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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9*10월호 [연재기획]타자 새로 찾기, 그리고 나를 만나기
2007 9*10월호 [연재기획]관계속에서나를보다
타자 새로 찾기, 그리고 나를 만나기
이윤상 ●
이건 아니잖아…
우리는 젊다/늙다, 철없다(어리다)/철들었다 등을 나누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철저히 상대적인 개념이다. 물론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가가 경험이나 경력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나이라는 변수가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언제 누구와 동일시하는가, 어떤 집단이 나의 준거집단이 되는가는 다분히 ‘선택적’이고 ‘상황적’이다.
부소장, 이름도 어중간하다. 소장도 아닌 것이, ‘ 일반’활동가도 아니다. ‘내부총괄’, 역할도 모호하다. 담당자도 아니면서 모든 사업에 참견하는 역할. 누군가 나한테 ‘시어머니’라 했는데, 틀리지 않다.
한 때 나는 딱 부러지게 일하고 책임감 강하다고 칭찬받기도 했는데, 이제는 ( ‘보수적’이라는 누명을 동반한)원칙주의자란다. 한 때 나는 세상만사 마음에 드는 것 없이 문제제기가 많아 시끄럽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제는 잔소리가 많아 시끄럽단다. 딱 부러지는 분명함이 기존질서를 옹호하는 원칙수호가 되고, 비판의식이 잔소리로 변모했다는 것을 순간순간 느낄 때 마다 허겁지겁 당황하며 ‘나는 누구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나는 누구지?’
‘나’는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있다. 97년도(내가 처음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을 시작하던 해)의 ‘나’와 2007년도의 ‘나’는 단지 시간의 차이 때문에 다른 것만은 아니다. 집에서의 ‘나’와 사무실에서의 ‘나’는 단지 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것은 아니다. 내가 다른 것은 그 자리에서 내가 누구를 어떻게 만나는 지가 달라서이다. 그 만나는 방식에 따라 어떤 ‘나’를 개발할지 과업이 달라지므로.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처음 여성운동을 시작하였을 때, 나는 소위 ‘젊은 그룹’의 멤버였고, ‘여성운동 경력이 좀 된 선배 그룹’과 맞서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렇게 맞서면서 나는 나를 젊은 그룹의 일원으로, 열정 넘치는 20대 여성으로,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깨어있는 세력으로 그렇게 ‘나’를 만드는 게 의미있고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상담을 어떻게 하는지, 사업은 어떻게 하는지, 언론 홍보는 어떻게 하는지, 성명서는 어떻게 쓰는지, 동료들과는 어떻게 지내는지, 여성운동은 무엇인지 등을 배웠다.
지금 내가 매일 만나는 ‘젊은 그룹’의 활동가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긴장하게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감각으로 무장한 그들을 보면 정말 가슴이 뛴다. 나도 십수 년 전에 저들만큼 훌륭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들이 나한테 무섭게 이의를 제기하는 순간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나도 저렇게 막무가내였던가? 설마 내가 저랬을까….
이제 나는 ‘젊은 그룹’의 일원이 아니라 그들을 타자로 만난다. 그것은 내가 더 이상 ‘젊지’않아서가 아니라, 다른 자리에 섰기 때문에 더 이상 그 그룹의 멤버쉽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빼앗긴’멤버쉽이 못내 아쉬워 억울한 순간도 있고 화나는 순간도 있는 것을 보면 여전히 그 변화를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듯 싶다. 어쨌든 이제 나는 그들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역할을 요구받기도 하고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역할 안에서 원칙주의자가 되기도 했다가 잔소리꾼이 되기도 한다.
그들을 타자로 만나는 방법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방식이 있을 텐데, 원칙주의자나 잔소리꾼이 아닌 좀 더 매력적인 것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타자와 나
앞으로 몇 년 간은 나에게 큰 도전의 시기가 될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여성운동을 본업으로 먹고사는 여성운동가이지만, 누가 나의 준거집단이고 누가 나의 타자인지, 그들을 통해 나의 어떤 모습을 개발할 것인지는 새로 던져진 과제다. 뭐, 두렵고 저항감도 생기지만 동시에 흥미진진하기도 하다.
여성운동을 하는 나의 친구가 얼마 전에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앞으로 몇 년간 실무자로 좀 더 일하고 그만둘 거야. 절대 대표는 안 할 거야.”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냐고 눈을 흘겼지만, 사실 나도 그 마음 충분히 공감하고, 그런 선택을 존중한다. 그 친구의 말에는 현재 준거집단에서 나와, 그들을 갑자기 타자로 만나는 경험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분명 있다. 그 그룹의 멤버쉽을 유지하면서 하는 일과, 그 그룹의 멤버를 타자로 만나서 해야 하는 일은 어쨌든 크게 다르므로, ‘선택’은 중요한 것이다.
나는 뺏긴 멤버쉽을 잊고 새로운 멤버쉽을 쟁취해야 하는 도전적인 과제를 안고 오늘도 출근하고, ‘젊은 그룹’을 만나고,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되 정말 다른 일을 하면서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슬그머니 뺏겨버린 멤버쉽이 얼마나 멋지고 달콤한 것인지 잘 알고 있어 못내 아쉽고, 새로 획득해야 하는 멤버쉽이 무엇인지 잘 몰라 당황스럽기도 하다. 특히 많은 선배와 동료들이 여성운동 현장을 떠나, 지금 여기서 만날 수 있는 나의 준거집단이 썩 잘 보이지 않아 더욱 힘들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준거집단이 누군인지 정확하게 알아보는 지혜와, 젊은 그룹의 타자성이 나에게 던지는 과제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현명함이 있다면 과제 정복이 그리 멀리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평등하되 역할이 다르고, 많은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되 나의 비전을 잃지 않고, 책임을 혼자 짊어지는 우를 저지르지 않으며, 조금 늦더라도 다양함을 인정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고, 그러면서도 시대의 흐름에 한발 앞서는 민첩함을 갖춘 리더라! 정말 황홀한 과제가 아닌가!
이윤상 ●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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