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1*12월호 [회원이야기]체리향기의 민우회 입성기_체리향기
[회원이야기]
체리향기의 민우회 입성기
체리향기
"그래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상황은…."
"이참에 회원 가입하시죠."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상황을 전해 듣기 위해 처음 민우회를 방문하던 날,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상황을 설명해 주던 나우 활동가는 회원 가입을 권유하며 가입서를 내밀었다. 그렇게 해서 인연을 맺게 된 한국여성민우회. 내 시민단체 회원 이력에 3번째로 추가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민우회로부터 이메일 한통을 받았다. '새모람 프로젝트에 초대합니다.'라고 적혀있는 신입회원 교육 모임 안내 메일이었다. 새모람 프로젝트? 새모람 프로젝트란 말에 언뜻 계몽주의의 엄숙함과 살짝 주눅든 '마초' 아저씨들의 이미지가 떠올라 잠시 망설였다. '마초 같은 남자들을 계몽하는 교육 프로그램인가 보다'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첫 모임이 있는 날 예정된 시간보다 좀 일찍 민우회로 갔다. 분주히 일하는 활동가, 서로 담소를 나누는 활동가들의 모습, 여느 시민단체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고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난 느긋하게 앉아 '교육' 받을 준비를 한다.
약속된 시간이 좀 지나 모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모임, 내 예상과 전혀 다르다. 남성 우월주의자들 계몽 프로그램인 알았는데 남성들이 보이질 않는다. 도착하시는 분들 아직까지 다 여성분들이다. '아, 마초 계몽 프로젝트가 아닌가?' 모임이 시작되고 역시나 남자는 나 혼자. 난 잠시 당황하며 모임에 참가한다.
민우회 활동가인 공기가 모임을 이끌어 나간다. 새모람 프로젝트 소개와 한국여성민우회에 대한 소개, 민우회 내의 소모임 소개에 이어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이다. 이름표 뒤에 답변할 질문이 적혀있다. 자신을 타인에게 더 잘 소개하기.
1. 나를 동/식물에 비교한다면? 2. 핸드폰에 화면문구는? 3. 요즘 관심사는? 4.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5. 민우회 알게 된 동기는?
주어진 질문에 답변하는 표정이 진지하다. 토끼, 곰, 곰양이(곰+고양이), 곰+여우, 해바라기, 선인장… 사물에 빗댄 이유가 재밌고 신선하다. 평소에 자신의 특성을 다른 것들로 표현하는 감성 표현 훈련이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당신은 누구지요? 아 저는 바다 같은 사람이예요, 정말 넓고 포근하지요. 당신은 누구이지요? 아, 저는 00회사 과장이예요. 재미없지 않은가?
이어지는 뒤풀이, 민우회가 즐겨간다는 널찍하고 예쁜 술집으로 갔다. 간단한 생맥주가 잘 어울리는 자리. 무엇보다 음악이 시끄럽지 않아 좋다. 아, 물론 술값은 노나메기다. 음.
두 번째 모임부터는 '교육'이 시작되었다. 여성학이 무엇이고 어떻게 한국에서 진행되었는지 간단하게 소개한 글을 모람지기 깜냥이 간결하고 알기 쉽게 정리를 해와 발제를 했다.
여성학은 가부장제 남성 지배질서에서 차별받고 부당하게 억압받는 여성들의 평등과 해방, 권리 신장을 위한 논리와 실천의 학문이라는 요지였다. 물론 여성학, 여성운동, 여권신장, 페미니즘, 계급문제, 인종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것도 언급하면서. 이어진 토론과 질문 속에서 생각들이 여물어 갔다.
그 다음 주, '민우데이'에 참여했다. 남성회원들도 참가할 거라는 어느 활동가의 말과 달리 그날 민우데이에 참여한 남자는 나, 체리향기 뿐이었다. 순간 '아 내가 너무 튀는 건 아닌가'하는 당황스러운 기분... 그러나 누구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날 에고그램을 통해 자신의 특징적 기질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현 상황에서 자신의 어떤 기질이 특징적으로 더 많이 나타나고 있는가? 참여한 분들 대부분 참 열심히 꼼꼼하게 살핀다. 자신을 안다는 건 더 성찰해 간다는 것인가?
긴 추석 연휴를 끝내고 난 다음 주, 내가 발제 준비를 맡았다. 한채윤의 '벽장비우기'란 글이다. 동성애 섹슈얼리티에 대한 편견과 폭력적 시선과 폭력을 비판하는 내용의 글이다. 발제를 위해 글을 읽으면서 요지를 알기 어려웠다. 필자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은 발제하는 날까지 이어졌다.
여러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고 질문을 던졌다. 나도 준비한 질문을-정확히 의문을-던졌다. 폭력적이거나 억압적이지 않은 이성애주의는 괜찮은 건가요? 그 질문엔 지금 생각해보면 약간의 편견과 선입견이 있었음을 고백해야겠다. 내 질문은 정리되지 않았고 약간 흥분돼 있었으며 글을 꼼꼼히 읽지 못해 맥락을 놓친 부분이 있었다. 나 역시 정리되지 않고 논거가 부족한 주장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나에게 이런 편견과 선입견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내심 당황했다.
‘껍데기를 벗고서’란 좀 오래된 책이 있다. 10년 전 쯤 읽었던 책인데 아마 여성주의 입문서정도라고 기억하고 있다. 제목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껍데기를 벗고.' 아마 출판사는 그동안의 익숙하고 당연시했던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그 허위의식을 보라는 의도로 붙였으리라. 나 역시 오랫동안 자신을 둘러싼 껍데기를 벗고서야 다른 '세상'을 만나고 다름과 마주하면서 다름이 차별이 아니라 단지 차이임을 느낀다. 차이에는 위계가 없을 것이다.
익숙한 것들과 익숙한 생각의 껍데기에서 벗어나 다름을 마주하며 차이를 인정하기. 이 과정은 질문과 답, 그리고 성찰에서 시작될 것이다. 다른 세상과 생각을 만나 다양한 색깔들이 차별과 억압받지 않고 다양하게 공존하기. 민우회를 접하면서 내 안의, 아직 남아 있는 뿌리 깊은 선입견과 만나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말들이다.
민우회를 만나게 되면서 나도 이제 '조직적'인 참여가 가능해졌다. 새모람 프로젝트와 그 속에서 만나 나눴던 이야기는 피상적인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역시 구체적으로 만나고 대화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앞으로 좀 더 대화하고 구체적으로 만날 것을 다짐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민우회의 '새모람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다.^^
체리향기 - 새모람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던 남성회원 체리향기님은
노동넷(www.nodong.net)에서 기자로 활동하고 계시답니다.
앞으로 남성모임(예정)이나 휘뚜루마뚜루 산행모임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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