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9*10월호 [쟁점과현안]사형제 폐지- 산업화, 민주화를 넘어 문화국가로_김형태
2007 9*10월호[쟁점과현안]
사형제 폐지,
산업화, 민주화를 넘어 문화국가로
김형태 ●
2007. 8.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소위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1975년 4월 8일, 대법원 판결 확정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을 당한 8인에 대하여 대법원을 포함한 국가기관이 저지른 불법행위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대한민국은 1948년 정부수립이래 모두 998명의 목숨들을‘법’의 이름으로 사형에 처했다. 다행히도 지난 1987년 12월 28일 23명의 사형수들을 형집행한 이후 지금까지 10년째 사형집행은 중단되어 있는 상태다. 2007년 8월 현재 구치소에는 모두 64명의 사형수가 집행대기 상태에 있다. 10월 10일, 세계사형제폐지의날에 천주교, 불교, 기독교 종단 및 엠네스티, 참여연대, 민변, 민교협, 민우회 등 20여개 단체들은 10년째 사형 집행이 없어 ‘사실상 사형폐지 국가’로 분류되는 것을 기념하여 사형제폐지국가선포식을 열었다.
왜 사형폐지인가
누가 무슨 근거로 사람의 생명을 박탈할 수 있는가 - 흉악범 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인간의 생명에 대한 박탈권을 가지지 못한다. 헌법 제10조에서 국가가 보장해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닌 “국민”에는 선량한 자만이 아니라 범죄자도 포함된다. 헌법 제37조 제2항은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기본권을 제한 할 수 있으나, 그 경우에도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라도 자유와 권리와 본질적 내용인 생명권은 침해할 수 없다. 수십만명 이 학살당한 유고 및 르완다의「전범처벌을 위한 유엔안보리의 결의안」역시 전쟁·학살범죄 등 반 인륜적 범죄자에 대한 사형부과를 금지하고 있다. 유럽연합도 유럽대륙에서 사형제도를 없애겠다는 목표 아래 가입조건으로 사형제도폐지를 내세우고 있으며, 이라크에서 수십만쿠르드인을 죽인 후세인에 대한 사형집행을 강력히 반대한 바 있다.
응보를 넘어서서 용서와 화해로 - 고대 사회에서 정의 관념으로 강력히 요청되던 응보의 개념은 문명사회에서 교정과 재교육으로 바뀌었고 용서와 화해, 생명존중의 사상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아르헨티나, 칠레, 남아공 등에서 벌어진 반인권적 탄압과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책임을 맡은 위원회들의 이름도「진실, 화해 위원회」로 되어 있다.
사형으로 범죄예방은 어렵다 - 사형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들인 중국이 2002년 1060명, 이란이 113명, 미국이 71명을 사형집행 하였다. 예방효과가 거의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유엔에서 1998년, 2002년 이루어진 연구조사의 결론은 이렇다. 「사형제도가 종신형과 같이 그 위협도가 떨어진다고 간주되는 다른 형벌에 비해 큰 살인 억제력을 가진다는 가설을 수용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자세이다. 통계수치들이 일관되게 말해주는 것은 사형제도에 대한 의존도를 줄인다 하더라도 급작스럽고 심각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캐나다는 사형제폐지 직전인 1975년 인구 10만명 당 살인율 3.09명에서 폐지후인 1980년 2.41명, 2003년에는 1.73명으로 줄고 있다.
오판으로 죽은 사람은 어쩔 것인가 - 1975년 4월 8일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8명이 사형집행을 당했고, 이 사건에 대해 32년이 지난 2007년 1월 법원에서 형사 무죄가, 8월에는 극심한 고문, 장기구금, 사건의 허위조작수사 및 잘못된 재판과 판결 그리고 사형집행 등의 불법행위에 대해 민사배상으로 사형당한 사람 1인당 10억 원, 그 처에게 6억 원, 자녀들에게 3~4억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났다. 그러나 그 어떤 사후조치로도 죽은 이들의 목숨을 되살릴 수는 없다. 1995년 시작된 치과의사모녀살인사건은 1심 사형, 2심 무죄, 대법원 파기, 2심 무죄, 대법원 무죄확정으로 2003년에야 매듭지어졌다. 다같이 자격 있는 법관들로 구성된 5개 재판부가 사형과 무죄의 양극을 오갔으니 이러한 오판가능성은 사형제도를 묵과할 수 없게 하는 중대한 이유 중 하나다.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문조사에서 일반국민의 93%, 시민단체 상근자 99.2%, 언론인 94.5%, 국회의원 95.7%, 법관 69.9%가 오판가능성을 인정하였다.
아직도 시기상조인가 - 베네수엘라는 무려 140여년 전인 1863년에, 코스타리카는 1877년에 이미 사형을 폐지했다. 1863년의 베네수엘라보다 2007년의 한국이 더 무질서한 나라인가. 1863년 당시 베네수엘라는 흉악범이 전혀 없어서 폐지했는가. 시기상조라는 주장에 따르면 사형제폐지는 영원히 시기상조다.
사형제폐지운동의 현황
아시아에서 사형폐지가 가장 유력한 나라로 한국이 꼽히고 있다. 일본은 5년간 사형집행을 유예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또한 사형집행 사실 자체를 공표하지 않고 있으며 사형유지 여론이 80% 안팎을 넘나들고 있다.
한국의 사형폐지운동은 1989년 5월「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와「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사형수 교화와 사형폐지에 관한 홍보, 책자발간을 계속해 왔다.
2001년 1월에는 천주교, 개신교, 불교 종단이 중심이 되어「사형제폐지를 위한 범종교인 연합」을 결성하여 폐지법안마련, 국회, 법무부를 상대로 한 청원, 연합기도회, 공청회 등을 통하여 사형폐지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엠네스티 차원에서도 2006년을 ‘한국 사형폐지의 해’로 정하고 한국지부가 폐지 운동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2006년 3월에는 천주교 추기경을 비롯한 현직주교 22명 전원과 신자 11만 명이 사 형제도폐지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 최근 들어서는 살인 등 강력사건의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지원도 폐지운동의 일환으로 논의되고 있다.
사형제폐지에 관한 입장들
여론을 보면 대체로 60% 안팎이 사형제도를 찬성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1981년 사형폐지 법안 논의 당시 우리와 비슷하게 폐지법안에 대해 66%가 반대했으나 프랑스 의회가 “올바른 입법을 하는 것이 국민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며, 그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며 사형제폐지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 뒤 여론조사에서 70% 가량이 사형제폐지를 잘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세계 대다수 국가가 사형을 폐지했지만 그 어느 나라도 여론에 의해 폐지된 사례가 없다.
국회에서는 15대에서 91명의 의원들이, 16대에서는 과반수가 넘는 155명의 의원들이, 17대 국회에서도 175명이 사형폐지 법안을 발의하였다. 그러나 15, 16대 때는 법사위 심사도 하지 못한 채 자동폐기 되었고, 17대 국회는 법사위에서 2006년 4월 공청회까지 열었으나 법사위 의원들의 찬반이 팽팽하다는 이유로 논의를 진전시키지 않고 있다. 국회의장이 본회의에 직권상정하는 방법이 있지만 정치적 이득이 별로 없다는 판단 하에 의원들은 가능하면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기를 꺼려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에서는 1996. 11. 28. 84헌바1 사건에서 생명권 역시 중대한 공익의 필요성이 있을 때는 제한이 가능하다며 사형제도가 합헌이라고 판단하였다. 소수의견은 사형제도는 헌법제10조에 규정된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보호의 요청에 반하고, 헌법 제 37조 제2항 단서의 생명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제한이므로 위헌이라고 보았다.
국가인권위는 2004년 4월, 사형제도는 생명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폐지되어야한다는 의견표명을 하였다.
법무부의 경우는 장관의 태도에 따라 입장이 바뀌어 왔다. 천정배 장관은 2006년 2월 법무부「변화전략계획」을 발표하면서 사형제도에 관한 연구를 통해 유인태 의원 법안에 대한 국회심의를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장관이 바뀌어도 국가기관인 법무부차원에서 수립된「변화전략계획」에 따른 연구 검토 작업은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사형제폐지의 전망 : 산업화, 민주화를 넘어서 문화국가로
연초 이라크의 후세인 전 대통령에 대해 교수형을 집행하는 사진을 보고 전 세계 사람들은 몸을 움츠렸다. 유럽연합, 로마교황청 등은 아무리 후세인이 주민학살을 했다해도 사형은 절대 안 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이에 반해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후세인의 잘못이 크다. 사형제도는 각 나라들의 입장에 맡길 일이다.”라는 발언을 했다가 유럽 등 국제사회로부터 커다란 반발을 샀다. 사형을 반대하는 유엔의 입장에 어긋나고 사형제도를 유지하는 한국출신 반 총장이 지닌 한계라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사형제도는 단순히 흉악범을 죽이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넘어서서 한 사회의 가치수준, 문화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다. 세계에서 사형집행이 가장 많은 나라는 중국, 이란, 사우디, 몽고, 미국 순이다. 특히 중국은 2004년 한해 무려 3,400여명을 사형시켰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헌법에서 사형폐지를 명문화하였다. 당초에는 가석방이 불가능한 절대적 종신형으로 시작하였으나 가석방도 가능한 상대적 종신형으로 바뀌었다. 우리도 우선 절대적 종신형을 도입한 후 사회가 좀 더 성숙되면 궁극적으로는 상대적 종신형제로 가야 할 것이다.
지난 수십 년 우리는 사상 유례가 없는 짧은 기간 동안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서 진정한 문화국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웃의 인격을 존중하고 흉악범의 생명도 소중히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 첫 단추는 바로 사형제도폐지다.
김형태 ● 변호사, 천주교 인권위원회 이사장, 사형제폐지 범종교인연합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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