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2월호 [모람풍경]어느 여성주의자의 영어공부
[2007년 1,2월호 모람풍경]
어느 여성주의자의 (여성단체에 회비를 내면 여성주의자라 우기는) 영어공부
박혜란
1995년 4월. 비행기 안
나는 신혼여행 가는 신부. 목은 마른데 승무원은 온통 외국인. 물 달라는 말을 하기가 어찌나 망설여지는지. 옆에 앉은 남자는 비행기에 타자마자 취침 모드. 겨우 물 한잔을 부탁하려니 자존심도 상하고. ‘나는 목이 마르다. 음~그래 thirsty! 근데 무슨 발음이었지. 번데기였던 것 같은데. 내 번데기 발음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아니 그냥 쉽게 실례합니다. 물 좀 주세요 해야지. 근데 좀이 영어로 뭐지?’
지금 생각해 보면 쓸데없이‘좀’은 왜 영어로 생각하려 했는지? 아무튼 점점 목은 타고 그럴수록 머릿속엔 불이 나고. ‘그래 제일 쉽게, ‘워러 플리스’하는거야. 근데‘플리스 워러야? 워러 플리스야?’와~! 미치겠네’
그 날 나는 물은 마셨을까?
2006년 4월. 고양 민우회 사무실
그 후 민우회를 만났고, 여성학 책을 읽으며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발견하는 즐거움에 학구열을 더해 가고 있었다. 여기저기 외부강의도 들으러 다니게 되었고, 거기서 알게 된 선생님 몇 분이 대학원 진학을 적극 권유하셨고 나도 그러고 싶었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오호~ 통재라. 딱 걸렸어. 영어시험을 봐야 한다네! 중3때 총각 영어 선생님 유학가신 이후로 그 쪽에서는 손 땠는데. 여기서 걸릴 줄이야.ㅠㅠ 그러나 이렇게 눈이 번쩍 떠지게 하는 여성학을 위해서라면…. 그래, 그럼 여성주의 영어책 읽기를 먼저 해서 영어 실력을 쌓자. 아자아자.’
이렇게 해서 회원과 상근자 몇 명의 의기투합으로 지부에서 국내에 번역본도 없는 여성학 책을 복사하고 소모임도 꾸렸다. 그러나 문제는 그때부터. 단어 찾다가 시간 다가고, 겨우 찾으면 문장에 그 놈의 that은 왜 그리지 자주 나오는지. 그래도 억지로 꿰어 맞춰 해석해 놓고 보면 무슨 뜻인지 정리가 돼야 발제를 하지? 점입가경도 유분수지. 아~뜨거운 학구열을 단숨에 식혀 버린 차가운 실력이여!
2006년 9월. △△아파트 10층 1호 서재
‘수명 100세 시대가 온다는데, 벌써 포기 할 수 없지.
환갑에 대학원 가면 어때.
혹시 알아? 고령자 특례입학이 생길지.
그 때를 대비해‘I am a wom’부터 하는 거야.
다시 한번 아자아자’
이렇게 해서 동네 영어 문법학원 원장님의 주부 특강 3개월을 듣고, 부모님이 수업료 주실 땐 안하던 공부를 내 돈 써가며 하겠다는 몇몇 아줌마들이 분기탱천하여 스터디 그룹을‘또’만들었다. 먼저 쉬운 책으로 독해 연습을 하자! 책은 멤버 중 한명의 추천으로 알리 맥그로우 주연으로 유명한 영화‘love story’로 골랐다. 영화를 글로 옮겨 놓은 거라 문장은 짧으나 미국식 뉘앙스를 이해하지 못하니 첫 날부터 독해는 안하고 전부 소설가가 되어서 각자 한마디씩…. 콧대 높고 똑똑한 여주인공(제니)이 재벌가의 아들이자 하버드에 다니면서 유명한 아이스하키 선수이기도 한 남자 주인공(올리버)과 커피를 마시게 됐다. 제니의 재치있는 말솜씨 때문에 커피를 사지 않으면 부잣집 멍청이가 되는 상황이라(물론 안경을 벗은 제니의 갈색 눈에 반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커피를 마시러간 두 남녀. 올리버가 제니에게 묻는다.
“왜 내가 마음에 드니?”
제니가 말한다.
“I like your body”
이 대목에‘딱’걸렸다.
해석자1: 여우같은 여자애가 먼저 꼬리를 치는 거다. 부자라는 걸 알고.
해석자2: 어떻게 여자가 처음 만난 남자한테 몸이 맘에 든다. 어쩌구 그래요. 발칙하게. 미국 애들은 좀….
해석자3: 모든 외적 조건을 떠나서 사람 자체가 좋다는 뜻아니예요?
나:‘ 바~디’. 좋은 말이 예요.ㅎㅎㅎ. 이렇게 자기감정에 솔직하다니. 바디… 좋아 좋아.
갑자기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나: 아니~, 우리 남편이 그렇다는 게 아니고. 170m도 안되고, 뚱뚱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돈이 없죠. 그냥 제니가 멋있게 보여서….
아직 내 정체를 모르는 군. 조심해야지.
2007년 1월 마지막날 오전. △△아파트 10층 1호 거실
한 달 넘게 소설 쓰는데 지친 나와 그들은 영화를 보기로 했다. 제니가 장학금을 받게 되어 프랑스로 공부하러 가겠다고 하자 올리버는 결혼하자고 한다. 제니는 학생이란 이름으로는 평등하지만 졸업 후엔 서로 속한 세상이 다르다고 말한다. 그 때 슬픔가득한 눈으로 제니를 간절히 바라보며 올리버는 말한다.
“제발, 제니….”
관객1 : 너무 멋있다. 청혼을 저렇게 하다니. 터프하면서 모성을 자극하는 매력…제대로야.
관객2 : 돈도 많은 남잔데. 같이 유학가면 될 걸.
관객3 : 저런 사랑 나 두 해봤으면….
나 : 아니, 착한 여잔 죽어서 천당 가고, 나쁜 여잔 살아서 아무데나 간다는데. 그냥 유학가지.
관객들은 역시 아무 말이 없었고, 영화는 계속됐다.
올리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두 남녀. 열받은 올리버 아버지는 학비를 주지 않고. 올리버의 법대 학비를 벌기 위해 제니는 음악을 포기하고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 녹초가 된다. 집에 오면 남편은 공부한다고 방은 온통 엉망이고, 우편물(세금 고지서에 대한 은유적 표현 아닐까)은 보지 않은 채 쌓아놓고 그렇게 사랑하는 제니가 왔는데 눈도 안 맞추고 책에 처박혀 ‘배고파. 밥줘’한다.
관객4 : 저 남자 어쩜 저렇게 집중을 잘 할까?
관객5 : 아휴~. 하버드 아무나 가나. 제니 봉 잡은 거지!
관객6 : 우리 아들이 저거 봐야 돼. 여자 친구 생겼다고 공부도 안하고 맨 날 거울만 보고. 내 속이 터져요.
나 : 일하는 여성에게 두 배의 노동을 강요하다니. 그것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저 동네나 이 동네나… 저러니 제 명에 죽겠어?
이번에도 관객들은 아무 말이 없었고, 영화는 계속됐다. 삶에 찌든 제니는 트레이드 마크 같은 빨간색 옷은 입지도 못하고 온통 검은색 바지, 흰색 티셔츠만 입고 나온다.
나 : 빨간 옷 좋았는데…계속 입지
관객7 : 나 학교 다닐 때 빨간 바지 입는 여자는 맘대로 해도 된다는 뜻이라서 아무나 입고 다닐 수 없었어요.
나도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장롱 속에 있는 내 빨간 바지가 자꾸 어른 거렸다.
눈치가 있지 여주인공 죽는다고 우는 사람까지 있는 데 더 이상 분위기를 깰 수 있겠는가? 영화는 끝났고, 관객8이 아주 조심스레 나에게 묻는다.
“남편하곤 괜찮으세요?”
이번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젯밤 우리 부부 대화가 자꾸 들렸다.
2007년 1월 마지막 날 빼기 하루 전 날 밤, 우리 집
내용이 열 받게 해도 영어는 해야지. 아자아자.
공부하는 내 책을 힐끗 본 남편.
“고3 때 독해 그 책으로 우리 학년 전체가 다 했는데 여 주인공이 우리들 여신이었지(뭘 상상하는지, 누굴 상상하는지 황홀한 표정이다). 어~ 사진도 있네 한 번 보자”
그 소리 듣고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고?
“남자들의 여성에 대한 환타지의 결정판이지. 청순하면서 섹씨하지. 똑똑하면서 순종적이지. 도전적이며 차분하지. 자기 장학금도 포기하고 돈 벌어 남자 학비 대고 살림까지 다하지. 시아버지하고 덜 떨어진 남편 사이 화해도 시키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편이 말한다)
“일찍 죽어주기까지 하잖아.ㅋㅋㅋ”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상에… 당신은 변호사도 재벌도 아니지. 난 음악전공도 아니고 당신 공부 끝나고 만났고. 반대는커녕 마흔 다된 노총각 구제 해준다고 시부모님이 감사해 하는 결혼 했으니까 난 일찍 안 죽을 거야. 아니 못 죽어”
“아니 딴 뜻은 아니고. 그 사랑이… 그러니까, 그게 아름답다고”
“아름다워? 아름답지! 잘 됐다. 나 공부 계속할 꺼니까 당신 돈 벌어 내 학비 대고 공부에 집중 할 수 있게 살림도 해라. 진짜 아름답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007년 1월 마지막 날 오후. 이 글을 쓰면서
제니는 죽는 순간까지 베트남 파병 용사가 돌아오는 얘기하고(끝까지 고상하게), 자신의 프랑스 유학 반대 한 것에 대해 올리버가 죄책감을 가지면 죽어서 귀신 될꺼라고 협박하고(끝까지 멋있게), 꼭 재혼하라고 그래야 내가 편하게 죽을 수 있다고 신신 당부하고(끝까지 아량있게) 환자 같지 않게 건강하고 예쁜 얼굴로 죽는다.
나야 산 사람인데도 얼굴이 사흘 피죽도 못 먹은 사람 같으니 저렇게 죽을 수는 없고, 다니라는 직장도 결혼했으니 다닐 수 없다고 때려 치웠고, 나 죽은 후에 재혼을 하든 삼혼을 하든 이 세상일 왜 신경 쓰겠어. 온 세상 차비 없이 구경 다니느라 바쁠 텐데….
근데 나의 목표는 영어였지. 여성주의 공부에 방해되네. 분석하지 말고 단어 외우자. 애 학원에서 오기 전에. 아자아자!!
제니가 아이를...임신한 ; impregnate, 난공 불락의 ; impregnable 이건 또 뭐야!!! 임신하면 난공불락이라고!!! 아~ 단어도 못 외우겠다.
박혜란 : 닉네임은 평안이예요. 고양 지부에서 성폭력 상담원과 성교육 강사 활동 하고 있어요. '분열하는 주체는 아름답다'를 금과옥조로 받들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분열하는 주체가 평안을 찾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는 걸 시시각각 느끼며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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