 논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이에 혹자는 성매매 자체를 옹호하는 입장에 경도되어, 성매매 특별법은 성매매 여성의 노동권뿐만 아니라 장애 남성의 섹스할 권리까지 박탈하는 것이라면서 즉각 폐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핑크팰리스>는 장애인의 성이라는 낯선 주제에 접근하는 용기를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상당히 위험하고 폭력적이다. 말하자면 성적으로 소외되고 열악한 존재인 장애 남성의 위치를 강조하기 위해서, 사회적 ‘낙인’이 찍힌 성매매 여성에게 거부당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즉 여성의 성을 서열화하여 성매매 여성의 인권을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애인 차별의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서 성매매 여성을 가해자로 표상하였다. 특정한 소수 집단이 사회로부터 소외받고 차별당하는 현실을 설득하기 위해서, 또 다른 소수 집단을 악용한 셈이다. 장애 남성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서, 성매매 여성을 도구화한 것이다. 이러한 <핑크팰리스>의 태도는 여성과 소수자의 인권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여성주의자들에게 있어 비판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이번 여성단체들의 방송중지요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다. 방송중지를 요구하는 것은 여성주의자들의 과잉된 검열 기제가 작동한 결과로, 다양한 성적 표현 및 권리에 대한 논의를 저해한 것이며, 또한 장애인의 성에 대한 논의를 축소시킨 것으로 본다. 뿐만 아니라 방송중지의 근거인 성매매를 반대하는 입장은 곧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을 간과하는 것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성매매에 대한 찬반 자체가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에 대한 입장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우리가 섬세하게 고민해야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장애인의 ‘성’에 대해 사회적, 국가적, 인권적 차원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의 의미이다.<핑크팰리스>가 상영된 이후로, 각종 언론과 영화제는 이 영화를 그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장애인의 억눌린 성을 이슈화한 최초의 시도라고 추켜세웠다. 물론 다큐멘터리의 자체 광고 문구에서도 “장애인의 성을 이야기하는 국내 최초의 장편 다큐멘터리”라는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데 각종 언론과 <핑크팰리스>제작진이 그토록 주장하는 ‘최초’란 무엇일까. 예를 들어 이미 2000년에 제작된 계윤경 감독의 <팬지와 담쟁이>는 두 장애 여성의 성을 일상적 경험 속에서 경쾌하게 묘사하고 있다. 두 장애 여성이 경험하는 성애적 감정과 관계, 결혼, 섹스 등을 유쾌하게 드러내면서도, 그녀들이 느끼는 성적 소외의 지점들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에 반해서 <핑크팰리스>는 초반부에서 ‘장애인의 성’에 대해 물었던 질문은 어느덧 장애 남성의 섹스에 대한 질문으로 자리 잡는다. 장애 남성이 섹스를 하고 있는지, 하고 싶은지, 하지 못한다면 왜 그런지, 한다면 어떻게 하는지, 이것이 질문의 대체적인 요지이다. 따라서 장애인들의 다양한 성에 관해서 이야기하겠다고 시작한 다큐멘터리는 애초의 목적이었던 장애 남성의 섹스에 대한 욕구와 ‘해소 방법’을 묻는 것으로 축소된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제작의 계기였던 한 장애 남성의 섹스에 대한 욕구와 해소방법으로 영화의 상당부분을 할애한다.
장애인의 성적 권리를 인권적인 측면에서 고려한다는 것은 단순히 섹스 할 수 있는 가능성의 확보가 아니다. 그것은 장애인들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긍정하고,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마련하고, 새로운 성적 문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장애인은 획일화된 집단이 아니다. 장애의 유형, 정도, 성별, 나이, 학력 등에 따라서 다양한 차이를 지닌 경험의 주체이다.<핑크팰리스>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적극적인 실천은 장애인의 성이 장애 남성의 섹스로만 환원되는 성담론에 대한 경계이며, 보다 더 풍부하고 다각적인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라 할 수 있다.
김일란 (꼬무)●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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