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5*6월호 [연재기획II_민우역사기행]1988년 직장 내 폭력추방운동
2007년 5,6월호_연재기획II_민우역사기행
1988년 직장 내 폭력추방운동
- 민우회의 노동생존권투쟁 지원
● 권미혁
‘구사대’란 말을 들어보았는지? 한마디로‘회사를 구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요즘의 정서로 이 말을 이해하면 어려움에 처한 회사를 일으키기 위해 무언가 희생하거나 노력하는 사람들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1988년 당시 구사대는 생존권투쟁을 하는 노동자를 폭력으로 깨부수려는 데 동원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1988년은 87년 6월 항쟁 이후 억눌렸던 각종 민주화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던 시기였다. 그 중에서도 노동현장의 움직임은 가장 절실하고도 큰 것이었다. 87년 7~9월 하루 평균 40건이 넘는 총 3,400여건의 노동자 투쟁이 있었고, 이는 1980~86년에 일어난 모든 투쟁수보다 많았다. 새롭게 결성된 노조도 1,000여개에 이르렀다.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노동운동이 강력하게 억압되던 데 익숙하던 사용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나온 것이 바로‘구사대’였다. 새로운 형태의 탄압수단이었던 것이다. 구사대는 노조를 만들려는 시도와 노조에 의한 생존권 투쟁을 단시일 내에 와해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구로공단 오트론 전자의 경우 노조가 만들어지자‘노조 집행부 불신임건에 대한 임시총회 요구서’에 도장 찍기를 강요하면서 조합장인 송은숙씨를 남자 구사대 4명이 집단폭행 했다. 대원전기에 다니던 오범근씨는 구사대 폭력에 항의해 음독 자살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혹했던 것은 구사대가 같은 노동자였을 때였다. 구사대란 표현 속에 나타나듯 노조를 만들려는 노동자는 회사를 해치는 사람, 노조 결성을 저지하는 노동자는 회사를 구하는 사람으로 구분되었다. 노동자와 노동자를 이간시키는 분할지배의 전형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정황은 3월 말경 부천 풍정산업의 구사대 2명이‘노조가 생기자마자 회사 측이 7명을 시켜 현 노조를 깨뜨리라고 지시했고 그에 따른 유흥비는 영수증만 주면 회사가 전액 부담했다’라고 양심선언을 하면서 적나라하게 알려졌다.
민우회가 직장 내 폭력추방운동을 하게 된 것은 구사대폭력을 막지 않으면 노동운동이 발전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여성운동은 여성문제의 본질을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모순과 연관시킨 소위‘기층민중 중심주의’라는 노선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여성노동자의 문제가 여성운동의 주요 해결과제임은 당연한 것이었고 민우회도 노동분과를 통해 여성노동자운동을 시도하고 있었다. 게다가 여성노동자들의 경우는 더욱 열악한 처지에서 단순 폭력뿐만 아니라 성희롱, 성폭력 문제까지 연결되어 있어 처음의‘구사대 추방운동’에서‘직장 내 폭력추방운동’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왜 직장 내 폭력추방이 여성운동인가? 여성문제의 본질이‘여성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인 만큼 여성노동자들이 당면하고 있는 억압은 여성문제의 핵심이며 따라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여성운동의 핵심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여성노동자의 생존권 쟁취, 단결권 쟁취는 여성운동의 주요과제가 되며, 때문에 직장 내 폭력추방이 여성운동의 실천과제로 되는 것이지요.”( 출처 :함께가는 여성, 민우회 공개토론 자료에서)
이 사업은 1988년 2월 9일부터 한 달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사회부에서 맡게 되었다. 노동분과가 있었음에도 사회부에서 이 사업을 맡은 것은 사회적 파급효과를 높이기 위한 광범위한 캠페인을 기획한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총괄책임은 사회부장이었던 내가 맡고 기획은 박난숙, 홍보및 자료정리, 연대는 김미숙, 폭력이 있는 회사 노동자들의 고발을 담당하는 고발창구는 조정하, 각종 대회담당은 최문희, 여연(여성단체연합)과의 협조는 당시 여연간사였던 한상실 등이 맡기로 하고 3월 9일‘직장 내 폭력추방운동 발대식’을 가졌다.
민우회의 직장내 폭력추방운동은 금새 사회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오트론 전자, 성남 옥산 무역, 부천 풍정산업 등 여러 노동현장에서 민우회에 고발을 해와, 민우회 대표자들은 문제가 되는 사업장에 진상조사와 항의를 위한 방문을 다니느라 바빴다. 평소 정장을 입고 다니지 않던 나도 장롱에서 오래된 정장을 꺼내 입었었다.
민우회가 이 운동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성과는 구사대 폭력의 진실을 알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는 갑자기 늘어난 노동운동과 노조결성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때문에 여성노동자에 대한 성폭력, 구사대 폭력은 노동현장 내의 일로 치부되었다. 이런 시점에서 일어난 민우회의 폭력추방운동은 사회분위기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즉 민우회가‘폭력’이란 키워드로 여성노동자의 인권문제를 제기한 것이 노동운동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일반 시민들에게도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노동운동의 정당성과 사용자의 노동자 탄압을 폭로할 수 있었다.
새삼 기억나는 것은 당시 활동가들의 땀과 열정이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방법이던 만화를 이용한 선전지를 만들기 위해 조정하는 밤을 꼬박 새기 일쑤였다. 전국의 노동현장을 누비며 구사대 폭력을 수집하던 이미숙 활동가도 생각난다. 또한 박난숙 활동가의 탁월한 기획력은 더 많은 이들이 이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했다. 노동현장에서의 시위는 대부분 경찰서 연행이나 구속으로 이어지던 때에 구로공단 여기저기에서 한 시간 넘게 폭력추방이라는 플랭카드를 들고 시위하는 것을 보고 노동운동가들이 감탄했던 것도 기억난다.
민우회의 직장 내 폭력추방운동은 민우회 역사뿐만 아니라 여성운동사와 노동 운동사에서도 빠지지 않고 기억되는 의미있는 노동생존권 투쟁활동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운동의 중간 보고대회의 사회자로서 계속 ‘구사대 폭력운동’이라고 이야기하는 나를 조마조마한 맘으로 지켜보던 그때의 활동가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사과하고 싶다.
“미안!!! 얘들아. 추방이라는 글자를 빼먹긴 했지만 모두 폭력추방이란 뜻으로 알아들었을 거야. ^.^!!!!”
권미혁 ●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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