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3*4월호 [연재기획]Ⅰ.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_셀프인터뷰I
2007년 3*4월호_연재기획
Ⅰ.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_셀프인터뷰Ⅰ
<셀프인터뷰>는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하는 방식의 인터뷰입니다.
나의 ‘주홍글씨’
박유
여성스러움에 대한 혼돈
점점 진해지는 화장, 점점 높아지는 구두굽. 외모지상주의에 굴복하는 건 남성중심사회에 편입하려는 기생충 같은 짓이라고 말해온 나다. 하지만 내 일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게 문제이지. 예뻐지려고 애를 쓰고, 돈을 벌면 얼굴에 칼을 대보는 건 어떨까 고민한다. 수려한 외모와 바람직한 몸매가 능력을 넘어서서 하나의 권력이 된 한국사회의 오늘을 사는 나는, 개인의 힘으로 이런 시대의 조류마저 거스를 수는 없다고 ‘미친’자기 합리화에 풍덩 빠져버리곤 한다. 더럽고 추한 모습이 아닐 수 없지. 그런 걸 달관하는 경지에 이르러야만 페미니스트다운 건데 말이야. 가끔은 나도 한번쯤 ‘미녀’로 살아보고 싶은 몽상에 잠기곤 한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 사는 게 한결 수월해질 것도 같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더군다나 여성스러움의 상징이자 요즘시대 미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S라인’의 부재. 정말 허전하기 그지없지. 내 여성스럽지 못한 외모에 대한 불평불만은 끝이 없는 일상과 함께한다. 반복 재생 그리고 다시 반복. 페미니스트 하면 딱 떠오르는 B사감의 이미지. 사회적 편견이 그려놓은 그 모습 에서 나 또한 한 번도 붓 자락을 들고 고쳐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야, S라인을 가진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었어. 외모를 가지고 한 여성의 가치를 판단하고 값을 매기는 것은 분명 페미니즘의 비난대상 1호잖아. 그런데 그것을 가지지 못함에 실망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을 땐 상당히 혼란스럽다구. 자책도 해보고, 그런 기준을 마련해 놓은 사회에 대한 반감도 표현해 보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하다. 나는 마치 언행불일치 존재의 표상과 같아. 내가 생각하고 있는 여성성과 이 사회가 정의해 놓은 것들이 어떻게 다른 거지? 다르기나 한 걸까? 자신이 던져놓은 그물에 자기 스스로 갇혀 버리는 존재, 나의 또 다른 이름은 페미니스트.
에로스 상실의 영혼
에로스에 대한 환상을 난 이미 상실한 지 오래다. 로맨틱 코미디나 순정만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고 살짝 비웃어 준다. 에로스의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포장된 결혼이 아니라 영혼을 옥죄는 쇠사슬 같은 것 이라고. 그리고 더 비극적인 것은 그런 것들에 익숙해져서 순응해 버린다는 것. 위계질서가 반듯한 남성 중심적 가족체제 안에 안주해 버린다는 것. 그래서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부정하기 시작했고, 또한 에로스도 거부하기 시작했다.
한 남자를 사랑하는 순간, 내가 견고하게 지켜왔던 가치관들이 우르르 무너질 것만 같다. 연인들의 평범한 일상과 데이트 따위도 내겐 많은 생각으로 인해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들 것이라는 이상하고도 묘한 직감. 고슴도치처럼 다가오지도 못하게 그 가시들을 바짝 세워버릴 것만 같아서 나는 에로스를 꿈꾸지 않는다. 꿈꾸지 않는 자에게 환상은 있을 수 없다. 상상만으로도 체할 것 같은 기분. 그대들은 아는가? 이것이 자기비하의 또 다른 표현인지, 아니면 페미니스트와 에로스는 뭔가 그림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나만의 착각인지, 난 잘 모르겠다. 에로스와 페미니즘의 접점이라는 게 있기나 할까? 에로스를 잃고 갈팡질팡 흐느적거리는 영혼, 나의 또 다른 이름은 페미니스트.
순결은 나의 힘
순결이데올로기나 혼전순결을 강요하는 사회는 내 정체성과 맞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향해‘반드시’ 반대 의견을 피력해야만 한다. 모든 여성에게 자신의 성적주체성을 확립해 나가고 성생활을 영유할 자유,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그렇다면 페미니스트의 성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십계명처럼 지켜야 될 리스트라도 있는가? 일단 순결이데올로기에 굴복해서 남성중심의 성문화에는 거침없는 비판을 퍼부었다 치자. 그 후에 그 모든 가치관과 선택의 중심을 오로지‘나’하나로 축소시켜 본다면, 정말로 ‘글쎄올시다’야. 나는 왜 아직까지 내가 한번도 남자와 성관계를 갖지 않은 게 신기록처럼 자랑스러운 거지? 내 영혼의 밑바닥에 순결을 지키고 있다는 생각을 깔아두고 내 존재가치가 희소성과 맞물려 급상승하는 듯한 쾌감을 느낀다. “나는 그렇게 쉬운 여자가 아니야.”
그래, 내게도 한계가 있겠지. 나는 분명 ‘신데렐라’와 ‘백설공주’를 읽고 자랐는데 갑자기 ‘흑설공주’나 ‘인형의 집’에 완전히 몰입하고 공감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래, 적어도 내 딸에게는 공주시리즈를 마구 읽도록 방관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내가 그동안 접해왔던 남성중심의 문화나 가치관들이 한꺼번에 말끔히 사라질 수 있겠느냐는 물음엔 고개를 젓겠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서 한 번도 되묻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말이야.
나는 어쩌면 페미니스트의 범위 안에서도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거나 혹은 댕강 떨어져 나가 있는지도 몰라. 발이 썩도록 동여매야 했던 전족과도 같은 상처. 그것 때문에 일부러 나를 페미니스트로 정의하기 위한 이유를 찾아 해맨 건 아닌지. 부르다, 부르다 내가 지쳐 죽을 이름이여, 반인반수처럼 야누스처럼 모순덩어리인 나의 또 다른 이름은 페미니스트.
나쁜여자, 독한여자, 강한여자 콤플렉스
약해빠져선 안돼. 애교? 그건 페미니스트가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니지. 페미니스트는 자고로 당차고 가끔은 독설을 내뱉을 줄도 알아야 하고, 강한 기세로 남성을 구석으로 몰아붙일 줄도 알아야 해. 상대방이 공격할 틈을 주어선 안된다구. 두 눈 똑바로 뜨고 적을 응시하란 말이야!
나는 나를 무던히도 힐책하고 몰아세웠다. 욕을 먹어도 좋아.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낙인 찍혀도 좋아. 그런 주홍글씨쯤은 감당할 수 있지만 나의 존재가치에 흠집이 가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가 없지. 흔들려선 안돼. 이런 끊임없는 자기암시 때문일까? 이상하리만큼 자연스레 나쁜여자, 독한여자, 강한여자가 내겐 참 매력 있는 역할모델이 되어 주었다. 페미니스트의 미덕은 누가 뭐래도 당차고 야무진 자세와 독설을 퍼붓는 칼날과도 같은 세치 혀.
하지만 나도 한계에 부딪힐 때가 있다. 속사포 같은 마초의 공격에 순식간에 우르르 무너진다. ‘된장녀’ 소동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을 때도 난 참으로 가식적이고 앙증맞았지. 된장녀의 조건에 ‘나는’속하지 않아. 이렇게 안심을 하고 난 이후에야 그 논쟁이 모든 여성을 속물로 일반화해 비난하는 행위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는 것. 어떻게든 된장녀의 ‘오명’은 쓰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던 것이지. 역겹다. 으하하하하. 미쳐버릴 것만 같다. 나는 이 사회의 진정한 다중인격자인지도 모르지. 강한 척, 독한 척, 똑똑한 척하는 자아와 만날 때면 메스꺼움을 느낀다. 악마는 페미니즘을 입는다? 마귀의 가면을 쓰고 스스로를 숨기려고 애쓰는 자, 나의 또 다른 이름은 페미니스트.
나의 또 다른 이름이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나 같은 게 이 세상 모든 페미니스트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전형성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오해는 금물!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 앞으로도 그 정체성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썩 유쾌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아. 그냥 이게 내 자신의 한 모습이니까 받아들이고 인정하려 노력하는 것 뿐. 가끔씩은 수챗구멍에 얽혀버린 더러운 머리카락처럼 나의 영혼은 혼란스러움에 미쳐가지. 이게 나야. 내 주홍글씨를 구태여 숨기진 않겠다. 마음껏 봐라, 그리고 욕해라. 그리고 온갖 사회편견을 내게 새겨 넣어라. 그래도, 나의 또 다른 이름은 여전히 페미니스트.
박유 ● 촌뜨기로 상경 후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학생.
내면은 그 누구보다 비정상적인 것들과 특이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염세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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