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5*6월호 [모람풍경]그 애기 엄마 잘 있겠지?
[2007년 5,6월호_모람풍경]
그 애기 엄마 잘 있겠지?
● 임계재
70년대 초 중반, 계집애가 중국집에 가면 거저 배울 중국어를 비싼 등록금 내고 배우겠다는 것은 전혀 영양가 없는 처신이었다. 하다 못해 약대나 교육대학을 가면 제 등록금은 건져낼 수 있으련만 짱꼴라, 동네에서도 가장 후진 중국집 사람들이 열 받으면 쑤알라대는 그 말을 돈 내고 배우겠다니, 이건 맛이 가도 한참 간 정신머리였다. 중문과 들어가면 내가 미쳐있던 장자 따위나 배우는 것이려니 생각했지 희한한 성조의 약간 닭살 돋는 그런 말이 거의 전부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애증이 점철된 나의 중국이란 개념은 시간을 더해가면서 이럭저럭 포개졌다.
별 생각 없이 살아내다가 주변사람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아팠고 당시로는 마지막을 앞 둔 내게 친구의 유혹은“어서 털고 일어나, 중국 가자!”였다. 중국 가려고 그랬는지 희박한 회복의 확률을 뚫고 어쨌든 일어났고 밀레니엄시대가 왔다고 법석인 와중에 나는 여름방학이 되자 도도한 양자강과 다시 대면했다.
박물관 견학이라는 것이 학생들에게는 갓 배운 중국어로 바가지를 써도 신나는 시장보다 훨씬 못한 것일 테고, 무식할 정도의 엄청난 규모의 유물에‘와!’소리 한 번이면 선생에게 끌려 간 재미없는 문화탐방은 끝일 수 있다. 그 젊은 무리를 뒤에 남기고 슬그머니 내려간 남경박물관 지하 테라코타 룸에서 그 애기 엄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한시대(東漢, 後漢, AD 25- 220)에 만들어진 흙덩이에 어미의 진한 숨결을 품고 이천년을 기다려 나를 만나준 그 젊은 여인은 품에 갓난쟁이를 안고 있었다.
중국 3대 화로 가운데 하나라는 남경(난징)은 천년 고도로 우리나라 전주만큼이나 조신한 아름다움을 지닌 도시이다. 훨씬 이전에는 변두리 중국 땅에 지나지 않았을 난징 그 언저리 어딘가 무덤에 숨어있던 이 여인은 이천년 지난 오늘 소중한 애기를 데리고 우리 앞에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막 젖을 물리려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이다. 왼쪽 가슴을 열고 무릎에 놓인 새 끼에게 젖 먹이려 준비하는 그 여인네는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다.
수유기 여성 특유의 풍만한 가슴, 아직 젖 빨리지 않아 탱탱히 불어있는 젖을 붙들고 내려다보는 무릎의 아기, 제 배불려줄 어미를 쳐다보는 어린 것 입에서 “홍홍” 터지는 흐뭇하고 행복한 탄성이 금방이라도 내 귀에 들릴 듯 하다. 처음 이 모자를 만난 순간 나는 40도가 넘는 바깥 날씨에 비해 터무니없이 쌩쌩 돌아가는 에어컨의 냉기 때문인지 진저리를 치면서 울었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의 근원은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 여인네의 무한한 힘이었다. 목숨 내 걸고 이 세상에 데려 온 그 여인네는 자신의 보배(중국사람들은 애기를 보배라 부른다) 애기에게 ‘이 어미의 젖 먹어 줘 고맙다’는 말을 속삭일 것 같았다.
아이 낳은 것은 여인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며 그것은 힘의 근원일 터이다. 나도 그렇게 내 어머니 젖을 빨며 자라 이 세상을 활보하는 여성으로 잘난 척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 어머니가 젖 물리며 짓던 미소와 이천년 전 중국의 젊은 여인의 사랑은 같은 질량으로 자식에게 향하고 있으리라. 숭고하다는 단어를 육화(肉化)시킨 절실한 순간이었다. 더 무엇을 바랄 것인가. 나를 원초로 돌려놓은 가장 인상적인 상징물을 만났던 것이다.
겨우 눈물을 수습하고 돌아서며 나는 애기 엄마에게 약속했다‘다음에 남경 오면 꼭 다시 찾아오리다.’ 그리고 다음 여름 수없이 여러 번 그 애기 엄마를 만나러 박물관을 드나들었다. 갈 때마다 저릿한 감동에 마음을 가득 채워 흐뭇한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왔고 엄청난 의욕으로 사방을 헤집고 다닐 수 있었다. 삼 년을 결석한 지난 여름 자신들이 그리도 위대한 존재이면서도 자신감 떨어뜨리고 우울감에 허우적거리는 어미 여럿을 이끌고 남경으로 날았고 다시 솟구치는 눈물 때문에 함께 간 사람들에게 들려 줘야 할 간단한 설명에도 한참 뜸을 들여야 했다.
박물관 남자직원은 삼 년이나 소식 없다가 오랜만에 왔다고 몹시 반가워했다. 중년의 사나이는 매양 애기 엄마 앞에 붙어 떨어질 줄 모르던 나를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보내 준 평화로운 반김 속에도 그 어머니의 따뜻한 젖이 여전히 흐르고 있을 것이란 행복한 확신으로 다른 도시로 날아 간 나는 늘상 죽도록 더운 중국에서의 끔찍한 여름을 잘 넘겼다.
‘내 논에 물 들어가는 것과 내 새 끼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모든 어미의 가장 행복한 심정이라는 말을 질리도록 들어왔다. 그래서 내 새 끼 편안하게 살게 하려고 아파트 사 쟁여놓고 남이야 거리에 나 앉든 말든 내 새 끼 편안하면 장땡이라고 악을 써대는 어미도 많다. 궁핍을 경험한 세대였으니 그럴 만도 하겠으나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 또한 어미의 마음자리다.
지금 힘 빠지고 우울한 어미가 있다면 나와 함께 남경으로 날아가자고 권한다. 안 이쁜 데 없는 내 애기에게 젖 빨리던 그 순간을 한 번만 기억해도 지금 닥친 우울과 슬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이천년전의 애기 엄마를 만나는 순간 단번에 사라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장담한다.
뱀발(蛇足을 이토록 장난스럽게도 말하더군요). 사나흘 모든 것 잊고 봄바람 부는 차분한 도시에서 오롯이 기다릴 그 여인은 복잡하고 비싼 여행성수기 아닌 지금 만나보기에 가장 좋은 낯빛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울러 6, 7월 이전이면 가격도 만만해진다.
임계재(청요리집) ● 중문학자, 숙명여대 지역학 연구소 중국학 책임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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