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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1*12월호 [국제통신원]버마-우리의 역사는 다르지 않습니다_조모아
◎ 국 제 통 신 원
우리의 역사는 다르지 않습니다
조모아 ● Zaw Moe Aung
버마의 역사
버마는 1886년부터 1942년까지 영국 식민지배를 당했고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 식민지배를 받았습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영국이 다시 식민지배를 했고 버마는 1948년 1월 4일에 독립 했습니다. 그리고 1962년 3월 군사정권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버마에서는 1988년 8월 8일에 민 주항쟁이 발생했는데 군대가 3000여명 이상의 스님들, 시민들, 학생들을 유엔에서 사용을 금하는 G3 총으로 죽이고 수천여명의 민중들과 스님들을 감금했습니다. 1988년 9월 18일부터 군대가 다시 쿠데 타 일으켰고 1990년에 총선거를 실시했습니다. 아웅 산 수지가 총장을 맡고 있는 버마민족민주동맹이 82% 지지율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정권을 이양하지 않았고 버마 민주주의 지도자 아웅 산 수지 총장도 가택연금을 계속 당하고 있습니다. 현재 버마 감옥 내에는 1300여 명 이상의 정치적 양심수들이 감금되어 있고 국회의원 13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버마 민주화 운동 현황
석유 판매를 독점하고 있는 군사독재는 2007년 8월 15일 수요일, 아무런 통보도 없이 주요 독재소유 주유소의 석유가격을 2배로 올렸습니다. 이에 대한 효과는 즉각적이었습니다. 대중교통수단의 비용이 2배로 올라서 위성도시에 사는 시민들은 직장에 출근할 차비를 마련하지 못하는 사태가 일어났으며 택시와 버스의 배차량이 감소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수시로 전기가 끊기는 사태를 방지하고자 디젤 발전기에 의지하여 상점을 운영하는 상인들은 강제로 상점의 문을 닫아야 하는 사태가 벌 어지게 되었습니다. 등교를 하기위해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하는 대학생들과 지방의 농부들은 석유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수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또한 이러한 석유 값의 증가에 의한 도미노 현상으로 식료품, 의류와 기초적 생필품의 가격이 급등하였습니다. 쌀의 가격은 10% 증가하였으며 식용유는 20%, 육류는 15%, 마늘과 달걀은 50% 인상이 되었습니다. 식당에서 사먹을 수 있는 국수의 가격은 3배로 올랐습니다.
이후 몇 주간 버마의 수도 양곤에서는 수년 동안 가장 크고 조직적인 시위가 진행되었습니다. 수백여 명의 양곤 시민들은 랑군의 거리에서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지지하여 주었습니 다. 군사독재는 시위를 저지하기 위하여 수많은 수단을 사용하였으며 특히 독재의 동료들은 폭력배들 을 가담시켜 시위를 저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말 무렵에는 100여명이 넘는 활동가들이 체포당했으며 다른 주요 지휘자들을 체포하려고 혈안이 된 당국은 활동가들의 가족에게 심한 압력을 주고 있습니다.
9월 6일에 만데레이 두 번째 수도 근처 바콕꾸시에서 스님들은 법언을 낭송하면서 평화적으로 가두 행진을 했습니다. 평화적으로 가두행진을 하는 스님 두 분을 독재 세력들은 나무에 묶고 때렸습니다. 스님들은 많이 다쳤습니다. 그래서 9월 18일까지 군부가 사과하라고 스님들은 항의했습니다.
9월 17일에는 독재 세력의 공양을 거부하였고, 18일까지 사과를 안하자 여러 지역에 계신 스님들이 모여서 법언을 낭송하면서 평화적으로 가두행진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승려들은 주민 3천여 명과 함께 버마의 수도 양곤에서 3시간 동안 16㎞의 거리를 불경을 외면서 평화행진을 벌였습니다. 22일에 아웅 산 수지 여사의 자택 앞에서 가두행진을 하였습니다. 아웅 산 수지 여사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군부는 25일부터 양곤 수도와 만데레이, 두 도시에서 60일 동안 야간 통행과 집회를 금지한다고 공포했습니다. 스님들은 군부와 세력들의 공양을 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시민들이 공양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1) 물건 값을 내려라 2) 정치적 양심수들을 석방하라 3) 화해할 수 있도록 즉각 정치적 대화를 하라
스님들은 이렇게 세 가지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들, 연예인들, 가수들, 학생들, 시민들은 승려들에게 공양하고 함께하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들이 함께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26일부터 군대가 쉐다공 파고다와 수레이 바고다 앞에서 평화적으로 가두행진을 하는 스님들과 시민들, 학생들 속으로 최루가스를 발사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나무 봉으로 때리고 총을 쏘았습니다. 부처님 앞에서 부처님 아들 승려들을 학살했습니다. 군대가 낮에는 총으로 쏘고, 밤에는 민주화 운동 과 관련된 절을 찾아가 경내에서 나무 봉으로 승려들을 때리고 주지스님들과 스님들을 구속했습니다. 다른 절 경내에 계신 스님들은 밖으로 못 나오게 군대가 막고 시민들은 절 경내로 출입을 금지시켰습 니다. 군사독재 세력들은 큰 스님들과 스님들을 공업학교 안에 구속하고 있습니다. 양곤 수도 체육관 안에서도 2000여 명을 구속하고 공업학교 내에도 500여 명 스님들을 감금했습니다.
군부 방송국에서는 9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수십만 명에게 총을 쏘았는데 9명만 사망했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알려지는 숫자는 1000여 명 사망, 400여 명 이상 사상, 국회의 원 15명과 NLD(National League for Democracy)당원 200명을 포함해 6000여 명 구속입니다. 군사독재 세력들이 구속 된 스님들의 승복을 벗기고 수용소로 보내고 있다고 외신 방송국을 통해서 소식을 듣습니다. 민주화운동가들의 휴대폰들은 차단당하고 일반 집전화기들도 통화하기 어려운 상태 입니다. 버마 내의 유혈진압에 대해 인터넷으로 외신에 소식이 나가기 때문에 지금 인터넷 선들을 차단했습니다.
버마의 여성들
버마의 여성들 버마 여성들은 군부독재 치하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압제를 감내해 내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강제노동, 강제이주, 고문, 강간, 강제매춘 및 인신 매매 같은 군부가 자행하는 다양한 방식의 인권유린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습니다.
버마 정부는 보건이나 교육 서비스에 비해 군대에 대한 지출을 훨씬 더 늘려왔으며, 버마 여성과 아동은 그러한 불균형의 직접적인 피해자입니다. 2002년 미 국무부에 따르면, 버마정부는 국내총생산(GDP)의 40%를 군비로 지출하고 GDP의 단 1%만을 교육에 지출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는 학교, 훈련된 교사, 학교운영비 등의 부족이라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런 이유와 또한 매우 비싼 수업료로 인해, 많은 버마인들이 학교에 갈 엄두를 못 내거나 기초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박탈 당하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버마내 빈곤, 정치적 불안정,
성역할(Gender role) 등의 측면에서 젊은 소녀들은 가장 심각한 피해자들입니다.
버마 전체에서 소녀들은 소년들보다 교육 받을 기회가 더 적으며, 전체 여학생의 1/3 가량이 초등교 육을 완전히 끝내지 못합니다. 여학생의 학습 중도포기 비율이 이처럼 높은 것은 조혼, 임신, 성역할 에 대한 전통적인 사고때문입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만약 버마 군부독재가 장악한 지역을 건너 통학해야 한다면 학부모가 딸을 학교에 보내기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군인들에게 강간이나 기타 성적 학 대를 당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형편상 자녀 가운데 한 사람만 교육시킬 수 있다면 이들은 또한 대부분 딸보다는 아들을 택합니다. 버마 여성들은 다양한 종류의 성폭력을 포함한 조직적인 인권유린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강간은 내전이 벌어지는 지역에서 가장 흔히 벌어지는 범죄입니다. 군부정권은 강간을 전쟁의 한 전략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카렌, 카레니, 산 주 같이 무장 투쟁이 잦은 지역에 사는 여성들은 군부가 자행하는 강간과 기타 조직적인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샨 여성 행동 네트웍(SWAN)에 따르면 버마 군대는 1996년에서 2001년에 이르는 기간에 샨 주에 600명도 넘는 여성들에게 강간을 자행했습니다. 강간은 대개 구타, 신체절단, 질식 같은 극심한 폭 력과 고문을 동반했습니다. 인신매매 또한 버마 전역을 통틀어 심각한 문제입니다. 많은 여성들이 인접국인 중국이나 태국 등지로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버마 군부정권의 경제 실정, 만연해있는 부패와 취업기회 부족 등입니다. 현재 태국 매춘 굴에만 약 4만 명의 버마 여성들이 취업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대부분이 소수민족 출신입니다. 일부는 강제로 납치당했으며, 대 부분은 취업시켜 주겠다는 거짓 약속에 속아 팔려옵니다.
우리의 역사는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과 버마 역사는 일제 식민지, 군사독재 의 쿠데타, 민주화운동들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도 민주화 운동에 대한 국제 사회의 도움을 받으 면서 운동과 활동들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인 여러분, 한국과 버마는 아시아 내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버마 민주화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모아 ● 버마민족민주동맹(자유지역)한국지부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Liberated Area))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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