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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1*12월호 [연재기획]'엄마와 딸'-사랑하는 남자를 살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잃고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인어공주, 엄마_희정
◎ 연재기획
①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
② 자매애는 있는가
③ 행복찾기
④ 여성주의자, ‘관계’ 속에서 나를 보다
⑤ 여성주의자, ‘관계’ 속에서 나를 보다
두 번째 이야기 ‘엄마와 딸’
사랑하는 남자를 살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잃고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인어공주, 엄마
희정 ●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벌써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엄마를 보지 못한지 오늘로 4달째 이다. 사실 엄마를 이 보다 더 오래 보지 못한 적은 많다. 그러나 지금은 의도적으로 보지 않고, 모든 연락을 끊고 있기에‘엄마’를 생각하는 순간 눈물이 흐른다. 엄마는 이제 팔순을 눈앞에 둔, 언제 운명 을 달리할지 모를, 그래서 동정심을 가져주어도 좋을 그런 노인이거늘 난 올 해 여름 끝 무렵 엄마가 더 늙고, 더 힘이 없어지고, 더 죽음과 가까이 가 있어 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그때가 올 때 까지 절대 엄마를 보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모든 연락을 끊었다.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고 있는 엄마는 예뻤다. 나는 예쁜 엄마가 자랑스러웠지만 언제나 그랬던 건 아니었다. 엄마와 달리 둥글넓적한 아버지를 닮은 난 지겹도록 듣던 말이 부잣집 맏며느리감이란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난 엄마가 미웠고 질투심을 느꼈다. 그런데 내가 듣기에 엄마는 당시 여성으로서 흔치 않았던 사범학교 교육까지 받고 작은 오빠를 낳을 때까지 초등학교 교사로 지낸 ‘직업’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러나 이런 엄마의 경력을 말하는 사람은 엄마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수많은 친척들이 들고 났지만 아무도 엄마가 과거에 어떤 공부를 했고 무슨 직업을 가졌었는지 입 밖 에 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매일 목격하는 엄마의 모습은 부엌에서 ‘식모 언니’와 음식을 장만하던 고단한 모습,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며 대문 밖을 내다보는 모습, 그리고 공부하지 않는다고 오빠들에게 불호령하던 무서운 엄마의 모습이었으니 엄마 스스로가 당신의 경력을 말 하지 않았다면 나는 엄마가 원래 태어나서부터 그렇게 사는 사람이려니 했을 것이다.
내가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아버지는 승진을 하셨고 엄마는 고운 한복이나 세련된 양장을 한 모습이 자주 목격되곤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엄마는 부엌을 맴 돌았고, 거의 2-3년에 한 번씩 조금씩 넓은 집으로 옮기기 위해 이삿짐을 쌌으며, 해마다 김장철이면 벽 하나를 족히 가릴 정도로 높이 쌓인 배추들을 다듬어 김치를 했다. 아버지의 승진이후 우리에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간혹 아버지 직장의 기사가 운전을 하는 차를 타고 놀러 다녔다는 것이다. 우리는 놀러 간 곳에서 돗자리를 깔고 엄마가 준비한 찬합 속의 음식들을 먹었다. 지금 보면 그 때 사진 속 엄마는 몸에 붙는 투피스를 입고 스타킹을 신고 그리고 검정 하이힐을 신고 돗자리에 쭈그리듯 앉아 열심히 음식을 풀고 있고, 나는 김밥을 한 입 가득 넣고 볼이 불룩해진 채 엄마 옆에 있던 사이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음식을 챙기기에도 바쁜 엄마를 아마 목이 말라 재촉하고 있던 모양이다. 이후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고, 늦게 학위를 받으시고 일흔이 다 될 무렵 한 분야에 끼친 공헌이 인정된다 하여 훈장도 받으셨다. 이제 엄마의 동선은 부엌, 학위 수여식장, 그리고 훈장수상 축하모임 장소 등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엄마의 자신의 과거 경력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잦아졌다. 얼마나 예뻤으며, 얼마나 유능한 교사였는지, 여든이 다 되어가는 아버지는 여전히 당신이 죽기 전까지 일을 그만둘 수 없다 하시고 아침 여덟시면 출근을 하고 엄마는 출근하는 아버지를 위해 식탁을 차린다.
그런데 아버지는 초지일관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변치 않는 반면, 엄마는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양극을 오가는 분열적 태도를 보인다. 교사를 그만 둔 것을 후회하는 엄마 에게 “고집을 부려서라도 계속하지 그랬냐”면 대답은 늘 같았다. “내가 시집을 올 때 여느 새색시들 은 고개도 못 들고 수줍어했지만 난 당당히 ‘희망의 나라로’를 불렀다. 나 남편 훌륭히 키워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럴 자신 있었다, 그러니 남편을 먼저 키워야지.” 그리고 돌아서선 또 반복한다.
‘내가 그때 직장을 그만두지만 않았던들…’. 엄마는 가족이 함께 밥 먹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 지 감격에 겨워 말하면서도 한 끼의 식사를 차리는 내내 음식 하는 일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 일인 지 도무지 아느냐고 옆에 있는 아버지를 닦달한다. 나는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리고 집안이나 조건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 ‘진짜 사랑’을 하고 그 사람과 결혼해서 멋지게 살리라 생각했다. 사랑을 했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그리고 십년이 흘렀다. 그리고 나서야 내 삶 에서 만들어지고 있던 동선이 엄마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역할 을 강요하는 결혼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도 엄마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주고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물거품이 되어버릴 삶을 살 것이 뻔히 보였다. 그래서 난 ‘가족의 울타리’ 밖으로 걸어 나왔다.
엄마는 먼저 울었다. 그 눈물은 ‘천륜’과도 같은 가족의 연은 끊을 수 없다는 논리의 전개와 함께 줄초상이 난 집처럼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엄마의 태도에 내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더 격한 감정을 드러낸다. “그 사람 말년에 너한테 다시 온다. 아무리 거부해도 운명이다. 그러니 발버둥쳐도 소용없다.” 이쯤되면 넋두리가 아니라 거의 저주에 가깝다. 또 한편으로 엄마는 나의 독립에 매우 안도한다. 혼자 사는 삶이 편하다는 것이다. 엄마가 독립모드에 호응해 올 때는 꼭 나와 함께 살고 싶다고 하신다. 이제 더 이상 걸레질 할 힘도, 아버지 식사를 차릴 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얘야, 나 이제 가스 불 켜는 것도 잊어버렸다”하면 난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죄인이 된 심정으로 초조해지곤 했다. 그래서 장을 봐서 달려가 저녁이라도 차려드리고 나면 설거지를 하는 내 뒤통수에대고 제 가족은 다 버리고 여기 와서 이러고 있으면 되겠냐고 이제는 애 아빠하고 다시 합쳐야 하지 않느냐고 퍼붓는다. 엄마의 두 개의 뒤엉킨 감정은 시간이 지나도 잦아들 기미가 없었다. 아니 그 강도가 더 심해졌으며, 결국 견디지 못하고 내 쪽에서 연락을 끊고 말았다. 가끔 나는 엄마의 음성 메시지를 듣는다. ‘이제 정말 가스 불 어떻게 켜는지 모르겠다.’ ‘도둑이 문고리를 흔들다 갔다.’ 엄마가 이렇게 된 것은 엄마의 잘못이 아니란 것을 난 알고 있다. 엄마는 여성의 희생을 담보로 그 존재감을 확인하는 가부장적 결혼제도의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또한 아버지의 사회적 성공으로 그 제도가 주는 이익 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때문에 아버지의 목소리로 나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분열과 조울을 견디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나 역시 쉽게 깨어지는 내 감정 을 추스르기에도 버겁기에. 그래서 엄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이미 늙은 엄마가 더 늙어 더 이상 내 삶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내가 너무도 무력하기에…. 그리고 아직도 설거지 거리와 걸레 사이를 오가는 엄마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기에…. 어린 시절 읽었 던 왕자님의 화려한 모습 뒤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가는 인어 공주 이야기가 자꾸 생각나기에….
나는 타인의 노동과 눈물이 사랑으로 찬미되고 희생이 사랑과 동의어로 통용되는 그런 사회가 살기 힘든 사회라고 생각한다.
희정 ●
문화미래 이프 사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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