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3*4월호 [연재기획]Ⅰ.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_셀프인터뷰II
2007년 3*4월호_연재기획
Ⅰ.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 _ 셀프인터뷰Ⅱ
<셀프인터뷰>는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하는 방식의 인터뷰입니다.
페미니즘이 내게 가져다준 것들
혁상
Q긴장돼 보인다. 떨리나?
A몹시. 당연하지 않겠나. 그러는 당신도 그리 편해 보이지만은 않다.
Q왜 아니겠나. 본 인터뷰는 여성민우회의 <함께가는여성>에 실린다. 생물학적 남성으로서 여간 긴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마도 본지를 읽는 수많은 여성들이 “저 놈들 뭐라 지껄이나 좀 보자”면서 소매를 걷고 계시지 않겠는가. (웃음) 그러니 함께 긴장 좀 하자. 이번 인터뷰 주제가‘페미니즘이 내게 가져다 준 것들’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대체 당신에겐 무엇을 주었나?
A글쎄…(눈치 보며 뜸들이다) 눈치? 눈치 하나는 잘 보니까. 여성주의자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눈치밥만 늘었다. 좋게 말하자면 ‘삶의 긴장감’이라고나 할까? 생물학 적 남성으로 태어나, 남자로서 커왔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컷의 본성이 튀어 나올 수도 있다. 솔직히 여성주의적 삶이라는 것이 말은 참 멋지지만 실천의 과정은 정말 고달프지 않나. 그것은 여성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남자인 나는 몇 배는 더 노력해야 한다. 긴장 풀면 언니들한테 혼난다. (웃음)
Q이런 답변은 인기 관리를 위한 일종의 작업용 멘트처럼 들린다. 혹시 그런 식으로 점수 따면서 다니는 것 아닌가? 그나저나 ‘언니’라는 호칭을 쓰는 게 남자로서는 다소 애매모호한데,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가? 이런 건 확실히 따져야 한다.
A솔직히…(머뭇거리며) 요렇게 말하면 점수는 좀 따더라. (웃음) 내가 말하는 언니들은 현재 함께 활동하고 있는 여성주의 단체 ‘연분홍치마’활동가들을 의미한다. 워낙 허물없이 동고동락하다 보니 ‘언니’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워졌다. 아! 그러고 보니 ‘언니들과의 만남’도 페미니즘이 가져다 준 선물이 아닐까 싶다.
Q자연스럽게 단체 홍보까지 하고 있는데… 적당히 해라. 남사스럽다. 그나저나 남성으로서 여성주의 단체에서 활동 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여성주의를 고민하는 남자들이 많은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부담감이 있을 수 있겠다.
A그러니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희소성 덕분에 필요 이상의 ‘과찬’을 받는 경우가 있다.
남성 활동가로서 부담스러운 것이 바로 이거다. 물론 그런 시선 덕분에 반성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지만,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왠지 미안스럽기도 하다. 현장에서 개인적 고민을 나누다 보면 같은 수위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여성 활동가들보다 높게 평가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거 몹시 부담스럽다.
Q내가 알기로 당신은 칭찬을 먹고 사는 인간으로 알고 있는데, 공식적인 인터뷰라고 해서 너무 겸손 떠는 것 아닌가? 그런 칭찬을 애써 마다하다니.
A칭찬은 고래를 춤추게도 하지만 여성주의를 고민하는 남자라고 해서 더 칭찬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여성주의는 범인류적인 기본 소양인데 말이다. 게다가 남자들, 자꾸 잘한다, 잘한다 해주면 안 된다. 칭찬 계속 해주면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안다. 콧대가 하늘로 솟고, 어깨에 뽕 들어간다.
Q잠깐! 이건 또 다른 형태의 성차별주의 아닌가?
A고백하자면…그렇다. (한숨) 난 성차별주의자다. 남자를 잘 믿지 않는다.
Q여성주의 남성 활동가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최근의 상황에서, 이러한 발언 수위는 꽤나 문제적일 수도 있겠다. 부담스럽다면‘오프 더 레코드’찬스를 사용해도 좋다
A됐다고 본다. 많아지긴 했다지만 이 글을 읽을 남자 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말 나온 김에 좀 더 해보자. 얼마 전, 한 여성단체의 포럼에 우연히 참석하게 되었는데, 여성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남성 참가자들이 꽤 있더라. 그런데 어쩌면 하나같이 그리‘남성적’이신지. 밥 먹고 빈 그릇 싱크대에 옮겨 놓는 것 가지고 ‘난 가사노동도 돕는 여성주의자요!’라는 식이다. 그러면서 남성 일반에 대한 여성 활동가들의 비판에 대해서 아쉽다며 볼멘 소리다. 여성주의적 삶을 고민하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은 자신의 언행이 얼마나 남성적인지조차 깨닫지 못하더라. 그런 까닭에 난 아직까지 페미니스트를 자처 하는 남성들에게 동지적 신뢰를 느끼지 못 한다.
Q다소 흥분한 것 같지만, 이쯤에서 당신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너나 잘 해라.
A아…(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너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런 비판 역시 나나 당신이나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남성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반성하는 것이 얼마나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 것인지 깨닫지 못하는 남성 페미니스트들을 보면 좀 화가 난다. 남성이라는 육체와 존재만으로도 여성들에겐 폭력이 될 수 있는 세상에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페미니즘이 준 것이 또 하나 있다. ‘남성 혐오!’(웃음)
Q‘비여성적’주체로서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남성들이 문제라고 지적했는데, 반대로 여성 활동가들에게 느끼는 아쉬움은 없는가? 당신이 같은 남성들에게 느끼는 혐오감이 이 정도라면, 일부 여성주의자들 역시 당신을 곱게 바라보지는 않을 것만 같다.
A(조심스레) 왜 없겠는가. 정말 마음 맞는 친구들도 많은 반면에, 아쉬운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보통 본인에 대한 반응은 ‘극단적 호의’와 ‘완강한 거부’를 오가는 경우가 많다. 후자의 경우 이유는 자명하다. 내가 생물학적 남성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남자를 잘 믿지 못하긴 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간단한 인사 조차 거부하고 안면몰수 하시는 분들을 보면 난처하기 마련이다. 이해는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꽤나 상처 받는다.
Q남성으로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주제로 꽤나 많은 고민을 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 고민을 빌미로 근 2년 동안 주위의 활동가들을 괴롭혔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제서야 좀 정신을 차렸다고 들었는데, 그러한 고민을 어떻게 정리한 것인가?
A여성주의가 서로 소통함으로써 연대하는 삶의 자세라고 한다면, ‘성차’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태도 역시 문제라 생각한다. 물론 여성주의가 뛰어넘고자 하는 세상의 모순이 바로 그 ‘성차’에서 기인한 것이어서 더욱 민감하겠지만.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조건이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음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략적 선택이 아닌, 무조건적 단절 역시 여성주의적인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Q결국 남자들도 못 믿고 페미니스트들도 전적으로는 못 믿겠다는, 꽤나 분열적인 결론에까지 이르렀다. 막 나가자는 건 아니었음 좋겠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와 보니 당신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얼핏 들은 얘기로는 당신의 모친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데 사실인가?
A모친 영향도 있지만 부친과 함께 이룬 아름다운 불협화음의 공로도 빼놓을 수 없겠다. 사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살면서 젠더 모순을 깨닫지 못하는 게 더 웃긴 일 아닌가? 불감증 환자도 아니고. 어쨌든 남자라면 장군이 되셨을 모친은 가부장적 가족 체계를 참아내기 힘들어했다. 그 스트레스는 종종 자식을 향한 폭력으로 표출되었는데, 그 덕분에 반폭력주의에 대한 욕망과 확고한 신념을 어렸을 때 확립할 수 있었다. (웃음) 그런 불안 속에서 살아내면서 어린 시절부터 고민했었던 것 같다. 모친이 저 지경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부친은 왜 저리 불행해 보이는가? 그러면서 가족 이데올로기와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젠더 시스템을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가족이라는 단일한 계급적 환경에서 최종 심급은 자본이 아닌 ‘성차’였다. 그런데 가족을 벗어나도 상황은 비슷하더라. 대학에 입학한 뒤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학생운동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견딜 수가 없더라. 운동판의 감수성 자체도 보수적이었지만, 어쩜 그리 남성중심적일 수 있는가? 참 가관이더라. 남성 활동가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은 그때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설명하지 않아도 눈에 선하지 않은가? 결국 그 때였던 것 같다. 개인적 생활부터 라도 항상 반성하며 살자는 결심을 한 것이다. 여성주의적으로 아니, 최대한 남성중심적으로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것이.
Q꽤나 거창하게 들리는데, 왠지 미화된 냄새가 풍기긴 하지만…. 정말 그랬는지는 다음 기회에 검증해 보기로 하고, 슬슬 지겨워지고 있는데 마지막 질문을 하며 정리해 보겠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지금의 당신, 페미니스트인가?
A흠…. (먼산을 바라보더니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빈다. 한참 동안 커피잔을 응시하다가) 후후.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남성…. 그 정도로 해두자.
Q재수없다. 그렇게 빠져 나갈 구멍 만들어 놓으니 마음이 편한가? 왜 그리 용기가 없나? (테이블을 손으로‘쾅’내려치며) 왜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 하는가?
A알았다. (뻘쭘) 나는, 페미…니…스…트…다. 됐는가?
Q당신, 이제 앞으로 그 말에 책임지며 살아야 한다.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 <함께가는 여성>의 열독률이 얼마나 높은 줄 아나? 이 글을 읽은 수많은 빅시스터들이 당신을 지켜볼 것이다. 부디 건투를 빈다.
A그대 역시. 이거, 이거, 눈치만 더 늘게 생겼다. (웃음)
혁상 ●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 활동가.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언니들이 있어 너무나 행복한,
여성주의를 고민하는 아직 설익은 남성 활동가.
아, 부끄부끄~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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