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1*12월호 [특집]나는, 성폭력을 이렇게 읽는다-가이드라인, 모니터링에 활용해 봅시다!_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특집] 나는, 성폭력을 이렇게 읽는다
가이드라인, 모니터링에 활용해 봅시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이제 가이드라인이 실제 기사 모니터링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자.
「...4세 때 부모가 이혼해 결손가정에서 생활해온 12세 소녀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가출했다가 끝내 성폭력 피해자로 전락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경향 1.16 ‘추악한 어른’결손과정 비관 가출 12세 초등생 성폭행한 뒤 원조교제까지 시켜>
이 기사는 사회면의 단신으로 성폭력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결손가정'을 ‘비관해 가출을 했다가 끝내 성폭력 피해자로 전락’했다고 쓰다니. 우선 이 기사는 피해자의 환경이 성폭력 사건의 원인으로 작용한 듯한 인상을 남긴다.
가이드라인 <6. 성폭력 발생 동기를 피해자가 제공한 것으로 보도하지 않는다>에 해당.
또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해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상황으로 설명하지 않고 부끄러워해야할 ‘전락’으로 묘사하는 것은 성폭력 피해 자체를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는 잘못된 통념을 강화한다.
가이드라인 <9. 성폭력을 여성의 순결함이 훼손된 일, 그러므로 수치스러운 일로 바라보지 않는다.>에 해당.
다음 기사는 대전 연쇄성폭력 사건의 범인 검거 보도로 「“모욕 준 여성에 화나서 첫 범행”」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범행동기는 모욕감=이씨는 20일 경찰에서 “택시운전사로 일할 때 다소 길을 돌았더니 만취한 젊은 여성이 ‘길도 모르고 무슨 운전을 해’라는 등 모욕적인 말을 했다”고 말했다. 이 씨는 유흥업소 종업원으로 추정되는 그 여성을 뒤따라가 성폭행했는데 범행이 손쉬워 계속 비슷한 일을 저질렀다.」
<동아 1.21. “모욕 준 여성에 화나서 첫 범행”>
가해자들은 늘 ‘피해자가 당할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혹은 자신이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열악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라고 자신의 범행을 설명한다. 이것은 피의자의 입장이 된 가해자가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자기 합리화 심리일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성폭력 상황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진술한다. 그러나 성폭력에 대한 통념들은 대부분 가해자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어 성폭력의 피해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성폭력은 남성 중심적 성문화와 가해자 중심 사회를 드러내는 사회문제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해자의 변명들로 성폭력 사건을 설명하는 것은 피해자가 성폭력을 유발한 요인을 가지고 있다거나, 참을 수 없는 성욕으로 인한 실수라는 식의 기존 통념들을 강화하고 가해자의 폭력을 정당화 한다.
가이드라인 <10. 자신의 가해를 변명하는 가해자의 말을 부각시켜 보도하지 않는다>에 해당
아래 두 기사는 교사가 남자아이의 성기를 만지는 행위를 성추행으로 판결한 판례를 같은 날 보도한 두 신문의 기사이다.
「남자 교사가 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의 성기를 장난스럽게 만지는 행위도 ‘성추행’이 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중략...) 박군은 1심 법정에서 “선생님이 옷 위로 살살 자극을 주다가 성기가 딱딱해지면 쥐어뜯고 꼬집었다” “미움받고 맞을까봐 거부하지 못했다” “아프고 불쾌했다” “ 창피해서 어머니에게 말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조선 1.27 “요녀석, 고추 좀 만져보자”는 성추행>
위의 기사에서는 삽화까지 동원하여 성폭력의 피해 사실을 구체적이고 시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피해 내용을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피해의 심각성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될까? 일단 서울신문의 기사와 비교해보자.
「대법원 3부는 26일 초등학교 수업시간에 남학생의 성기를 만져 미성년자 의제강제추행혐의로 기소된 이모씨에게 벌금 5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서울 1.27 교사가 남학생 ‘고추’ 만지면 성추행>
구체적인 묘사 없이도 피해 내용을 충실히 전달하고 있다. 이에 비해 조선일보의 기사는 필요이상으로 피해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선정적인 보도인 것이다.
가이드라인 <3. 불필요한 경우에도 피해의 내용을 자세히 묘사해 선정적으로 보도하지 않는다>에 해당.
이런 기사도 있다.
「여자 회사원 신모(26)씨는 작년 12월 30일 무료 사주 카페에서 일대일 채팅으로 운세를 보던 중 ‘이동수가 있으니 여행을 가라. 여행지에서 천생연분을 것’이라는 점괘를 들었다. 역술인은 신씨에게 “강릉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정동진 가는 길을 물어보는 사람이 바로 운명의 남자”라고 짚어줬다. 여행을 떠났던 신씨는 점괘처럼 치과의사를 만났고, 술을 마신 후 성폭행 당했다. 이 치과의사는 바로 그 역술인 이었다.(하략..) 」
<조선 3.31 사이버 역술인의 엉큼한 사주풀이>
사이버 역술인이 고객들을 속여서 자신과 강제로 성행위를 하게 하는 것은 분명한 성폭력사안이다. 하지만 기사 제목의 ‘엉큼한’이라는 말은 재미있는 성적인 해프닝에나 붙일 수 있는 말이다. 삽화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성폭력 사건의 폭력성을 희석하고 사건을 흥미꺼리로 희화화하고 있는 것이다.
가이드라인 <1. 피해자에게는 폭력인 사건을 연애, 성적인 관계로 바라보지 않는다>, <2. 성폭력 사건을 선정적이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꺼리로 다루지 않는다>에 해당.
다음 기사는 연쇄성폭력이 연달아 발생하고 있는 세태를 걱정하면서 예방책을 소개하고 있다.
「서울 서북부 지역에서 여성 13명을 잇따라 성폭행했다고 자백한 김모(31․일명 ‘마포 발바리’)씨의 행각이 드러나면서 성폭행 예방을 위해 지켜야 할 수칙들이 주목받고 있다. 김씨가 주로 대낮에 혼자 있는 여성을 타깃으로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중략..) ◆방문객은 꼭 신원 확인을 = 성폭력 사건은 흔히 심야시간대에 일어난다. 하지만 김씨는 낮시간을 노렸다. (..중략..) 연쇄 성폭행범은 원룸촌을 주로 범행 장소로 삼는다. 젊은 여성이 혼자 사는 경우가 많아서다. 원룸에 살 경우 빨래 건조대에 남자 양말이나 옷을 걸어두는 것도 범죄를 예방하는 방법이다. 또 인적이 드문 골목길보다 큰길로 다니고, 만약을 대비해 호신용품을 항상 지니고 있는 것이 좋다.」
<중앙 4.28 마포 일대 13건 성폭행 용의자 잡고 보니… 문 열린 다세대, 원룸 노렸다>
신문지상에서는 이제 '발바리'가 연쇄성폭행범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명칭이 가해자의 신출귀몰한 도피행각을 잘 드러내 줄지는 모르나 수많은 피해자들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힌 가해자를 지칭하는 말로는 적절치 못하다.
가이드라인 <11. 폭력성을 희석시키는 용어를 사용해 사건이나 가해자를 지칭하지 않는다>에 해당.
또한 상담통계에 따르면 성폭력의 80%는 아는 사람에 의해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고 있다. 으슥한 밤길에 낯모르는 범죄자에 의해 일어나는 사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폭력 사건은 흔히 심야시간대에 일어난다’라는 기사는 성폭력은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통념을 근거 없이 사용함으로서 이 잘못된 통념을 재생산하고 있다.
가이드라인 <4. 성폭력을 일상과 분리된 범죄로만 부각하지 않는다>에 해당.
남자 양말이나 옷을 건조대에 걸어두는 것을 예방책으로 소개하는 부분도 짚고 넘어가자. 잠재적 피해자로서 여성 개인을 중심에 두고 여성이 자신의 몸가짐을 단속해야 범죄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전하는 보도태도는 성폭력이 ‘피해자가 가해자의 성욕을 유발했기 때문에’,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허점을 노출시켰기 때문에’ 발생하는 범죄라는 잘못된 통념을 강화한다.
또한 범행 대상으로 여성을 지목하는 보도는 여성을 ‘언제 피해 입을지 모르는’, ‘피해를 두려워하는’ 존재로 위치 짓는다는 점에서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가이드라인 <8. 성폭력 사건 예방을 위해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한 여성 개인의 예방만을 강조하지 않는다>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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