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7*8월호 [연재기획I_행복찾기]행복찾기_로미오.주설령.이화영.버사.홍미용.소다.이오
행복으로 가는 길
로미오 ●
행복으로 가는 길 The way to happiness
가슴속에 증오심을 갖지 말고, Keep your heart free from hate,
마음속에 걱정을 담지 말라. your mind from worry.
검소하게 생활하고, Live simply,
기대는 적게 하며, expect little,
많이 베풀어라. give much.
그대의 인생을 사랑으로 채워라. Fill your life with love.
햇빛을 퍼뜨려라. Scatter sunshine.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라.
Forget self, think of others.
그들이 그대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그들에게 행하라.
Do as you would be done.
- H.C. Mattern -
행복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멀지 않다는 가르침을 주는 H.C Mattern의 글이란다. 그러나 로미오는 이 글귀를 다시 쓰고 싶다.
가슴속에 분노를 갖되,
삭이지 말고 현명하게 표출하고,
마음속에 응어리를 담지 말라.
내 마음의 사치를 한껏 누리고,
기대는 적당하게 하며,
나를 희생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베풀어라.
그대의 인생을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라.
자존감을 퍼뜨려라.
어떠한 경우라도 자신을 잊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라.
그들이 그대에게 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그들에게 행하라.
하나의 사고방식, 하나의 생활방식을 강요하는 사회는 인간사회가 아니다(트린 T 민하). 우리는 인간이길 거부한 건 아니지만 그‘하나’에 목숨 걸듯이 자신을 재단하고 저울질하고 상대(대상)에게 맞추려 자신을 채찍질한다. 이렇다 보니 “너 행복하니?”라는 질문처럼 당혹스러운 게 없다. 행복이란 게 개인차가 있을 수밖에 없고 자기 만족감이란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며, 수많은 감정의 결들 속에서 행복감도 무수히 느꼈겠지만‘행복’이 무엇인지를 글을 배우는 아이처럼 되짚어 가게 된다. 행복(감)은 따뜻함이고, 사랑스러움이고, 충만하면서도 날아갈 듯 가볍고, 온화하고, 부드럽고, 흐뭇하며, 식물 같은 느낌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중심에 있지 않은 채 타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불행의 시작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나’를 희생하는 것은 애증을 낳고, 분노와 상실을 느끼는 자신을 만신창이가 되고 나서야 애도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못마땅해 하고 엄격한 잣대와 칼날을 들이대는 사람에겐 행복이란 선물이 없다. 대신 안타깝고 답답하고 실망스럽고 한없이 부족하고 화나고 존재감 없이 비참해진 어둡고 무거운 그늘이 어깨에 불청객처럼 눌러 앉았음을 알게 될 뿐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남도 사랑할 수 있듯 내가 행복해야 관계도 행복해지는 것 같다. 행복이 자원이나 꿈이나 열정이나 건강이나 직업 등을 만족스럽게 가지고 있는 자들이 느끼는 마음의 호사/사치 같더라도 좋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하나’에 연연하며 내 눈으로 나를 보지 못했다면, 내 자신과 오롯하게 만날 수 있는 시.공(간)은 나의 행복에 밑거름이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나에게 줄 수 없는 사랑스러운 ‘나’를 이미 가졌으니 어려워하거나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두려움은 주저함을 낳고 그 주저함이 두려움을 현실로 만든다지 않는가! 자뻑이면 어떻고, 많이 부족하면 또 어떤가, 나를 알고 나의 욕망을 알고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아가다보면, 가는 여정 여기저기에 행복이 오종종 피어있을 것을…. 캔디만 거울 속의 자신과 대화하지 않는다. 난 오늘도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외친다. “ 나는 행복한 로미오! 넌 어쩜 그리 멋지니!”
내가 행복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들
주설령 ●
하나. 다섯 남매의 셋째 딸, 어린시절부터 셋째 딸은 선도 보지 않고 데려간다는 말을 들으며 살아왔다. 위로 언니 둘과 아래로 남동생 둘. 가부장적인, 그것도 나이가 많으신 아버지(나의 아버지는 이북에 처자를 두고 어찌어찌하여 홀로 내려오신 분이다) 밑에서의 셋째 딸의 위치를 상상해 보시라! 눈치 100단이기에 누구와도 불편한 관계를 만들지 않고 살아왔다. 나의 행복칩은 그렇게 시작되고 발휘되었다.
둘. 사회로 직접 나가 돈을 벌진 못하지만 남편 월급이 내 월급이 되는 월급날 25일 이후, 20만원쯤의 돈을 찾아 남대문 시장으로 간다. 이름하여 ‘20만원의 즐거움.’
셋. 민우회에서 10여년을 자원활동가로 일하면서 북악산의 사계절을 음미하게 되다. 상계동에서 광화문까지 번잡한 시내를 거치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은 피톤치드를 맡으며 북악스카이웨이를 이용한다. 비가 오거나 안개가 자욱한 날, 정상에서의 커피맛이란…. 가끔은 향이 좋은 담배도…. 급기야는 내년 2월 북악산 자락의 우암동으로 이사할 계획을 하고 있다.
넷. 각자 사는 게 바빠서 자주 못 만나는 사랑하는 친구와 뜬금없이 만나 내가 자주 가는 곳이나 그녀가 자주 가는 곳을 함께 걷는다. 서울 한복판에서 즐거울 수 있는 곳. 덕수궁과 그 옆 돌담길의 미술관, 경복궁과 삼청동의 식당, 창경궁과 인사동 그리고 조계사 안뜰까지, 평창동 미술관과 카페, 성공회 교회 뒷마당과 찻집, 그리고 길상사….
다섯. 20여년 함께 살고 있는 시어머니랑 하루 종일 말 안하고 지내보기. 처음 시도할 때는 많이 힘들었는데 몇 번 하다보니 요령도 생기고 죄책감도 덜하고 묘한 쾌감도 있다. 자연스럽게 나만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 함께 집에 있어도 나는 행복하다.
행 복
이화영 ●
자칭 무색, 무미, 무취인 내게 행복이란 통통 튀는 그 무엇인 것 같기도 하고, 광채 나는 그 무엇인 것 같기도 하다. 분명 오늘 하루를 보내면서도 어제 하루를 보내면서도 난 그 단어를 여기저기서 보고 듣긴 했는데…. 추구해야 할 가치인가? 잠시 즐거운 느낌인가? 진하게 눈물 흘릴 수 있는 감동인가? 앗, 그냥 하루하루의 삶인가? 아무런 이유 없이 가득 채워지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그야말로‘행복감’으로 보내는 시간이 있는 반면 행복의 의미들을‘굳이’되새김질하면서 생활하게 되는 시간도 있다.
여유가 사라진 요즘의 내 생활. 오늘 아침에도 난 4분의 1쪽이 되어야 했다. 마지막 시험날이라고 큰 딸은 누렇게 돼서 아침도 먹지 못하고, 둘째 딸은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어찌 그 모든 말들을 무시할 수 있을까? 한 숟가락이라도 먹이려 뭔가 준비를 한다. 두 딸이 학교에 간 후 남는 건 남편과 나. 일주일간 출장을 가는 남편의 비행기시간 대기, 그 사이 난 남편이 빠뜨린 옷가지 몇 개와 집안 정리를 후다닥 마친다. 남편이 떠난 후 가방을 챙겨 모초등학교의 미디어 수업을 위해 발걸음도 당당히 나섰으나 왠지 머릿속은 어수선하다. 학교에 도착하니 이미 우리의 몇 분 미디어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분위기 전환. 그리고 애들과의 수업. 참 재미있고 유익했다고 인사해 주는 한 남학생의 말에 미소로 답한다(때론 아이들의 수업태도에 조금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이번 주 내 일상의 모습 중 하나이다. 4분의 1이 된 나? 이게 전부 나? 허나 이 바쁜 생활 속에서도 잠깐이나마 바람을 느끼게 되는 것이 있다. 맘이 맞는 친구와 전화로 수다 떠는 것, 일주일에 하루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에 땀을 흘리는 것, 그리고 항상 새로움을 꿈꿔 보는 것. 이게 나의 행복이 아닌가 싶다.
진정 행복을 찾고 싶다면 빨간약을 삼켜라
버사 ●
여성주의자로서 행복했던 경험에 대해 생각해본다. 참으로 어렵다. 여성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그간 여성에게 배제되어왔던 행복을 찾겠다는 개인의 강력한 행복추구권의 주장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간 나름대로 익숙해져버린 삶을 버리겠다는 것이고, 빨간약을 대뜸 집어삼키고 가부장제라는 단단한 그물망의‘매트릭스’에 도전을 해보겠다는 겁없는 용기이다. 한마디로 여성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고생을 각오하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너무 의기소침할 것은 없다. 비록 자주는 아니지만,‘ 고진감래’라고 힘든 노동 후에 새참이 꿀맛이듯, 고생 끝에 맛보는 참 행복이라는 값진 결과도 있다. 나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런 행복을 맛본 적이 있다.
몇 년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내가 존경하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분이 외할머니였다. 여자도 책을 많이 읽어야하고 배워야 한다고 가르쳐주신 외할머니, 우리 집에 놀러오시면 꼭 내손을 잡고 근처 문방구로 데려가 책 한권을 고르게 하셨다. 지금의 내가 가진 책에 대한 욕심과 활자 중독은 외할머니로부터 받은 유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외할머니의 부고를 즉시 회사에 알렸다. 또, 조부모 사망시 사용가능한 경조사 휴가내용과 지원비용에 대해 문의했다. 인사부 직원은 조부모 사망과 관련된 복리제도를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외조부모라는 사실을 얘기하자, 외조부모는 해당사항이 없다고 답했다. 부계에 당연히 지원되는 조의금, 화환, 경조휴가 등이 모계에는 전혀 지원되지 않았다.
나는 당황했고 분노했다.
90년도에 민법에 친족 정의 수정이 있었다. 이전에 부계8촌, 모계4촌까지였던 것을 부모계 다 4촌까지로 수정하여 부모계의 차별을 철폐한 것이다. 하지만 기업체 복리규정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사회의 인식과 관행은 여전히 가부장제에 머물고 있으며, 모계에 대한 차별적인 요소를 당연하다는 듯이 가지고 있다. 나에게 부모계는 다 똑같은 친족이며 여기에 차별적인 인식과 관행이 존재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었다. 과거 내가 성장한 70년대에 자녀의 양육은 여성에 의해 이뤄졌으므로, 외가는 친가보다 더욱 가깝고 친밀한 존재였다. 요즘은 어떤가? 모일간지에서는 증가하는 맞벌이부부로 자녀양육을 외할머니가 담당하면서, 사위가 장모눈치를 보는 모계사회가 도래했다고 뻥튀기를 하고 있지만, 모계가 떠맡는 역할은 점점 커짐에도 불구하고 그 대접은 여전히 형편없다.
내 연차휴가를 이용해서 외할머니 장례식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왔고, 회사 동료들과 경조사 제도의 불합리성에 대해 공론의 장을 마련코자 했다. 예산의 한정이라는 흔한 변명 앞에서 왜 선택의 문제에서 한쪽이 전면적으로 배제되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으며, 기타 복리후생비용을 할애하거나, 부계에만 전적으로 지원되는 비용을 반으로 줄여 부모계 똑같이 지원하는 등 방법을 고안할 것을 제의했다. 결과적으로 최근 회사에서는 복리후생규정 자체검토를 통해 부모계 경조사 부담을 나누어 외조부모에 대한 경조사 지원을 가능케 규정을 바꾸는 것을 적극 검토키로 했다. 여성주의자로서 오랜만에 맛본 달디단 행복과 뿌듯함의 순간이었다.
행복은 항상 내 곁에~
홍미용 ●
“그래서 어쩌라고?” “네에~네에 알겠습니다~ 제가 원래 쫌 그렇거든요~” “그래도 엄마보단 나아!”
요즘 이 아줌마는 이제 막 사춘기로 접어든 반항끼 만빵인 초딩 5학년짜리 딸애랑 날이면 날마다 온갖 유치한 문제로 사사건건 전쟁 중이다. 세상에서 엄마를 제일 사랑한다고 했던 귀엽고 사랑스럽던 내 딸은 어디로 갔을까? 눈을 흘기고 악다구니로 대들고 급기야는 은밀한 약점까지 들춰내서 엄마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는 12살짜리 어른인 척하는 아직 덜 자란 여자애! 세상에나! 천사 같았던 내 사랑이 졸지에 웬수덩어리로 급변하다니 답답하고 괴로운 이 내 가슴을 누구에게 위로 받을 수 있을까?
내 인생의 반쪽이라던 남편은 살벌하고 팽팽한 그러면서 이루 말 할 수 없이 치사한 작금의 모녀 전쟁을 머리로 이해하기를 포기한지 이미 오래다. 게다가 가슴으로 공감하기는 더더욱 어려운지라 못 들은 척, 못 본 척, 말 못하는 척, 만만치 않은 두 여자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 코가 석자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도 뜻하지 않았던 행운은 찾아왔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2박 3일로 캠프를 간다고 했다. 얼마 만에 가져 볼 분쟁 없는 세상에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나만의 일상을 보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던가? 현관에서 섭섭한 척 배웅을 하고 돌아서는 순간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선 깨끗하게 집안 청소를 했다. 그 다음엔 딸애가 분위기 따운이라며 질색하던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 카페인 중독자 되려고 그러냐고 잔소리 하고 시비 거는 사람도 없으니 커피도 하나 가득 내렸다. 꼴 내키는 대로 신문도 보고 잡지도 보고 인터넷 검색도 하고 케이블에서 19세 빨간 딱지가 그려진 영화도 봤다. 입이 심심하면 슈퍼에 가서 다양한 주전부리를 사다가 뒹굴며 먹었다.
그런데! 딱 24시간, 만 하루였다! 슬슬 심심하고 무료해졌다. 딸애가 있을 땐 악착같이 틈새를 노리면서 즐겼던 소소한 일상들이 막상 아무런 제약이 없어지고 나니까 덜 재밌게 느껴졌다. 게다가 얼굴 맞대면 또 으르렁거릴 걸 빤히 알면서도 웬수덩어리 딸이 없다는 것이 허전하기까지 했다. 참 웃긴 일이다. 또 너무나 뻔한 사실이기도 하다. 지긋지긋하다고 꼬리표 딱 붙여났던 내 생활이 결국은 소소한 것들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조건이 되었다는.
행복이란 말은 흔해빠지고 진부한 말이라서 별로 흥미로울 것도 없는 얘기꺼리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행복해지기위해 꼭 뭔가를 새로 가지거나 또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결국 그냥 지금의 나를 또 내 삶을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면 행복은 항상 내 곁에 있지 않을까? 딸아이와의 가열찬 전투가 내 행복의 일부분이라 여기며 오늘도 고고~싱이다.
행복
소다 ●
나는 때때로 행복하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이 오기로 한 날을 앞질러 뜻밖의 시간에 고스란히 안겨질 때, 왈랑거리는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펼칠 때 나는 행복하다. 냉장고 떨이를 할 작심으로 남은 반찬모두 털어 넣고 큰 양푼에 밥 비벼 아이들과 숟가락 쌈질을 해대며 얻은 든든한 포만감에 나는 행복하고, 직원들과 열 띤 토론 후에 얻게 된 색다른 아이디어에 화들짝 놀라며 행복하다. 받지 않으려니 각오하고 한 인사에 경비원 아저씨 소탕하게 웃음으로 화답할 때 행복하고, 막히려니 마음 비우고 간 길이 뻥 뚫릴 때 나는 행복하다.
하지만 때때로 행복하지 않다. 구조적 모순 속에 있는 그들에게 자본의 논리를 앞세워 어설프게 강의하는 내 직업이 행복하지 않고, 해도 해도 뚫을 수 없을 듯한 유리천장, 유리벽이 나를 옥죌 때 행복하지 않다. 화장실 갈 틈도 없이 동동거리며 바삐 일하고 돌아온 허기진 밤, 한 톨도 남지 않은 밥통을 보면서도 남편처럼 짜증 못 내고 눈치 봐야 하는 내가 행복하지 않고, 학부모회 구석발치에서 애들 학원 얘기, 성적 얘기 들은 날 밤, 좋은 엄마 못 된 자책감에 뒤척이며 행복하지 않다.
그래도 아직 불행하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다. 내가 딛고 있는 이 땅, 내 방식으로 치를 수 있는 역할이 있고, 모자라지만 내가 가는 길을 모델 삼아 꿈을 키우고 있는 후배들도 있다. 애면글면 함께 통탄하고 함께 헤쳐 나갈 식구들도 있고 친구들도 있다.
행복은 행운처럼 기다린다고 우연히 와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찾고 만들고 느끼고 새겨야 한다. 실낱같이 가느다란 행복의 기미라도 보이거든…. 꼭 붙잡자. 행복은 온전히 내가 나를 위해 뜻매김하는 자축 파티다.
[행복어사전] 반려동물
이오 ●
맘보 : 연애하고픈 남녀는 개를 키워라. 행복하고픈 언니는 고양이를 길러라!
잠보 : 오잉? 고양이 두 마리에 강아지까지 식구가 불어나더니 뭔 껀수 생겼어?
맘보 : 요즘 강아지 산책 델고 다니느라 말수가 늘었다니깐요. 처음 본 사람들이 막 말을 걸어요. 어제도 단추(강아지)를 델고 나갔더니 어떤 훈남이 얘한테 말을 거네?
잠보 : 같은 위치에 또 델고 나가봐, 마주치면 전화번호라도 따게. 나도 공원에 머루(강아지) 델고 나갔더니 어떤 아가씨가“어머, 넌 코믹하게 생긴 백설공주로구나!” 그러더니 떡을 한 봉지 안겨주데.
맘보 : 강아지 앵벌이 시키는 주인님! 근데 짱구와 호동이(고양이)는 앞발을 모으고 날 쳐다보는 모습이 얼마나 이쁜지 몰라요. 고양이의 얼굴은 완전 대칭이어서 정말 아름다워요. 시각적 쾌감도 크다구요.
잠보 : 아름다움을 바로 옆에서 늘 접하는 것도 행복하지. 난 그래서 길냥이 밥줄 때에도‘저 불쌍한 것들 도와준다’는 생각보다도‘저 이쁜 것들 조금 덜 배고프게 해야지’하는 생각이 더 들어.
맘보 : 우울한 사람을 웃게 하고 팍팍한 도시인끼리 잠깐 동안의 대화라도 나누게 하는 반려동물들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그런 게 사람들을 잠시라도 행복하게 하잖아요.
잠보 : 행복의 사전적정의를 보니깐‘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라네? 근데 내가 이런 행복감을 느끼려면 내 감정이 그냥 단순해져야 하는 것 같아. 사람이 아무리 성취를 하고 돈을 벌어도‘충분한 만족’을 할 정도로 단순한 감정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근데 동물과 함께 있으면 그런 순수한, 단순한 기쁨을 느낄 수가 있더라구. 그건 동물이 사람보다 극도로 단순한 성질을 지닌 것에서 비롯되는 걸지도 몰라. 사람을 대할 때 만큼 머리를 안 굴려도 되잖아.
맘보 : 특히 강아지는 기르는 사람들은, 얘들이 자신의‘확장’(extension of ego)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사람이 잔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어요. 고양이는 약간의 얌체성이 개성으로 돋보일 만큼 충분한 즐거움과 위안을 주어서 사랑스럽구요. 으으, 그녀석들이 저랑 나란히 앉아서 텔레비전 볼 때 저 행복해용! 또 제가 문열고 들어오면 두 녀석이 박치기하듯 서로 공중으로 뛰어올라 반가워할 때 좋아 죽겠어요!
잠보 : 내가 누우면 쫓아와서 척 내 팔베개하고 드러누울 때 뿌듯해~ 근데, 개나 고양이도 사람만큼 행복할까? 우리만 행복해도 되는 거야?
맘보 : 걔네들의 행복을 최대한 보장하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겠죠. 동물을 기르면서 좀 식상한 표현이지만‘생명에 대한 외경심’이 저절로 생겨나더라구요. 또 거창한 말이지만, 살아있는 것들을 보살피다 보니까 인간을
기르는 것의 위대함,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권리랄까, 그런 데 눈뜨게 됐어요. 퇴직금의 일부를 길고양이 구제하고 중성화시키는 데 쓸거예요.
잠보 : 우리 언젠가 동물들의 행복추구권과 이를 실천하는 방법에 대해 본격적으로 얘기해보자. 오늘은 걔네들이 우리에게 주는 행복에 대해서만 떠들어서 좀 미안한 마음… 암튼 내 삶의 행복어사전 첫 페이지에는 반려동물,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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