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7*8월호 [국제통신원]‘미국사회포럼’에서울려퍼진 여성노동자의함성,“해가뜨면, 우리는일어나리라!” _박혜정
국 제 통 신 원
‘미국사회포럼’에서울려퍼진 여성노동자의함성,
“해가뜨면, 우리는일어나리라!”
박혜정 ●
지난 6월 26일부터 7월 1일까지 5박 6일 동안 미국 조지아주 아틀란타에서 첫 번째‘미국사회포럼 (US Social Forum)’이 열렸다. 미국 전국 각지와 국외에서 만 삼천 명이 참가하였고, 9백여 개의 본 워크샵과 영화상영, 문화공연, 천막 안 토론 등의 부대행사가 잇따랐다.
이번 행사는 미국 내 진보적 사회운동의 역사에 획을 그을만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동안 많은 진보운동 관련 행사들이 백인 남성 운동권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과는 달리, 이번 행사는 저소득층과 유색인종, 풀뿌리 단체들이 주축이 된 전국 행사였다. 이 행사의 준비위원회는 미국 주류사회로 부터 소외되었던 사람들을 위한 모임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기획 의도를 가지고 2003년 행사 준비를 시작했다. 행사 자체만을 볼 때는 1, 2년 안에 준비하고 마칠 수 있었겠지만, 준비위원회는 4년간 행사준비에 품을 들였다. 아래로부터의 참여를 중시하여 그 자체를‘운동’이라고 규정하고, 수많은 단체 및 개인들과 의견을 조율하며 방대한 행사를 추진한 것이다. 행사의 모든 참가자들은 45개의 풀뿌리 단체로 구성된 전국준비위원회에 큰 박수를 보냈다.
준비위원회의 세심함은 첫 날 아틀란타 시내를 가로지르는 행진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행진의 맨 앞줄에는 장애인, 아이들과 그 부모들, 그 뒤로는 미국의 원주민, 그 외 각종 다양한 이슈를 가지고 일하는 유색인종, 풀뿌리 단체들이 그 뒤를 따랐다. 굵직한 단체의 원로 대표자들이 맨 앞줄에서 현수막을 들고 앞장서는 한국과 미국 진보운동권의 관례(?)와는 영 달랐다. 소수자, 약자를 앞세우는 ‘새로운 운동문화’라 할 수 있겠다. ‘핫틀란타(Hotlanta)’라고 불릴 정도로 따가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아틀란타의 거리를 참가자들은 흥겨운 노래와 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구호를 제창하며 두어 시간 걸었다. 물론 선두에 선 장애인들의 속도에 맞춘 행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곳 미국에서 일 년 넘게 한미FTA 반대투쟁에 관여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과 이민노동자의 상황에 대해 더욱 관심이 증대하고 있는 터라, 여성노동자의 투쟁이 공유되는 몇몇 워크샵에 집중적으로 참여했다. 행사 이틀째에 열린 ‘군사주의, 이민노동, 신자유주의’라는 거창한 제목의 워크샵이 열리는 방을 기웃거리다가 50여명의 참가자들의 시선이 자그마한 체구의 60대 멕시코 출신 이민자 할머니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을 목격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서반아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자신의 투쟁을 열심히 설명하는 비올라 카사레스(Viola Casares) 할머니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빨려들어 자리를 잡고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에서도 젊은 층에게 인기가 좋은 유명 브랜드 리바이스(Levi’s)가 노동자들에게 어떠한 피해를 주었는지는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글을 통해 리바이스의 노동자 착취와 폐업에 맞서 투쟁을 전개해 온 비올라 카사레스 할머니와 페트라 마타(Petra Mata)할머니의 이야기를 전할까 한다. 이 두분은 미국 뉴멕시코주의 산안토니오에 소재한 리바이스 회사에서 일하다 해고된 이민 여성노동자이다. 함께 일자리를 잃고 영어로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남미계 여성들과 함께 ‘후에르자 우니다 (Fuerza Unida, 단결된 힘)’라는 단체를 만들어 17년 동안 노동운동을 전개해 왔다. 두 사람은 지금도 이 단체를 이끌며 저소득층 여성들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1990년 1월 17일 리바이스 회사는 산안토니오 공장을 다른 저임금 국가인코 스타리카로 옮긴다며 24시간도 채 되지 않는 폐업 공지 시간을 준 채, 1,150명의 노동자들을 모두 거리로 내쫓았다. 30년, 40년 근속하고, 85%가 멕시코계 미국 이민 여성이었던 그 공장의 노동자들은 당장 어떻게 생계를 이어야 할지 몰라 울고 소리치다가 지쳐서 기절하기도 했다.
리바이스는 1990년까지 미국 내 58개의 공장문을 닫아 10,400명의 일자리를 앗아갔고, 그 후에도 계속해서 노동자들의 착취와 해고를 일삼았다. 비올라와 페트라 할머니는 곧 2월 12일 ‘후에르자 우니다’를 조직하여 700명이 넘는 노동자들과 함께 리바이스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6학년이 최종학력으로 배운 것도 없고 재봉사로 혼자 네 명의 어린자식을 키우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비올라 할머니는 처음에는 분노와 복수심이 끓어올라 투쟁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후에르자 우니다’는 1990년 4월 한 인권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퇴직금 등을 요구하며 리바이스 회사를 대상으로 소송을 걸었으나 패소하였고 2년 후 다시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이후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노동자들의 권리와 퇴직금을 요구하였고, 다른 지역에서 폐업으로 고생하고 있는 리바이스 노동자들을 투쟁에 동참시켰다. 또 폐업 가능성이 있는 지역의 노동자들을 미리 조직하여 폐업을 막기도 했다. 비올라와 페트라씨는 노동자들이 초청하면 어느 곳이나 방문을 하여 교육을 하였다. 리바이스의 정체를 밝히는 기사 보도문을 널리 보내고, 수많은 노동자들과 퇴직자, 소비자들을 그들의 편으로 만들어 갔다.
결국 7년 후인 1997년 리바이스는 폐업 8개월 전 사전 공지, 퇴직 후 18개월의 연장된 의료혜택 제공, 6,000달러의 재교육 지원금 지급 등을 골자로 한 노동자의 퇴직 정책을 발표했다. 비록 산안토니오 노동자들이 직접적으로 얻은 혜택은 없었으나, ‘후에르자 우니다’의 투쟁은 다른 리바이스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크게 향상시켰고, 미국의 노동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가정과 공장일밖에 몰랐던 비올라와 페트라씨는 리바이스 투쟁을 통해 사회와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지역사회의 호텔 노동자, 철강회사 노동자들이 겪는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해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지금은 미국의 신자유주의와 FTA 반대투쟁에 앞장서는 산증인이 되었다.
현재 ‘후에르자 우니다’는 여성노동자들과 이민여성들의 공동체로서 그들 가족과 지역사회의 정의를 위해 일하고 있다. 이 단체는 행사음식 판매, 재봉 창작품인 옷과 탁자보 판매, 빙고게임 수익 등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이룩하여 왔으며 건강한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데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비올라 할머니. 그녀의 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주름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거기에는 지난 17년간의 투쟁 기간 동안 흘린 눈물과 승리의 웃음이 비껴 있었다.
그날의 워크샵 이후에도 나머지 사흘 동안 이민노동자에 대한 워크샵 방에 들어설 때마다, 발제자들의 발표에 귀를 기울이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받아쓰고 있는 비올라 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몇 번의 만남에서 서로 낯이 익어 대화를 주고받았을 때, 혹 한국의 여성노동자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지를 물었다. 할머니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여성노동자 여러분! 당신들이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팔과 손으로 당신들을 감싸 안으며 당신들을 느끼고 당신들과 함께 합니다. 사는 것 자체가 투쟁이지만 해가 떠오르는 한 우리는 모두 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가끔 배가 아플 정도로 웃고, 가끔 소리쳐 울기도 하지만, 우리는 해가 뜨면 늘 다시 일어납니다."
행사 마지막 날 나는 할머니에게 언젠가 한국의 여성노동자들과 ‘후에르자 우니다’를 꼭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할머니의 이야기를 가슴깊이 새기고 ‘핫틀란타’를 떠났다. 언젠가 그 약속을 꼭 지키게 될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박혜정 ● ’82년 도미하여 재미동포운동단체와 풀뿌리 영상운동단체에서 활동해 왔다.
현재 펀딩익스체인지(Funding Exchange)라는 진보재단에서 미디아정의기금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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