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der board list icon](/assets/common/header-board-list-icon-871ea5b4968af0aff7ac9000984dc947.png)
2007 9*10월호 [연재기획]우리 ‘사이’, 관계의 온도와 거리_돌싱 R
2007 9*10월호 [연재기획]
①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
② 자매애는 있는가
③ 행복찾기
④ 여성주의자, ‘관계’속에서 나를 보다
여성주의자, ‘관계’속에서 나를 보다
우리는 자기 모습을 직접 볼 수 없다. 오직 거울을 보거나 다른 사람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을 뿐. 또 무엇인가를 통해 보게 되는 내 모습은 늘 변화무쌍하다. 나를 둘러싼 ‘무엇들’ 혹은 ‘누구들’은 수많은 ‘나들’을 만들어 낸다. 그런 ‘나들’은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연애, 가족, 여성운동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 여성주의자들이 자신의 어떤 모습을 발견하고, 어떤 질문을 던지게 되는지를 들어보자. 다른 ‘나들’을 질문하며 주변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경험이야말로 우리를 성장하게 하는 힘은 아닐까.
2007 9*10월호 [연재기획]
우리 ‘사이’, 관계의 온도와 거리
돌싱R ●
대부분의 사람들은 때때로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경험을 한다. 꿈과 야망이 큰 사람일수록 그러하고, 시시콜콜하고 사사로운 것 또는 그러한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예를 들면 ‘연애 따위’와 같은 것)이라며 제쳐 놓았던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러한 것에 발목이 붙잡히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사랑이나 연애는 혁명(!)의 적이고, 야망과 일에 대한 열정을 키우는 데는 도움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연연하지 않아야 할 어떤 것이며, 로맨스의 신화이고, 이데올로기적이기 때문에 사랑 타령을 하거나 연애에 목숨 걸거나, 연애 때문에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볼 때 관대할 수가 없으며, 마음의 사치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그러한 것들이 자신에게 닥쳤을 때 자신에게 또한 냉정한 칼날을 들이대려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시시콜콜한 고민이나 잡담을 일삼을 때, 연애나 사랑에 매몰 돼 있을 때, 자신을 검열하지 않고 즐기거나 떠벌이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다.
연애, 사랑, 관계처럼 제 발등 찍기에 ‘딱’인 것이 없다. 미시적인권력관계와 그 밖의 거시적인 권력관계의 맥락 안에 위치하고 있는 ‘관계’라는 것은 그 나름의, 개인의 권력 망을 벗어나는 역학을 가지고 있으며, 제 아무리 잘나고 현명한 여자들이라도 이 함정으로부터 자유롭고 쿨(cool)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여성학을 공부한 R의 일이다. 이성간의 결합만을 혼인이라 명명하는 이 사회의 결혼제도 안에서, 여성주의자들의 이성 간 연애나 결혼 같은 것은 가부장제와의 공모를 의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많은 여자들이 그러하듯이 자신의 상대만큼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로 그 늪에 자처해서 빠지곤 한다. 결혼을 몇몇 친한 친구만을 불러서 쉬쉬하듯이 해치우고, 결혼 생활의 힘듦에 대해 터놓고 말할 친구도 갖지 못했으며, 결혼 전과 후가 달라지지 않게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R은, 지지해 주는 사람도 없이 외로운 줄타기를 해야 했다.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괜찮아야 할 것 같았고, ‘결혼=가부장제와의 공모’라는 혐의(?)를 벗기위해 기존의 남성과 여성의 모습에 복무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싸우는 투사로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었다. 매번 검열에 검열을 거듭하며, 공모자가 되지 않기 위해 수많은 에너지를 나도 모르게 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옥탑방 K와 평등하게 가사노동을 나누고 각자의 삶을 위해 온전히 에너지를 쏟을 수 있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연애라는 것,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은 거기에 그치는 일만큼의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R이 여성주의적인 사고로 똘똘 뭉쳐 있고, 욕망의 주체되기, 사랑의 주체되기, 성적 자기결정권, 몸에 대한 권리 갖기, 개인의 행위성 등으로 인한 섹스-젠더-섹슈얼리티의 지형이 변화하고 있는 세상을 산다 해도, 연애와 결혼(결합)의 실오라기들로 직조된 관계의 치밀한 함정들은 개인의 영역과 역량 밖의 무언가가 있었다.
관계의 온도 hot..-warm..-cool..
사랑과 배려라는 이름의 집착과 간섭은 관계의 온도 차이에서 발생한다. 무관심과 무시,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역시 관계의 온도 차이이다. 내 관계의 온도는 hotwarm-cool의 어디쯤 위치해 있을까? 또 상대의 관계의 온도는 몇 도 일까?
이 나라의 경우, 관계의 온도 차는 세대차로 재현되기도 한다.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되고 아무도 단절시킬 수 없는 끈끈한 피로 가족이 되고, 민족이 되고, 문제투성이 이더라도 감싸고 안으로만 굽어야 하는 팔, 여성과 아이는 나약하고 보호가 필요한 존재로 믿어지고, 밤늦게 돌아다니거나 폭력에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남자와 같이 권력 있고 경제력 있는 사람들이 가족과 사회를 책임지며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을 내재하고 있는 전근대적인 관념을 바탕으로 하는 관계가 hot이다. cool은 직설적이고 개인중심적이며, 관심 분야가 아닌 경우 냉소적일 수도 있고,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고, 개인의 사생활이 침해되는 것이 폭력이며, 개인의 행위성(agency)과 주체성(subjectivity)을 근간으로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cool에게 hot은 지나친 간섭이고 집착이며, hot에게 cool은 무관심이며 버르장머리가 없다. 친밀한 관계 안에서도 이러한 온도차이는 발생한다. 누구는 사랑한다 말하지 않는 것에 서운하고 누구는 말하지 않는다고 몰라주는 것에 섭섭하다. 옳고 그름,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때, 관계의 문제와 되도록 거리를 두려는 사람이 있고, 의사 표현에서 친밀한 관계의 편을 들지 않는 것이 관계에 치명적인 것이 되는 사람이 있다.
적당한 관계의 거리
관계에는 각각의 온도차 뿐만 아니라 거리의 차이도 존재하고, 서로 상정하고 있는 거리의 차이에 의해서도 온도차가 발생한다. 추울 때 붙어있으면 서로의 체온으로 따뜻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너무 가까우면 hot이 되고 너무 멀면 cool 또는 cold가 된다. 너무 가깝거나 멀면 상대를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이 내 바로 옆에서 어깨동무를 해도 아무렇지 않으며, 내가 키우고 있는 아이가 곧 ‘나’여서 모든 애정과 에너지를 쏟아 붓고서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며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관계는 적당한 거리두기를 필요로 한다. 함께 살건 그렇지 않건, 친밀한 사이이건 그렇지 않건, 사랑하는 사이이건 그렇지 않건 모든 관계에는 온도와 거리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고 우리는 이러한 온도의 차이를 고려한 관계의 기술이 필요하다. 좋은 조건(정신적이건 물질적이건)의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가 중요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관계의 시작에 있기 보다는 과정에 있고, 언젠가는 잘 헤어질 수 있어야 하는 관계의 끝에 있다.
1:1의 배타적 대응관계
이성간의 결혼(결합)만이 성립하고, 가족이 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한국사회의 이성간 연애와 결혼은 반쪽 짜리도 채 안되는 일부의 사람에게만 해당한다. 여성주의자에게 연애와 결혼은 가부장제와의 공모 혹은 협상으로 보일 수도, 혹은 그리 보일까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연애나 결혼에 있어서 내 발등을 찍는 것은 가부장제도, 이성애 중심주의도, 결혼 제도도, 가족도 그 무엇도 아닌 듯하다.
관계는 어디서는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조합, 재조합하기도 하고, 나와 나로 이루어진 혼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혼자인 나를 냉소적으로 보거나 외롭다고 여기거나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며, 1+1이 1이 되는 산술 방식의 연애나 결합을 진정한 사랑으로 간주하고, 그것이 0이 되거나 2가 되거나 2이상이 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한다. 또는 1+1이상의 조합은 바람둥이이거나 양다리 이거나 불륜이거나 하는 등의 불안전한 관계로 위치 짓는다.
관계는 본래 역동적이고, 온도차와 거리차로 인해 조합. 재조합될 수밖에 없다. 1:1의 배타성을 관계의 속성이라 하더라도 그 속성이 관계의 제 맥락을 압도한 나머지, 다른 관계 맺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관계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그냥 묻어두게 하거나, 하나의 대상과 ‘영원히’일 것을 종용하게 되는 것은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R이 K와 결혼(결합)한 직후에는 가부장제와 공모, 협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제살 깎아 먹기도 종종하였고, 헤어지기 직전까지는 이미 함께 살 이유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혼인의 해소-이혼이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염려하며 그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테두리 안에서 ‘나는 괜찮다’라고 위로하며 바둥거렸다. 두려웠던 것이다. 관계가 깨지거나 새로 시작하거나 관계 맺기를 쉬거나, 그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 듯하다.
R은 이제 옥탑방 K와 잘 헤어지고 C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고 있다. 적어도 ‘영원히’라는 건방진 말은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영혼(soul)의 자유로움을 침해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말이다.
돌싱R ● 엄마에게 효도하기 위해 결혼했다는 나에게, 그녀는 예전엔 ‘헛똑똑이’라더니 이젠 ‘돌싱’이라고 한다. 이혼하면 부모에게 큰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해서 미루고 버티고 여러 가지를 하다가 미친척하고 관계를 해소 하려고 한다 했더니 영화「카모메 식당(갈매기 식당)」의 사치에처럼 “네가 한 결정은 무엇이든 지지해주겠다”며 쿨하고 다소 싱겁게 R의 고민의 화기를 진정시켜주었다. 이번 명절엔 돌싱(돌아온 싱글)이 되어 방바닥을 한가로이 뒹굴 수 있을것 같다.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