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7*8월호 [문화산책]난 소중하니까요. 난 내가 자랑스러워요.
난 소중하니까요.
난 내가 자랑스러워요.
들통 ●
언제나 5,6월이 되면 어김없이 마음이 설렌다. 그건 초여름에 접어들면서 한껏 푸르러지는 날씨와 함께,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면서 우리의 숨통을 틔워주는 퀴어 행사들을 친구들과 함께 마음껏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동성애자들의 집약된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은 퍼레이드가 아닐까 싶다.
퍼레이드는 일년에 단 한 번, 한국에 사는 동성애자들이 종로 대로를 걸으며 사람들 앞에 자신을 공식적으로 드러내고, 스스로에게 자긍심을 북돋는 계기가 되는 중요한 의식이다. 대사회적인 커밍아웃은 아니더라도 동성애자인 개개인에겐 퍼레이드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커밍아웃인 셈이고,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결국 동성애자 스스로도 내면화하고 있었던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의 세균을 어느 정도 박멸할 수 있게 도와준다.
또한 동성애에 대한 정치인의 왜곡된 발언이나 중대한 정치적 사안이 있을 때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도 퍼레이드에서 가능한 일이다. 올해 퍼레이드에서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이성애가 정상이므로 동성애는 반대한다’라는 망언을 한 것에 대해 그 발언을‘오바로크 한다’, 즉‘꿰매버린다’라는 구호가 압도적이었다. <오바로크 이명박>이라는 피켓을 보고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 ㅋㅋ~!!
작년에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퍼레이드에 참석하지 못했던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올해엔 꼭 나가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친한 친구들과 함께 어떤 모습을 하고 나갈까 모의를 하다 교복풍의 옷을 맞춰입고 동성애의 상징인 무지개 휘장을 두르고 나갔다. 역시 준비를 한 만큼 재미도 한층 더했다. 우리 무리(?)뿐 아니라 여기저기에 재미있는 분장을 하고 온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70년대 다방 분위기의 뽀글머리 멋쟁이 무리와, 천사날개가 달린 헬멧과 반바지를 착용한 인라인 스케이팅 팀 등 끼가 넘치는 퀴어들이 화창한 하늘 아래 퍼레이드를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나 역시 친구들과 함께 퍼레이드를 즐기고 있었지만, ‘아는 사람이 종로에 왔다가 이렇게 행진하는 나를 봤으면 어떡하지?’, ‘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아무 생각 없이 나를 아웃팅 시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라는 두려운 생각도 가끔씩 고개를 들었다. 이런 순간이 찾아올 때면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래도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면서 퍼레이드를 하다 보니 왠지 나와 함께 행진하는 사람들이 같이 싸워주고, 자기 일처럼 생각해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곁에 아무도 없는 게 아닌데 나는 왜 수백 명의 퍼레이드 행렬에 섞여 있으면서도 혼자 있는 것처럼 생각해 버렸을까.
작년 퀴어 퍼레이드에서 홍석천 씨가 자기는 커밍아웃을 한 덕분에 24시간 동성애자로서 살 수 있다는 말을 했는데, 그 얘기를 듣고 친구들과 엄청 감동했던 기억이 났다. 행렬의 맨 앞에 있는 홍석천 씨와, 사진촬영 금지를 위한 붉은 리본을 매지 않고 당당하게 걷고 있는 수많은 동성애자들을 보면서 나는 아직 벽장 속에서 나가려면 멀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건 탄식이라기보다는 언젠가 저 사람들과 함께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를 드러내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이번 퍼레이드에 함께 참석한 친구들은 같이‘Dyke on Focus(다이크 온 포커스, 줄여서 다이포)’라는 영화제작모임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다. 퀴어문화축제 기간에 개최되는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영화제에서 작품이 상영되기도 했는데, 친한 이성애자 친구와 동료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난 후 그 때의 느낌이나 생각에 대해 그들과 얘기해보는 짧은 다큐멘터리다.
원래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건, 미국에‘PFLAG(레즈비언과 게이의 친구들과 부모들)’라는 단체가 있다는 걸 알고 우리도 주변에 있는 친구와 동료들로부터 시작해 한국의 PFLAG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에서였다. 하지만 막상 우리가 커밍아웃을 했던 친구들과 동료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하자, 한국의 PFLAG는커녕 그들의 말에서 포착되는 광범위한 호모포비아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친구라고 믿었다가 그들의 발언에 허거덕 놀라 쓰러진 우리는, 커밍아웃만 해 놓고 친구들 물 관리(?)를 못한 우리의 잘못을 일단 반성하고 목표를 급 수정했다. 먼 훗날 한국의 PFLAG를 꿈꾸며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해 가자고.
작년 퍼레이드 전부터 이 영화를 찍었는데, 꼭 오겠다고 했던 친구들이 퍼레이드 당일에는 대부분 오지 않은 장면도 영화에 들어 있다. 하지만, 비까지 오고 약속했던 친구들이 안 와서 더 꿀꿀해 보이는 작년 퍼레이드는 이제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듯하다. 올해엔 다이포 멤버들의 이성애자 친구들과 동생, 오랫동안 고민하다 처음으로 퍼레이드에 참여해 자신을 드러낸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우리의 축제를 즐겼으니까. 앞으로 한 해 한 해 거듭될수록 친구들과 우리의 개체수는(?) 점점 더 늘어날 것이고, 우리는 더 신나게 퍼레이드를 즐길 것이다. 퍼레이드 만만세~!!
들통 ● 드럼통의 도량과 단단함을
닮고 싶은 인간 들통. 아웃팅 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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