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7*8월호 [모람풍경]고정희기행을 다녀와서_히로
고정희기행을 다녀와서
● 히로
여기 다 모였구나
이 불꽃이 바로 평등의 불꽃이요
이 기운이 바로 통일의 기운이요
이 바람이 바로 해방의 바람 아닐손가
자매여
이제는 우리가 길이고 빛이다
이제는 우리가 밥이고 희망이다
이제는 우리가 사랑이고 살림이다
『자매여 우리가 길이고 빛이다』中, 고정희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가방 하나를 달랑 매고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지인 신촌으로 향하였다. 여행이 설렜던 탓일까. 가장 먼저 도착하여 버스의 한 켠에 자리를 잡은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 씩 들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고정희 시인을 기리기 위해 함께 모였다. 그녀와 치열한 시대를 함께했던 동료 페미니스트와 그 바통을 이어온‘영’페미니스트, 그리고 파릇파릇한 고정희 청소년 문학상 예심 통과자까지. 잠시나마 우리는 퍽퍽한 현실을 벗어나 고정희 시인이 그토록 염원했던 이상향인‘곤륜산’의 모습이 담긴 시간을 함께 보내다 왔다.
어느덧 16년째, 매년 6월이 되면 한국 페미니즘 운동과 문학에 있어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고정희 시인을 기억하려는 이들은 그녀의 생가가 있는 전남 해남에 모인다. 고정희 시인이 1991년 지리산 등반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이후, 처음에는 지인들의 끈끈한 동료애와 우정으로 시작한 추모모임이 어느덧 연례행사가 되어 해가 갈수록 더 많은 관심과 인파행렬로 이어지고 있다. 문단에서도 시인이자 활동가였던 한 여성을 향한 이러한 끈끈한 우정과 정성에 부러움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올해 역시 또하나의 문화, 해남 여성의 소리, 하자센터, 전교조, 늘봄 대안학교, 제주 여민회 등 전국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커져가는 고정희 시인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버스 안에서 함께 허난설헌 관련 영상을 보며 여행은 시작되었다. 고정희 시인의 생가와 묘지를 방문하여 추모제를 올리고, 고찰 미황사에서 지난 고정희 기행 영상을 보고 또하나의문화 동인의 강좌를 들으며 담소를 나누면서 하루 밤을 보냈다. 다음 날 다산초당을 방문하고 바닷길을 걷는 것으로 여행은 마무리 되었다.
올해 처음으로 참가한 ‘고정희 기행’은 고인에 대한 추모행사이면서 동시에 기행이라는 독특한 공간적·정신적 경험을 갖게 했다. 추모는 항상 떠나간 이에 대한 슬픔과 과거의 기억을 동반하지만 동시에 이 공간에서는 그녀를 통해 세대, 나이, 소속을 넘어 새로운 문화공간과 소통의 잉태가 가능해진다. 더군다나 그녀의 땅끝마을 고향이 주는 자연적인 편안함과 어우러짐, 여유는 고시인의 방 한 켠에 적혀있던 좌우명 ‘고행, 묵상, 청빈’의 정신과 함께 생태 여성주의의 공간적 경험과 실현을 순간적으로 가능케 하였다.
이번 추모기행을 키워드로 표현하자면 시대를 초월한 끈끈한 ‘자매애’, 열정과 드라이브로 모인 전국의 ‘다양한 여성’, ‘ 대안적인 문화공간’, 그리고 ‘생태 여성주의’이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그러나 열정으로 똘똘 뭉친 여성들이 만나 고인을 기리는 진지하면서도 신명 나는 시간을 만들고, 티끌 하나 없는 자연에서 숨을 쉬고 소통하며 우리가 서 있는 현재와 지나온 과거 그리고 앞으로 함께 만들어갈 미래를 얘기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를 이곳으로 이끈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이번 추모기행에 참가하여 고정희 시인이 태어나 성장하고 다시 되돌아간 그곳을 찾아가 보니
오래 전 서거한 문인 혹은 활동가라기보다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친근하고 존경스러운 옆집 언니이자 동료 활동가로 다가온다. 아마도 그녀가 생전에 시를 통해 제기했던 많은 문제가 오늘날 현실에도 적용 가능하고, 그 청렴한 정신과 열정, 진솔함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실되게 전달됐기 때문이 아닐까.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을 시간이 지났다 할지라도 페미니스트 사이에는 시대를 초월하여 교감할 수 있는 어떤 공통된 지점이 있다는 또하나의문화 동인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떠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라며 담배 한 개비와 함께 조용히 울먹이던 그는 세월의 무상함과 더불어 그동안 한국여성운동이 일구어 놓은 많은 사회적 변화를 고정희 시인도 함께 볼 수 있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으리라.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물질만능주의와 외모지상주의 그리고 정치적 리얼리즘이 팽배한 사회공간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실험적인 시공간에서 소통하고 숨쉴 수 있어 일 분, 일 초가 더없이 값진 시간이었다. 고정희 시인이 이런 나를 그리고 이런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면 위의 시와 같은 말을 하지 않을까 싶다. ‘ 여기 다 모였구나 이 불꽃이 바로 평등의 불꽃이요 이 바람이 바로 해방의 바람 아닐손가 자매여 우리가 길이고 빛이다’라고.
히로 ● 민우회 얘기만 나오면 신바람 나는 신입회원(쪼아쪼아!).
유부초밥으로 점심 때우며 청탁글에 몰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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