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7*8월호 [연재기획III_민우역사기행]성희롱 소송, 그 역사적 장정에 함께 하다
성희롱 소송, 그 역사적 장정에 함께 하다
이수연 ●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1993년 9월경이었다. 깔끔하고 단정한 이미지가 인상적이었다. 만남이 거듭되고 겪어볼수록 힘들고 어려운 결심을 한 사람답게 당차고 야무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가 기다리던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기다렸다고? 그렇다.
그 당시의 사회 분위기
당시 한국여성민우회 노동센터에서 일하고 있던 필자는 1992년도부터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의 ‘성폭력특별법 제정추진 특별위원회(이하 특위)에 참여하면서 성폭력추방의 역사에 획을 그은 사건들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특위에는 민우회를 비롯하여 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등이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그 즈음에 발생한 김부남 사건1), 김보은.김진관 사건2) 등 가슴 아프고 충격적인 사건들은 성폭력이 피해자의 정신과 삶을 얼마나 왜곡시키는지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또한 사건의 정황과 재판결과 그리고 피해 사실에 대한 언론보도들은 우리 사회 도처에 성폭력이 만연하다는 사실뿐 아니라 성폭력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오랜 세월 은폐되었던 사건들이 연이어 폭로되면서 여성단체들은 대책위를 조직하여 소송을 지원하는 한편 국회에 성폭력특별법의 제정을 요구하는 등 왕성한 대책활동을 벌여나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에도 비로소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 이전과 비교하여 실로 놀라운 변화였다.
민우회, 직장내 성폭력의 심각성에 주목하다
일하는 여성들의 노동권 확보를 중요한 활동과제 중의 하나로 내세웠던 민우회는 다양한 유형의 성폭력 중에서도 직장내 성폭력.성희롱의 심각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상담창구를 통하여 가슴 절절한 사연들이 접수되고 있었으나 정신적 고통에 시달림은 물론 직장을 잃으면서도 자신의 권리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피해자는 매우 드물었다. 속으로 앓으면서 참고 넘어가거나 조용히 직장을 떠나 버리는 소극적 대응이 대부분이었다. 성희롱 문제가 여성의 노동권에 심각한 위협이 됨에도 불구하고 당시 분위기에서는 문제제기조차 힘들었다. 그것은 사회적인 인식 수준과 관련 제도나 시스템이 너무나 미약했기 때문이다.
당시 민우회에는 직장내 성폭력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무직회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회원들을 중심으로 ‘직장내 성폭력 연구반’을 구성하였고 필자가 간사를 맡았다. 소모임에서 회원들과 함께 성희롱실태조사 설문지를 만들기도 하고, 서울시내 한 복판인 명동 거리에서 성폭력 문제에 대한 전단을 배포하면서 호신용 호루라기를 하나라도 더 팔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뛴 기억도 있다. 또한 세미나를 하면서 자신의 직장에서 일어난 성추행 사례를 의논하기도 하고 스웨덴에서의 성희롱 경험을 담은 책을 구해 공부도 하면서 외국의 제도와 비교할 때 너무나 열악한 우리의 현실을 함께 개탄하기도 하였다.
용기 있는 그녀를 만나다
피해자의 권리구제를 계기로 제도적 보완책들을 하나하나 마련한 선진국들의 경우에 비추어 볼 때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여성인권의 사각지대였다. 피해자 중 그 누구도 사회에 고발하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 누구 한 사람이라도 용기 있게 나서 주면 나는 그녀를 위해 이 한 몸 바칠 텐데…’하는 소망을 품고서 나는 그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그 기다림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어느 날 우리 앞에 나타난 우조교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녀가 고통의 그늘 속에서 걸어 나와 역사의 현장에 등장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녀와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던 나는 마치 사랑하는 애인을 만난 것처럼 가슴이 설레고 감격스러웠다. 그녀는 서울대 내외의 수많은 비난에 시달리며 심적 고통을 겪고 있었음에도 꿋꿋한 심지를 간직하고 있었다. 당차게 나서준 그녀가 대견하고도 고마웠다. 자신의 직장에서 그것도 지성의 전당이라는 서울대에서 최고의 지식인이라는 교수로부터 그러한 모욕과 괴롭힘을 당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6년간의 역사적 장정에 함께 한 사람들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여연의‘특위’가‘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 로 발 빠르게 전환하였다. 여성단체 활동가들, 변호사, 학생 등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서울대 공대위 참여자들은 우조교를 중심으로‘환상의 콤비 드림팀’을 구성하여 장장 6년여 간의 역사적인 장정을 함께 하였다. 인권변호사는 법률적 전문성으로, 여성단체 활동가들은 실무능력과 연대의식으로, 서울대 학생들은 학내 문제에 대한 책임감과 정의감으로 법정, 거리, 토론회 등 어디서건 늘 함께 하였다.
사건이 발생한 1993년 당시에는 성희롱 피해자에 대한 구제제도와 관련 법률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우조교측에서는 가해자 신교수와 그 소속기관인 서울대, 서울대에 대한 감독책임이 있는 국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를 제기하였다. 1993년에 시작된 소송은 승소와 패소가 엇갈리다가 소송이 시작된 지 6년이 지난 1999년 11월에서야 승소가 확정되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법원은 가해자의 성희롱 행위만을 인정했을 뿐 사용자 책임과 국가의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1993년, 직장내 성희롱에 대처했던 민우회의 자세
성희롱 소송이 진행되면서 민우회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은 지속적으로 성희롱 관련 법률과 제도를 만들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공공기관이나 직장에서의 성희롱 예방지침을 제정하여 이를 널리 홍보할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민우회는 공대위에 참여하면서 소송을 지원하는 한편 1993년우리나라 최초로 사무직여성들을 대상으로 직장내 성희롱 피해 경험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하였다. 응답자의 80% 이상이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다는 결과를 얻었는데 이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민우회는 또한 외국에서 입수한 성희롱 예방 지침서를 참고하여 성희롱 행위 유형들을 소개하고 성희롱에 대한 대처방안을 제시한 소책자형식의 예방지침서를 제작하였는데, 노동부나 여성부가 수년 후에나 이러한 성희롱 관련 홍보물을 제작하여 배포한 것에 비하면 몇 년이나 빠른 셈이었다. 사실 민우회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이 정부에 대하여 성희롱과 관련된 컨텐츠들(성희롱의 종류와 판단기준, 미국 EEOC의 가이드라인 등 외국의 관련 제도들과 성희롱 판례들, 성희롱 예방 대책에 대한 자료 등)을 먼저 제시하고 관련된 법과 제도를 만들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지 않았다면 정부차원의 움직임은 훨씬 더 느렸을 것이다.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
당시 우조교를 정점으로 정의로운 공익변호사들, 여성인권 향상에 대한 열정이 드높던 여성단체들, 그리고 서울대 학생 중 행동하는 양심세력 등이 팀웍을 발휘하여 끝내 대법원에서의 승소를 얻어내었기에 오늘날 성희롱 문제에 대한 법과 제도가 마련되고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담당변호사들이 소장에서 언급하였던 표현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 작은 시냇물이 거대한 강물을 이루듯 원고의 이 용기는 우리 사회의 완전한 여성평등, 보다 인간적 사회로 가는 길목에 작으나마 뚜렷한 하나의 이정표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민우회에서 일한 덕분에 이러한 과정에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개인적으로도 커다란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있다. 당시 공대위 활동이 인연이 되어 3쌍의 커플이 탄생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이 사건의 또 다른 성과(?)였다. 공대위 활동을 통해 일과 사랑을 한 번에 이루어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타쌍피가 아닐는지?
이수연 ● 현재 국가인권위원회
성차별팀장으로 성차별, 성희롱
시정업무를 담당하고 있음.
그때나 지금이나 성희롱과
싸우고 있는데 본문에서 언급한
3쌍의 커플에 속함
1) 어린이 성폭행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가해자를 살해한 사건. 피해자는‘나는 짐승을 죽인 것이지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2) 아버지가 딸을 수년 동안 근친강간한 사건의 피해자가 남자친구와 공모하여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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