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5*6월호 [민우칼럼 창]동물의 왕국? 소비의 왕국!_정윤수
2007 5*6월호
[민우칼럼 창]
동물의 왕국? 소비의 왕국!
정윤수 ●
「어둠 속의 댄서」, 「도그빌」로 유명한 라스 폰 트리에의 초기 걸작「유로파」는 모든 길이 차단당하여 어떤 방향으로 뛰어도 여전히 미로 속을 헤맬 수 밖에 없는 악몽 같은 상황을 보여준다. 또한 최인훈의「구운몽」역시 심야의 도심지 거리를 끝없이 방황해야 하는, 그러나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주인공 독고 준의 블랙홀 같은 상황을 보여준다. 두 작품 모두 지역은 다르지만, 냉전 이후에 겪어야 했던 지식인의 불안한 심리적 상황을 잘 보여준 작품이다.
만약 요즘의 한국 사회에 대하여 이 작품들을 패러디 한다면 어떻게 될까. 두 말 할 것도 없이 나는 오늘의 한국 사회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품의 미로, 높은 장막이 쳐진 소비의 감옥, 어디로 눈을 돌리든지 간에 무조건 몇 초 내에 어쩔 수 없이 바라봐야 하는 광고의 세계라고 말하고 싶다.
쾌락과 소비의 천국 테마 파크를 잠시 보자. 서울 강남에‘코엑스 몰’이 있고 그 안에‘아쿠아리움’이 있다. 20세기 공학의 오랜 노하우와 신개념이 축조해 놓은 코엑스 몰은 편리와 효율, 쾌락과 소비를 120% 만족시키기 위한 ‘합리적’동선으로 짜여져 있다. 대규모 문화공간의 두 세 배가 넘는 주차비와 입장료가 제 몫을 하리라는 신화가 곳곳에 펼쳐져 있다. 원스톱 솔루션! 그러나 그것은 코엑스 몰을 실체적 존재의 공간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에게나 통하는 얘기일 뿐 기나긴 삶의 어느 한 찰나를 잠시 토막 내어 들러보는 구경꾼에게 있어 그곳은 황순원이 오래 전 단편에서 쓴 바 있는, 출구를 찾아서 원형의 미로를 계속 맴도는 착란 현상(린반데룽)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매우 세련된 소비 감각이 곳
곳에 치장되어 있어 내면의 욕망을 애써 숨기지 않아도 될 듯한 안도감을 주는데, ‘아쿠아리움’을 한바퀴 돌고 출구로 나서면 황당한 공간 배치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은 이제까지 구경한 온갖 물고기들의 모형과 캐릭터 상품이 진열된 곳으로 우선 꼬마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그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절묘하면서도 당당한 공간 배치다. 돈을 쓰지 않으면 안 되도록 설계된 것이다.
그 뿐인가. 어느 일간지 사옥에 있는 거대한 갤러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곳의 출구는 미술 팬시 매장으로 이어진다. 피해갈 수 없다. 물론 다른 곳에도 매장은 있다. 예술의 전당에도 있고 과천 현대미술관에도 있다. 청와대 뒤의 환기미술관에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출구로부터 조금은 벗어나 있다. 하지만 이 갤러리는 아예 출구 자체가 매장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누구도 이를 불편해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응노 셔츠, 백남준 시계, 김창열 노트…. 미술 관람에 쏟았던 정성보다 더 지극하고 진지한 시
간이 시작된다. 미술품은 한나절의 정신적 드라이크리닝으로 충분했으며 눈앞의 팬시상품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익힌 모든 감정교육과 소비성향을 집중하여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실존적 명령의 계기가 된다.
국내 최고의 테마 파크인 에버랜드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우선 입장하기 전에 지갑을 꺼내 카드를 확인한다. 무료입장 혜택을 준다는 카드를 제시하고 신선한 기분으로 입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무료입장의 혜택을 입은 어른들은 그 보다 더 많은 돈을 쓰기 마련이다. 꼬마들 데리고 몇 번 놀이시설을 타면 그곳의‘자유이용권’금액을 훌쩍 넘겨 버리는 것이다.
에버랜드의 리프트 역시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다. 입구를 지나 온갖 매장이 줄지어 선 사이를 걸으면 장미 정원과 사파리월드로 내려가는 리프트가 있다. 그것을 타면서 잠시 즐거운 감상의 순간을 누린다. 지상으로부터 불과 십여 미터 높이지만 청량한 대기권에 5분 가량 머물러 이동하는 순간은 잔잔한 별미이다. 탈 수 있는 놀이기구가 서너 개뿐인 너댓 살 꼬마들에게도 리프트는 경이로움을 준다.
그런데 이 리프트가 아래쪽에 도착하면 곧장 캐릭터 매장으로 이어진다. 상식에 입각하여 출구를 찾으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장을 통과하시면 출구가 나옵니다’ 라는 안내문이 기다리고 있다. 그 안에는 꼬마들을 다독여 바깥으로 탈출하려는 부모들의 고함 소리가 넘쳐나고 부모들은 자석처럼 장난감에 붙어 버린 아이들을 떼어내느라 소리를 지르기 일쑤다. 이처럼 테마 파크는 ‘환상과 즐거움’을 주는 대신 지갑을 샅샅이 훑어 버린다. 산만하게 흩어 놓은 듯이 보이지만 테마 파크의 동선은 주도면밀하게 짜여져 있고 사람들은 절묘하게 배치된 공간 구성을 따라 가면서 자주 지갑을 여는 것이다. 테마 파크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소비의 쾌락을 요구하는 현대 문명의 이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며칠 전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엘리베이터 안에 LCD모니터를 설치하느냐 마느냐에 관하여 찬반을 다투는 소리다. 안내문을 보니 행정당국의 공고문, 관리사무소의 공지사항, 교양 문화 정보 등을 엘리베이터 안에 설치한 작은 LCD모니터로 제공하는데 동의하느냐는 질문인데, 그 반대 의견이 흥미롭다. 비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와 같은 사항들을 읽고 있어야 하느냐, 다른 단지들의 사례처럼 그런 안내 말씀 사이마다 인근 대형 백화점이나 할인 마트의 광고가 끝없이 끼어들텐데, 집에 올라가는 몇 초 사이에도 광고 문구를 읽고 있어야 되느냐 하는 것이다. 백번 옳은 얘기다. 우리는 지금 울타리를 알 수 없는 광범위한 소비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다.
정윤수 ● 문화평론가, 오마이뉴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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