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1*12월호 [문화산책]유시진의 「폐쇄자」_다라
[문화산책]
유시진의 「폐쇄자」
다라
인간은 사랑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원될 수 있을까. 보존이 소멸보다 우월한 것일까. 끊임없는 자기중심성, 순수에 대한 열망, 운명 혹은 숙명... 유시진의 「폐쇄자」를 보고 떠오르는 생각들이다.
언제나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그의 작품이지만, 「폐쇄자」는 그 중에서도 손꼽을 만하다. 시작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짜인 장면과 대사는 전체 흐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전개로 두 권에 마무리하면서도 꽉 찬 이야기를 담아냈다.
작가가 말하기를, 여러 가지 레이어들이 모여져 이루어진 이야기라 어디에 초점을 두고 읽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읽힐 것이라고 한다. 그 말에 동감하면서, 무수한 감상 중에 함께 나누고픈 몇 가지만 담아 보았다.
얘기는 이렇다
‘닫힐’-없어질- 시기를 이미 지난 세계인 ‘엠버’는 세계를 유지할 수도, 닫을 수도 있는 존재인 ‘힘’과의 계약을 통해 유지되고 있는 곳이다. 엠버의 수장은 ‘힘’의 숙주가 됨으로써 세계를 유지하거나 소멸할 수 있는 능력을 자신의 몸에 담지하고, 계승자에게 ‘힘’을 넘기고 나면 죽는다.
엠버의 ‘키퍼’인 동시에 ‘클로져’인 ‘쿤’은 어릴 때부터 수장으로서 길러져 왔다. 어느 날 다른 세계로부터 날아온 샨카를 만나면서, 쿤은 키퍼로서의 의무에 가려져있던 개인으로서의 감정과 욕구를 자각하기 시작한다. 쿤은 엠버를 떠나 샨카와 함께하려 하지만 샨카는 죽임을 당하고, 분노한 쿤은 샨카가 속한 세계를 ‘닫아’-없애-버리고 자책감과 슬픔에 빠진다.
항상 쿤을 바라보고 있던 ‘히이사’는 기억을 만들고 주입하는 능력으로 쿤을 스스로에게로부터 도피시키면서 그의 곁에 머물려 한다. 쿤의 각성과 도피가 반복되는 가운데 진실은 밝혀지고, 결국 쿤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죽어가면서 쿤은 히이사를 포함한 엠버의 보존을 위해 ‘힘’을 옮겨 받을 것을 부탁하지만 히이사는 쿤과 함께 소멸하는 것을 택하고, 쿤과 히이사, 그리고 엠버는 천천히 ‘닫힌다.’
보존과 소멸
“파국이 왜 나쁘지? 모든 것엔 끝이 있는 게 당연하잖아.”(히이사)
우리의 일상은 ‘자기보존’에 기초해 있다. 저금하는 것, 흡연과 음주를 조절하는 것, x같은 직장을 계속 참고 다니는 것 등은 모두 ‘자기보존’을 ‘지속가능’하게 하기 위한 이성적인 선택들이다. 지속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때, 폭주 혹은 파국은 시작된다. 지속을 위한 기반이, 그 기반의 보존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자기보존의 본능을 넘어서는 강렬한 열정은 죽음/파괴와 맞닿으며 개인과 사회의 보존을 위협하기에, 절제의 미덕과 지속가능성에 기준한 도덕이 우리의 머리와 온 몸에 습관처럼 스며 있다.
조연인 듯 보이지만 사실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루는 캐릭터 ‘히이사’는 우리에게 반문한다. 왜 삶이 죽음보다 우월한가?(선한가?) 왜 엠버는, 쿤은, 히이사는 유지(보존)되어야 하는가? 왜 당신과 나는, 그리 아름답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일상의 지속을 위해 오늘도 비루한 절제와 타협을 계속해야하는가...?
운명 혹은 숙명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하고 싶은 줄 알아? 내가 널 괴롭히는 걸 마다할 것 같아?”
“난 너와 같이 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같이 죽고 싶었던 걸까. 아마도, 같이 살고 싶은 것 이상으로, 함께 죽고 싶었을 거야.”(히이사)
사랑은 언제나 소유와 결합되고, 우리는 또 그 안에서 ‘지속가능’을 위한 타협을 한다. 사랑이 이러한 타협을 포기하고 극단적으로 자기중심적이 될 때에, 대상의 행복/보존은 고려되지 않는다.
히이사의 쿤에 대한 감정은 지독히 자기중심적이다. 그는 점잖게 ‘누구와든, 너의 행복만을 빈다’가 아니라 ‘내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다’고 아무 죄책감 없이 말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욕망은 쿤을 처절하게 파괴한다. 그러나 쿤이, 또한 내가, 히이사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히이사에게 주어지는 면죄부는 그의 욕망의 절대성 혹은 순수성에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이 너고, 내겐 단지 너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그에게 있어 쿤의 파멸은 곧 자신의 파멸이다. 그러나 운명, 혹은 숙명처럼 쿤에 대한 그의 열망은 너무나 절대적이어서 “다른 길이 없었다.” 파멸을 예감하면서도 달려가는 것밖에는.
우리는 자기보존을 위한 합리성으로 견고하게 구축된 세계에서 하루하루 살기 위해 애쓰면서도, 한편으론 모든 이성적인 판단과 계산을 뒤엎는-그리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불꽃같이 강렬하고 순결한 열정을 동경한다. 그러한 열정은 강력한 사회적 관습뿐 아니라 생명체로서의 자기보존의 본성까지도 거스르기에, 절대적이라고, 운명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누군가는 이를 “타산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가 견뎌낼 수 없는 신의 취기가 일으키는 움직임”이라고 표현했다. ‘신의 취기’라니. 더 이상 무얼 물을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이라는 굴레
‘사랑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구원은 없다.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을 벗어날 수 없으므로... ’(쿤)
타고 남은 잿더미 같은 세계에서 유지자로서의 의무에 짓눌려있는 쿤은, 빛나는 주홍색의 눈동자와 날개를 가진 샨카의 눈부신 생명력과 자유로움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샨카는 정말 자유로운 존재였을까. 아니, 그녀 또한 자신이 속한 세계의 이러저러한 규율에 얽매인 존재이며- 무엇보다도, 그녀 자신에게 매인 존재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이.
샨카가 설사 자유로운 존재라 해도 그를 소유하는 것으로 그 자유로움이 자신의 것이 되게 할 수는 없다. 상대에 대한 황홀한 동경과 도취에서 시작하더라도 결국 일상의 소소함으로 자리매김하고야 마는 것이 사랑의 운명이라, 모든 걸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았던, 마법과 같은 흥분과 열기가 가시고 나면 결국 그대로인 자신을 발견한다. 쿤 또한 샨카를 따라감으로써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어 했던,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키퍼/클로져로서의 자신을 결국 벗지 못해 절망한다.
사랑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자기 자신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메시지는 참으로 우울하다.(우리 그냥 다같이 콱 주거버리까...? -.-)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비루한 일상을 다시 돌아볼까. 그 하루하루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우리는 느끼고, 노력하고, 변한다. 때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듯할 때도 있고 때론 더 나빠지기도 하지만. 우리의 작고 사소한 또 하루는 또 하나의 작은 변화의 가능성이다. 아마도 이것이, 불꽃같은 열정이 아니더라도, 사소한 일상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지 않을까.
다라 - 민우회 신입활동가
재밌는 민우회 즐거운 민우회 만나서 참 조아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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