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7*8월호 [쟁점과현안]검은집, 해부학교실, 므이…생식세포관리 및 보호에 관한 법률
그리고 생식세포관리 및 보호에 관한 법률
봉달 ●
늘 같은 얘기
하느라 힘드시겠어요? 라고 누군가 말한다. 줄기세포, 황우석, 난자채취 등과 관련하여 뭔가 말해야 할 때 자주 듣는 말이다. 사실 나도 이젠 좀 지겹다. 뭔가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 아닌가. 현실은 그대로인데, 변한 게 없는데, 어떤 다른 이야기가 가능할까? 그래서 난 지겨워도 계속 떠들기로 마음먹는다.
‘황우석’
이라는 사람이 등장하고, 세상의 주목을 받고, 이 사회에 치명적인 흔적을 남기며 사라진지도 꽤 지났다. 그 이야기는 사람들의 기억에‘황우석 사태 혹은 무엇’으로 남아있을 거다. 하지만 세세한 내용들은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 우리는 무엇에 열광하고 분노했던가? ‘황우석’이란 사람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나? 그 진실은‘늘 같은 얘기’속에만 존재한다. 무엇이 문제였는지도 그렇다. 황우석 연구팀이 연구결과를 조작했다는 사실만 남아있다. 꼭 기억해야 하는 것들조차 쉽게 사라지는 현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상은 끔찍하지만 예측가능하다. 황우석 연구팀이 줄기세포 1주라도 만들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에 대한 맹목적인 열광은 상상초월일 것이며, 다른 목소리는 불가능할 것이며, 여성들에게는 난자기증의 성스러운 과업이 주어질 것이다.
다른 얘기
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현실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한다. 너무 당연해 식상한가. 하지만 현실에서는 좀처럼 실천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신화, 국가경쟁력을 위해 획기적인 뭔가를 필요로 하는 국가, 인권과 윤리에 앞서 연구 성과에만 목매다는 연구자들, 여성들의 건강권보다 중요한 게 많은 의료진들, 출산의 압박에 시달리는 여성들. 이런 오래된 관행에 대한 반성과, 오래된 만큼 이를 변화시키려는 치열하고도 기발한 노력들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줄기세포 1주라도’의 끔찍한 상상은 현실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 지난한‘변태의 과정’을 무시한다. 속살이 돋기도 전에 그럴듯한 껍데기만 만들려 한다. 그들은 말한다. 합리적인 기준과 절차를 만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그렇게 탄생한 법 중 하나가‘생식세포관리및보호에관한법률’이다.
생식세포?
참 어려운 말 같지만, 생식세포는‘난자’와‘정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쉬운 말로 하면 난자와 정자를 관리하고 보호하기 위한 법이라는 의미이다. 국가에서 난자와 정자를 별도로 관리하고 보호한다고? 우리 사회 너무나 초지일관하시다. ‘황우석 사태’가 전혀 상식적이지 않았다고 그에 대한 대안조차 일반의 상식을 초월한다. 그런데 더 기막힌 노릇은, 이 법, ‘ 황우석 사태’아니었으면 상상 속에서도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 목적에 대해 사람들이 다른 소리를 한다는 거다.
불임부부의 고통
을 덜어주기 위해 이 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 불임치료 등의 목적으로 생식세포를 채취, 기증, 이용함에 있어 적정을 도모하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나 뭐라나. 그야말로‘눈 가리고 아웅’이다. 불임‘치료’라는 말도 기분 나쁜데, ‘ 불임치료 등’이라고 하면서 실제 목적은‘등’속에 포함시키는 비겁함이라니. 이 법은 정말‘(불임시술과 연구를 위해) 난자와 정자를 기증하는 경우’만을 규정하고 있다. 불임부부의 문제에 접근하고 싶다면 왜 다른 수많은 불임시술에 대한 규정은 없는가? 왜 기증하는 경우만 관리하는가? 난자 또는 정자를 기증 받아 이루어지는 시술은 전체 불임시술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물론 이런 딴지에 대해 그들이 준비한 모범답안도 알고 있다. 연구를 위한 난자제공이‘잔여난자’로 제한되어‘싱싱한 난자’를 공급받기는 불가능하므로 줄기세포 연구는 물 건너갔다는 거다. 그러니 남은 것은 불임시술뿐이라는 호소.
잔여난자
는‘본인의 불임치료를 목적으로 사용한 또는 사용할 난자를 제외한 것’을 말한다. 얼핏 보면 연구자들의 주장대로 연구를 위한 난자이용이 굉장히 제한적일 것도 같다. 그런데‘잔여난자’라는 말에 속임수가 있다. 어디엔가 쓰고 남은 난자만을 뜻할 것 같은‘잔여난자’, 하지만 정의를 보면 앞으로‘사용할(것으로 예상되는) 난자’를 제외한 것도 포함된다. 즉 의료진의 판단으로 (본인이나 타인의)불임시술을 위해 채취한 난자 중 일부가 실시간으로(채취하자마자) 연구를 위해 제공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연구자들이 말하는‘싱싱한 난자들’이다. 이것은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이미 현실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그 경로로 수백 개의 난자가 황우석 팀에 제공되었다. 연구자들, 좀 솔직해 보시라. ‘잔여난자’여서가 아니라‘어떤 난자’든 줄기세포를 만들 수 없었던 게 현실 아닌가. 그럼에도 오직 더 많은 난자를 쉽게 제공받는 데만 관심 있을 뿐, 반성은 없다. 더욱 난자를 제공하는 여성들의 인권이라니. 그들에겐 여전히‘연구의 발목을 잡는 일’일 뿐이다
난자기증자
를 모집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대 놓고‘줄기세포 연구를 위한 난자기증자’를 모집하는 것은 불법이다. 하지만 불임치료를 명목으로 난자기증을‘권유 혹은 제안(모집이 아니라)’한 후 그 일부를 연구에 제공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난자기증’의 모든 절차는 불임클리닉(배아생성의료기관)에서 이루어진다. 이제 불임클리닉이나 관련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가슴 절절한‘권유와 제안’이 쏟아질지도 모를 일이다. 또 난자기증에 대한 보상이 하루 10만 원 정도까지 가능해진다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성들에겐 비교적 쉬운 선택지가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어차피 난자채취는 ‘누구나 다하는 별다른 부작용이 없는 시술’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여기까지 말을 하면 사람들은 꼭 이걸 묻는다.
여성의 자기결정권
을 뭐로 보느냐 하는 거다. 왜 자꾸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의심하고 타인과 가족을 위해 희생하려는 것을 방해하느냐고 말한다. 충분한 설명에 의한 동의절차에 의해 여성들이 스스로 선택하게 하면 그만이지 않느냐는 거다. 자기결정권의 존중은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은‘자기결정권’을 왜곡시키는 현실의 힘이 너무 세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런 현실에서 동의절차는 그야말로 쉽게‘활용’된다. 이미 정해진 방향대로 가는 수순이 될 가능성이 크다. 국익이 최우선인 사회, 성과만 중요한 연구진이나 의료진과의 관계 속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성, 불임시술을 받는 여성, 난치병 환자를 가족으로 둔 여성, 불리한 위치의 여성연구원들에게 다른 선택은 얼마나 가능할까? 일정한 선택을 강요하는 강력한 힘들은, 그야말로 고래도 춤추게 할지 모른다. 물론 동의절차는 필수일 테지만.
여성인권과 존엄성
이 ‘난자채취’에서 왜 거론되는지 모르겠다, 난자와 정자를 사용하는 게 왜 다르냐, 위험성의 실체가 뭐냐고 ‘강력히’ 주장하던 줄기세포 연구자(나름의 권위를 인정받는‘직책’을 가졌던)와 ‘난자기증’을 통해 여성에게 사회에 기여할 기회를 줘야한다고 주장하던 모남성(체세포핵이식연구지원을 위한 시민연합)의 목소리는 생생한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내가 지겨워도 같은 얘기를 또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올 여름 줄줄이 개봉하는 공포영화들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은 이런 현실이 아닐까?
봉달 ● 어느 날 나에게도 하얀 옷 입은 모간프리먼 아저씨가 나타나
내 말과 생각이 바로바로 현실이 되는 상상을 해 본다.
그러면 늘 새로운 이야기들이 무궁무진 할 텐데. 봉다르올마이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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