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1*12월호 [민우ING]청소녀 생활개혁 프로젝트 - 체육시간을 바꾸자1)
[민우ING] 청소녀 생활개혁 프로젝트 - 체육시간을 바꾸자1)
우리가 ‘체육시간’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
봉달
나는 체육시간에 대한 ‘별다른’ 기억이 없다. 체육시간은 늘 있었지만, 기억할 만한 경험이 없다. 억지로 떠올려보자면 체력장(당시엔 입시점수에 포함되었던)에서 ‘던지기’는 못 했고 ‘오래매달리기’는 끝까지 버텼다는 정도이다. 또 한번도 무슨 운동을 하고 싶다거나 운동을 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나는 그저 체육시간이 싫고 운동도 못하는 아이였다.
여학생들에게는 체육시간이 별 의미가 없어요.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 자체가 어렵죠. 남학생들은 알아서 운동을 하는데 여학생들은 강제로 시키지 않으면 앉아 있으려고만 해요. - 체육교사 간담회 중
체육시간에 나의 모습이 그러했듯이, 대부분의 체육교사들은 여학생들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교사들의 ‘체험 삶의 현장’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학생은 원래 운동을 싫어해’라고 결론짓곤 한다. 하지만 나에게도 신나게 뛰어 놀았던 기억이 있다. 아마 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뛰놀던 시절’이 막을 내린 것은 ‘남자애들과는 놀지 않는 시절’이 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남동생은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태권도 도장에 보내졌고 나와 언니는 엄마를 졸라 피아노 학원에 갔다. ‘태권도 하는 여자애’보다는 ‘피아노 치는 여자애’가 그럴듯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 속 여주인공들의 모습은 늘 같았다. 마르고 가냘픈 몸으로 조용하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모습. 나도 그녀들처럼 되고 싶었다. 그러니까 유년기의 나에게는 운동이 특별히 ‘해볼만한 무엇’으로 여겨질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중학생이 되면서 내가 운동을 하는 유일한 시간은 체육시간이 되었다. 줄곧 여학교만 다녔던 내가 체육시간에 해본 구기종목은 ‘피구’ 한 가지였다. 배구는 토스 시험이, 농구는 드리블 시험이 전부였다. 체육대회 때 배구경기를 하곤 했지만 그건 반에서 키 크고 운동 잘하는 몇몇 아이들의 몫이었다. 체육시간에 나는 즐겁게 운동장을 뛰어본 기억도, 선생님의 격려를 받아 본 기억도 없다. 나에게 운동은 단지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연습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랬던 나와 운동의 관계가 반전된 것은 나 스스로 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내 몸이 일상을 견디기 버거워지면서 어쩔 수 없이 운동을 시작했는데, 속도는 더뎠지만 몸이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운동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왔다. 그저 즐겁게 운동해 볼 기회가 없었고, 나에게 맞는 운동을 찾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 아빠가 조기 축구를 하셨는데, 3살 정도부터 새벽에 제가 먼저 일어나서 아빠를 깨워서 갔대요. (축구를 하려고요?) 네. 제가 전학 온 게 3학년이었는데 그때까지 6시에 일어나서 하루도 안 빠지고 가방을 챙겨서 가서 운동을 하고... - 중학교 넷볼팀 간담회 중
해외 단기 연수를 다녀온 학생들은 태도부터 다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기능은 낮아도 무척 적극적이다. - 체육교사 간담회 중
어릴 적 아빠를 따라 축구를 했던 경험을 가졌던 한 친구는 지금도 특별활동으로 넷볼을 즐기는 ‘운동소녀’가 되었다. 그리고 체육활동에 대한 ‘다른 경험’은 남의 시선에 신경 안 쓰고 적극적인 ‘다른 태도’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스스로 운동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운동을 싫어하고 못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운동’은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그 느낌에 대해 소통하기 어려울 수 있다. 누구에게나 ‘몸 움직임을 통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면, 그 임계점을 넘어 ‘운동 중독자’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여전히 운동 싫어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학생’들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제한된다는 것이다. ‘여학생들은 원래 운동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또는 ‘여학생들에게는 운동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운동하는 재미를 알게 되면서 나는 종종 생각해 본다. 체육시간에 좀더 즐거운 기억이 많았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
저는 땀나는 건 싫어하는데요, 운동하고 나서요 흘리는 땀은요, 좋아요. 왜냐면요 그러니까.. 시원하다고 해야 하나? 뭔가 쫌 홀가분해지는 것 같아요. (축구하면서) 00랑 저랑 배를 깠어요. 선생님도 그렇구. 남자들도 배를 까는데 여자라구 못 까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제가요 너무 더울 때는 여름에요. 저는 배를 까고 다녀요.- 짝토축구 참가 청소녀
‘짝토축구’는 매월 짝수 토요일에 모여서 축구를 하는 여성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에 참가하고 있는 청소녀들은 ‘축구’를 하면서 경험한 자신의 느낌과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운동을 통해 경험하는 몸은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여성적’ 몸과는 상당한 거리를 갖는다. 격렬한 움직임, 헝클어진 옷, 땀에 젖은 몸. 하지만 운동의 재미와 즐거움은 그 경험을 반복하게 하고, 결국 내가 얻은 이미지가 기존의 ‘여성적’ 이미지를 압도할 수 있게 된다. ‘땀 흘리는’ 쾌감을 알게 되고, ‘배를 까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가 되게 내성적이었어요. 제가 고등학교 올라오면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제가 택견이나 그런 운동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 만나면서 먼저 사람들한테 다가가서 인사할 수 있고.. 우선 제가 먼저 다가가고 성격이 활발해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전에는 생각도 못 했던 걸 생각할 수도 있고 선입견 같은 것도 쉽게 안 갖고. 택견 이후에 느낀 건 뭐든지 경험하지 않고 선입견 갖는 게 무서운 거구나 직접 해봐야겠구나. 그런 편견을 깨고 생각하려고 많이 해요. 운동하지 않았으면 이런 생각이나 이런 마음가짐 같은 걸 갖지 못했어요. 그리고 내가 이루고 싶은 일도 내 몸이 강해지면서 가능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구요. 이걸 이루기 위해서 내 몸부터 챙겨야겠다. 난 강하니까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들고... - 짝토축구 참가 청소녀
새로운 몸 이미지를 갖게 되고 내 몸의 욕구와 느낌에 집중하게 되는 경험은 이전까지 익숙했던 관계와 일상의 양식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운동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면서 성격이 변하고 자신감도 생겼고, 관계를 자신의 의지대로 풀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말한다. 운동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운동을 상당히 잘하며 좋아하게 된 경험을 통해 자신이 ‘못할 일’이란 없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는 몸을 강하게 해야 한다고 다짐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청소녀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별사회가 여성에게 제한하는 사회적 한계를 넘어설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즐거운 운동’은 건강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몸의 변화를 통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여성에게 요구하는 몸의 이미지를 벗어나 자신의 느낌과 욕구에 충실해지는 변화가 삶의 영역에 대한 가능성과 상상력의 확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체육시간이 대부분의 청소녀들에게 운동을 권장하는 유일한 시간이라고 할 때 체육시간의 역할은 더욱 중요할 수 있다. 체육시간이 운동의 쾌감을 맛볼 수 있는 시간, 몸을 움직이는 새로운 느낌을 체험하는 시간, 땀 흘리며 운동하는 모습이 격려되고 지지받는 시간이 된다면, 청소녀들은 더 이상 ‘앉아 있으려고만’ 하지도 않을 것이며 몸의 변화를 통해 자신과 삶이 변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체육시간에 즐겁게 축구를 배웠다면 좀더 적극적인 성격이 되지 않았을까? 태권도를 배웠다면 늦은 밤 골목길에서 두려움에 떠는 일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농구를 배웠더라면 키라도 조금 더 커지지 않았을까? 이런 가능성들이야 말로 체육시간이 청소녀들에게 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선물일 것이다.
1) 민우회가 올해 6월부터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중,고등학교 청소녀 2,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학교 체육활동 실태조사, 체육교사 간담회, 개별 청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심층면접을 바탕으로 ‘청소녀 학교 체육활동 경험 보고서’ 제작 및 가이드라인 마련 작업과 ‘청소녀를 위한 체육시간 프로그램’ 개발 작업을 진행 중이다.
봉달 : 덥다가 갑자기 추워진 날씨, 변덕스러움, 나를 보는 것 같다.
늘 한결같은 나였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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