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3*4월호 [국제통신원]할머니들의여성운동
2007년 3,4월호_국제통신원
할머니들의 여성운동
정경자
호주에 사는 가장 큰 즐거움이라면 근접해 있는 공원, 해변, 다양한 여러 나라의 문화와 음식 등이지만, 나이에 관한 심각한 차별이 없는 것도 삶을 편안하게 한다. 대 종가집임을 큰 자랑으로 여기는 조부모와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수없이 듣던 말이“나이에 맞게”였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던 것 중의 하나도 행동도, 차림새도, 말도 나이에 맞게 잘 가려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호주의 여성운동 모임에는 언제나 할머니 활동가들이 꽤 많이 참여한다. 이번 3월 10일 시드니 시청 앞에서 열린 세계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 행진에도 예외 없이 많은 분들이 참석했다. 노조원도 계셨고, 오랫동안 여성 단체의 회원인 분, 또 70년대에는 여성운동의 선두에 있었고 한동안 페모크라트(femocrat, 여성주의 관료)로 활동하다 대학으로 돌아가 이민여성과 난민들을 도와주고 있는 분도 눈에 띄었다.
이 모임을 주최한 사람들은 젊은 여성들이었는데, 사진을 찍는 사람, 비디오를 촬영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때마다 사실 나는 깜짝깜짝 놀라고 있었다. 전위적이기까지 한 차림새와 달리 그들의 얼굴에서 확인되는 나이 때문에…. 시위대 앞에서 북 등 악기를 울려대는 분들도 역시나이 드신 분들이었다.
호주에 온지 얼마 안 되어 여성 단체 모임에 초대된 적이 있었다. 한 회원의 집에서 모임이 열리고 있었는데 흡사 경로원이라도 온 줄로 착각할 만큼 참석자의 대부분이 나이 드신 분들 일색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오신 분, 지팡이를 의지하고 오신 분, 한 분은 자신이 거의 90이 다 되었다고 자랑을 하기도 했다. 젊은 사람들이 오히려 소수였다.
한국의 여성단체협의회 격에 해당하는, 1896년에 세워진 National Council of women 의 뉴사우쓰웨일즈 사무국을 꾸려나가고 있는 분들도 두 분의 할머니이시다. 이곳 시드니 한인 공동체에서도 여성 운동을 이끌고 가시는 분들 또한 생업에서 은퇴한 나이 지긋한 분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시간과 능력과 재원을 투자해서 여성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이민여성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시청의 도움으로‘사랑방’을 마련해서 사회적으로 소외 된 여성들에게 친정과 같은 역할을 하고 계시다.
내가 일하는 곳에도 나이 들어 전문학교에 다니시며 자원 봉사를 하러 나오시는 중국 분이 계신다. 나이를 물어본 적은 없지만(이곳에서는 나이를 물어보는 결례를 범하는 일이 거의 없다), 60대 쯤으로 보이는 이분은 20대부터 50대 말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일하는 이곳에서 다른 활동가들과도 아주 잘 어울리며 우리에게 타이치(체조)를 가르쳐주시기도 하고, 25주년 행사준비를 위해 과거 활동가들의 목록을 정리하는 지루한 작업을 깔끔하게 해내시기도 한다.
우리 운영위원회에 비비(vivi) 라는 애칭으로 불리우는 운영위원은 25년을 우리단체의 활동에 참여해왔고 여전히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계신다. 이 분은 호주 NGO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리스인 부모 밑에서 이민자로 호주에 와서 이민여성 등 약자들을 대변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고 있다. 60이 넘은 지금도 NGO의 대표로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이 분은 큰 체구와 큰 목소리 때문에도 유명한데 (보청기 때문에 본인은 자신이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정부 부처에서 주관하는 모임에서 늘 예리한 비판과 제언을 하기 때문에 이 분이 나타나면 공무원들이 긴장한다는 이야기도 회자 된다.
이번 3월 10일 행사에는 특히 Older Women’s Network 라는 단체에서 많은 분들이 참여하셨다. 이 모임에 대해서는 나도 최근에 알게 됐는데, 여성 노인들의 권익 증진을 위해 많은 활동들을 펼치고 있다.‘ 노인 여성들은 그들이 정치∙경제∙사회∙문화생활에 기여한 바를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모든 의사결정에 참여 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원칙 아래, 이 단체는 노인 여성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중교통, 건강, 교육훈련기회, 재정적 안정, 경로. 양로시설. 노인 부양, 복지 등에 대해 정부에 정책 제언을 하고 있으며, 이밖 에도 권리 찾기, 토론, 영화, 음악, 연극 등 다양한 모임을 이끌고 있다.
행진 중에도 그분들은 참 지혜로웠다. 빠른 속도로 행진하는 우리들에게 조금 천천히 가자고 주문했다. 그래야 좀더 오랜 시간 우리의 메시지를 거리에 즐비해 있는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지 않겠냐며…. 이렇게 오랜 동안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존경스러웠고, 그러한 그 분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이곳 여성 운동의 분위기와 여건이 부러웠다.
30도가 넘는 더위였지만 여유롭게 행진하는 고참 언니들 앞에서 불평 한마디 하지 못하고 한 시간 여의 행진을 마쳤다. 행진 중에 만난 예전 직장 동료의 어린 딸 손을 잡고, 나 또한 할머니가 되어도 이들처럼 여성문제와 여성운동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기를 기원하고 또 다짐하였다.
정경자 ● 서울에서 여성학을 공부하고 여성 단체에서 활동하다 1995년 호주에서 여성정책학을 공부했다. 뉴싸우쓰웨일즈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원으로 일하며 한국과 호주의 여성운동, 여성정책비교 등을 연구했다. 현재 Immigrant Women's Speakout Association NSW에서 정책관으로 일하고 있으며, 북한 이주 여성을 통해 본 북한 시민 사회 연구, 호주 한국 성매매 여성에 관한 연구 등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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